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 당시 예금주의 상황·변경 사유 등에 따라 결론 달라
  • ▲ 예금주의 요청이나 동의 없이 비밀번호를 변경하거나 예금을 인출한 행위는 대개 불법입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 따라 결론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 연합뉴스
    ▲ 예금주의 요청이나 동의 없이 비밀번호를 변경하거나 예금을 인출한 행위는 대개 불법입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 따라 결론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 연합뉴스
    [Q] 저는 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 입원한 바 있습니다. 다행히 한 달 만에 의식이 돌아와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는데요.

    최근 은행을 찾았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계좌 비밀번호가 변경됐고, 제 통장에 있는 돈도 인출된 것입니다. 은행에 자초지종을 따져 물었더니, 제가 누워있는 동안 제 누이가 제 통장의 비밀번호를 변경했답니다.

    예금주의 요청이나 동의도 없이, 그것도 누이가 요청했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비밀번호를 바꾼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의하니 "귀하가 뇌사 상태였고, 이혼한 상태라 보호자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귀하의 병원비와 미성년 자녀를 부양하기 위한 생활비에 필요하다며 노모의 위임에 따라 예금 인출을 요청하므로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합니다. 

    금융실명제가 정착된 지 20년 가까이 지났고, 개인정보 보호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이 때, 은행의 이 같은 행위가 용납되는지요? 비밀번호를 임의로 변경하고, 타인에게 돈을 지급하며, 제 이혼 여부까지 알아낸 은행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손해배상을 받아내고자 합니다.

    [A] 은행 직원이 예금주가 아닌 제3자의 신청만으로 비밀번호를 임의로 변경하고, 예금까지 인출해준 행위가 불법행위로 인정된다면, 은행은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책임(민법 제750조)을 질 것입니다.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예금주와 타인(여기서는 누이) 간의 관계, 비밀번호 변경 당시 예금주가 처한 상황, 비밀번호를 변경하게 된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예금주에게 실제로 손해가 발생했는지 등을 따져야 한다는 것이 금융감독원의 입장(2006. 2. 14, 조정번호 제2006-2호)인데요.

    이 사건의 경우 △당시 귀하는 뇌사상태로 의식불명이어서 사회통념상 일정범위 내에서 대리관계를 인정할 필요성이 있는 점 △귀하의 누이가 적법하게 대리권을 부여받진 않았으나, 부모가 연로하고 자녀가 미성년인 점 △배우자가 부재상태라 사실상 보호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 △비밀번호 변경 및 인출에 있어 모친의 위임이 있었던 점 △은행이 호적등본을 확인함은 물론, 귀하가 입원 중인 병원에 문의해 귀하가 뇌사상태인 점까지 확인하는 등 업무처리에 있어 고객보호의무를 위배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 등이 인정되므로 불법행위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이 금융감독원의 판단입니다.

    설령 불법행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실제 손해 발생 여부를 따져봐야 하는데요, 인출한 예금이 귀하의 병원비 및 간병인비, 귀하의 부모님과 미성년 자녀를 위한 생활비 등으로 사용된 경우엔 손해 발생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본인의 요청이나 동의 없이 비밀번호가 변경되고 예금이 인출된 것은 대개의 경우엔 명백한 금융사고로, 해당 은행은 그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상황과 경위에 따라 결론은 다르게 날 수 있습니다. 모든 원칙엔 항상 예외가 있기 마련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