• 2. 혁명가가 되었던 개화파 청년

    '급진적 언론인' 독립협회 행동대원으로 활동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에 이승만은 한글신문인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을 발간하면서 언론인으로 국민계몽에 나섰다.
       독립협회에서도 열심히 활동했다. 당시 독립협회는 서재필,이상재,남궁억,정교와 같은 개화파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들 밑에서는 이승만과 같은 배재학당 학생들이 행동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 ▲ 이승만이 1898년 창간한 민간 최초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호 지면.
    ▲ 이승만이 1898년 창간한 민간 최초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호 지면.


       독립협회는 윤치호(尹致昊)가 회장을 맡으면서 더욱 더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주의적인 단체가 되어갔다.
       윤치호는 이승만 보다 10세 정도 위인 개화파 지식인으로서, 1884년의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였던 아버지 윤웅렬을 따라 상해로 망명했다. 그리고는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부가 세운 중서학원을 다녔다.
       그리고 나서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테네시의 밴더빌트, 조지아의 에모리 대학을 다녔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윤치호는 중서학원 교수가 되었다. 그의 부인은 1882년의 임오군란 당시 청 나라 군함을 이끌고 한국에 왔던 마건충의 조카딸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개화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부인과 함께 귀국했던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조선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 때문에 부산 앞 바다의 절영도와 진해만을 해군기지로 조차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해 러시아의 야욕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리고는 만민공동회와 같은 군중집회를 열어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고 개혁 압력을 넣었다.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의가 열렸을 때 이승만은 가두연설로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는 총대의원으로 뽑혀 정부에 대한 투쟁에 앞장섬으로써 급진파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1898년 11월 5일 마침내 고종은 독립협회 탄압에 나섰다. 우선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했다.
       그리고는 이른바 ‘익명서 사건’을 조작해 이상재, 남궁억, 양홍묵을 비롯해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했다.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共和制)를 도입하려 역적모의를 했다는 혐의였다.
       회장인 윤치호는 몸을 피해 배재학당 구내의 아펜셀러 집에 숨었다. 이승만도 일단 그곳으로 몸을 피했다.
      

  • ▲ 만민공동회 종로 집회(위)와 덕수궁앞 집회 모습(1898년). 이승만은 만민공동회 운동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담했다. 만민공동회는 국가의 자주와 민권을 외친 최초의 근대적 민중운동으로, 백성들이 정부를 도와 관민이 한마음으로 국권을 보호하자는 운동. 이승만은 날마다 집회를 개최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연설을 통해 '청년 혁명가'로 부상했다. 태극기 깃발이 인상적이다.
    ▲ 만민공동회 종로 집회(위)와 덕수궁앞 집회 모습(1898년). 이승만은 만민공동회 운동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담했다. 만민공동회는 국가의 자주와 민권을 외친 최초의 근대적 민중운동으로, 백성들이 정부를 도와 관민이 한마음으로 국권을 보호하자는 운동. 이승만은 날마다 집회를 개최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연설을 통해 '청년 혁명가'로 부상했다. 태극기 깃발이 인상적이다.


  • ▲ 만민공동회 종로 집회(위)와 덕수궁앞 집회 모습(1898년). 이승만은 만민공동회 운동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담했다. 만민공동회는 국가의 자주와 민권을 외친 최초의 근대적 민중운동으로, 백성들이 정부를 도와 관민이 한마음으로 국권을 보호하자는 운동. 이승만은 날마다 집회를 개최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연설을 통해 '청년 혁명가'로 부상했다. 태극기 깃발이 인상적이다.


    만민공동회에서 반정부 시위를 주도
     
       하지만, 이승만은 곧 밖으로 나와 수천 명의 군중을 이끌고 경무청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체포된 독립협회 회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연좌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을 새웠고, 이승만은 쉴 새 없이 연설했다.
       이승만의 과격 행동으로 집안이 망하게 될 것을 걱정한 그의 아버지는 시위 현장까지 찾아와 그만둘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아펜셀러 박사도 찾아와 이승만을 말렸다.
       그때 고종이 태도를 바꾸어 개화파에 대한 유화책을 썼다. 체포된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하는 동시에, 개화파 성향의 민영환(閔泳煥)을 의정부 참정으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같은 독립협회 과격파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며 종각과 대한문 앞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자 고종은 다시 강경책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하여 1898년 11월 21일 정부는 ‘황국협회’의 보부상 패거리를 시켜 덕수궁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던 독립협회 회원들을 공격하게 했다.
       보부상들의 공격으로 시위군중은 산산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그들을 향해 자리를 지키라고 외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자신도 몸을 피해야 할 형편이었다.
       이승만은 적들의 허점을 찌르기 위해 뒤로 도망가는 대신, 대담하게 보부상 무리 가운데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배재학당 쪽으로 태연하게 걸었다. 모두가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나타나자, 그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던 학우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학생들은 다시 이승만을 앞세우고 종로로 나갔다. 이승만은 단상에 올라 밤새도록 연설했다. 독립협회 회원 김덕구가 용산에서 피살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시위대는 더욱 더 흥분했다.  다음날 거행된 그의 장례행렬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가 체포되다

      1898년 11월 26일 고종은 개화파를 달래기 위해 왕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을 의회(議會) 비슷하게 운영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는 독립협회 회원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중추원 의관 50명 가운데 25명에 대한 추천권을 독립협회에 맡겼다.
       그에 따라 독립협회 회장인 윤치호가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23세의 젊은 이승만도 종9품을 받은 의관이 되었다. 개화파들은 그 기구를 통해 정부를 어느 정도 개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자 일본 공사관은 이들 개화파 민선 의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공작했다. 그래서 일본에 망명했던 친일파 청년들을 이승만에게 접근시켰다.
       이승만도 일본의 문명개화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친일적인 유신당의 청년들을 몇 차례 만났다.
       그들 친일파 청년들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왕국이 러시아와 중국의 위협을 물리치고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일본은 러시아는 물론 미국과도 전쟁을 해서 거대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원대한 침략 야욕을 알게 된 이승만은 더 이상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마침내 기다리던 중추원이 열렸다. 회의가 시작되자 마자, 이승만은 국정 개혁의 방법으로 일본에 망명한 개화파들을 사면하고 그들의 지도자인 박영효(朴泳孝)를 중추원 의장에 임명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했다.
       고종은 격분했다. 그에게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는 역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종은 이승만이 박영효 일파의 사면과 등용을 주장하는 배경에는 박영효를 중심으로하는 역적모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즉, 자신을 쫓아내고  황태자를 황제로 앉히든가, 아니면 군주제를 공화제로 바꾸려는 음모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므로 고종은 898년 12월 23일에 중추원을 해산하는 동시에, 독립협회 측 의관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독립협회 측 의관들은 모두 흩어져 몸을 숨겼다. 이승만도 남대문 근처의 미국 감리교 병원으로 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