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사정' 없는 한, 은행의 '본인확인의무' 소홀 인정돼
  • ▲ 주민등록증 위변조 여부를 확인했다는 이유 만으로는 은행의 본인확인의무 책임을 다했다고 인정되지 않습니다. 주민등록증을 소지한 사람이 진짜 본인 맞는지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연합뉴스
    ▲ 주민등록증 위변조 여부를 확인했다는 이유 만으로는 은행의 본인확인의무 책임을 다했다고 인정되지 않습니다. 주민등록증을 소지한 사람이 진짜 본인 맞는지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연합뉴스


    [Q] 8년 동안 해외에 체류하다가 귀국했는데, 황당한 일을 당했습니다. 외국으로 떠나기 전, 모 은행 통장에 분명히 돈을 입금시켜놓았는데, 귀국해보니 잔액이 텅텅 비어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올케가 제 신분증을 은행에 가져가, 저인 척 하며 제 통장의 돈을 모두 인출해 간 것이었습니다. 통장과 인감을 제가 갖고 있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알아보니, 제 신분증을 이용해 통장 및 인감을 분실신고한 후, 임의로 만든 가짜 도장을 이용해 거래를 했다는 겁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저는 올케를 경찰에 고소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자는 올케 뿐이 아닙니다. 본인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타인에게 선뜻 제 돈을 내 준 은행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은행에 찾아가 이 같은 사실을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은행에서 돌아오는 답변이 너무나도 황당합니다. “신분증 상의 사진과 올케의 모습이 똑같았기 때문에 속을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증 음성확인시스템(☎1382)을 통해 주민등록증 진위여부까지 확인했다. 무엇을 어떻게 더 했어야 한다는 말이냐”며 오히려 제게 큰소리를 칩니다. 그러면서 “주민등록증 관리를 소홀히 한 당신 책임 아니냐”고 합니다.

      올케와 저의 헤어스타일이 비슷하긴 합니다. 하지만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본인 확인을 소홀히 한 것은, 은행 측의 직무유기 아닙니까? 주민등록증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은행 측의 주장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안방 서랍 속에 보관했는데, 올케가 저희 집 안방까지 들어와서 제 주민등록증을 가져갔을 거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경우, 은행은 정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인가요? 저는 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제 돈을 돌려받고 싶습니다. 


    [A] 많이 당황하셨겠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돈이 인출된 상황에서, 은행이 자신들의 본인 확인 의무 소홀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군요.

      이번 사건의 쟁점은 ‘예금인출이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민법 제470조)로서 유효하다고 할 수 있느냐’의 여부일 것입니다.

      법률 용어라서 어려우시다고요?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제가 가까운 치킨집에서 양념통닭을 배달시켰더니, 헬멧을 쓴 남자가 통닭을 들고 왔어요. 당연히 그 치킨집의 종업원으로 생각한 저는 그 남자에게 통닭 값을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후, 치킨집 사장이 느닷없이 찾아와선 통닭 값을 달랍니다. 그 남자는 배달 중인 오토바이를 훔친 도둑이기 때문에 그에게 돈 준 것은 무효라고 주장하면서요. 이 경우, 제가 음식 값을 두 번 내지 않아도 되기 위해 법이 마련한 논리가 바로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라는 겁니다. 채권(통닭 값)을 받아야 할 정당한 채권자(통닭집 사장 또는 종업원)는 아니지만, 채권자에 준해서 취급하겠다는 것이지요.

      이 논리가 통하기 위해서는 변제자(이 사례에서는 은행)가 이 사실을 몰랐으며, 과실이 없어야 합니다. 은행이 올케에게 예금을 인출해준 상황에서 은행의 과실 여부가 쟁점이 되겠지요.

      금융감독원 금융분쟁조정위원회는 이런 경우에 대해 “은행의 과실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즉, “은행이 준점유자(이 사건에선 올케)에게 예금을 인출해줬다는 이유로, 실제 예금주(귀하)에게 배상하지 않겠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은행이 ‘1382’ 전화를 통해 주민등록증 위·변조 확인을 거쳤다고 했지요. 하지만 해당 서비스는 주민등록증의 진위 여부(주민등록번호와 발급일자의 일치 여부)를 확인해줄 뿐, 제시된 주민등록증이 타인에 의해 도용되고 있는지까지 확인해주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만으로 본인확인 의무를 다했다고 보긴 어렵다는 게 위원회의 판단입니다.

      은행 측은 “비슷한 외모 때문에 본인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항변하지만, 이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대법원은 “만일 실제로 거래행위를 한 상대방이 주민등록상의 본인과 다른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진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은행에게 본인확인의무를 다하지 못한 과실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대판 1998.11.10., 98다20059)는 판례를 남긴 바 있습니다. 그런데 “닮았으니까 몰랐다”는 것 만으로는 ‘특별한 사정’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은행 측의 주의의무 소홀이 인정되는 논리는 또 하나 있습니다. 귀하는 8년 동안 해외에 체류하면서, 텔레뱅킹 및 인터넷뱅킹을 통한 거래만 해오셨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서 모든 계좌에 대한 통장 및 인감에 대해 분실신고를 했단 말이죠. 이 경우 은행은 더욱 주의를 기울여 본인 확인을 했어야 합니다. 아무 의심 없이 받아준 것은 분명한 은행의 책임입니다.

      결국, 은행은 본인 확인 의무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귀하에게 모든 예금을 원상복구 해줘야 한다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됩니다. 법적 절차를 이용해 충분히 권리를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바, 적극 대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