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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이병철은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해 목욕을 했다. 정신이 맑아지면 그날 할 일들을 메모하곤 했다.
“목욕을 하다보면 대개 15~16가지가 생각납니다. 그리고는 어제 메모했던 내용들을 가져와 대조해 보충합니다.” (1984년 언론 대담)
호암은 매일 장충동 자택에서 출발, 오전 9시 태평로 삼성 본관 28층 집무실에 도착하면 원두커피를 마시면서 당일 스케줄을 점검했다. 호암의 메모에 ‘김사장 15분’이라고 써있으면 비서실은 15분 가량 면담하는 일정을 짠다. 그 이상은 낭비라고 보았다.
퇴근 무렵이 되면 메모 내용 중 실천하지 못한 부분을 다시 수첩에 옮겨 집에 가져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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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정주영은 국내-외 정세, 시장상황을 고려해 짧은 시간 안에 신사업 진출을 결정하곤 했다. 일단 사업을 시작하면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각 계열사의 현장을 끊임없이 순회하면서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점검했다.
현장에서 애로사항이 발생하면 즉석에서 묘안을 내 해결해나갔다. 아산은 어떤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해낼 수 있다’는 배짱으로 상황을 정면에서 헤쳐나가려 노력했다.
호암은 ‘치밀 경영’, 아산은 ‘직관 경영’스타일이었다. 그들은 경영 스타일은 달랐지만, 일단 새 사업의 방향이 서면 주춤거리지 않고 죽기살기로 뛰어들어 성공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치밀한 메모광이 돼라
호암은 어떤 사업이든지 떠오른 구상이나 전문가들의 조언, 해야 할 일 등을 꼼꼼히 메모로 정리했다. 큰 틀을 그리고 작은 일들은 메모를 통해 하나씩 체크해나가는 방식이었다.
월말이나 연말에는 미결 사항을 다시 정리해 책상 위 유리판에 끼워 놓았다. 일을 시작하면 반드시 끝장을 보았고, 지시해놓고 그냥 넘어간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
경영자는 큰 그림만 그리기 쉽다. 수백억원을 투입해 무슨 공장을 만들고, 이 공장에서 연간 수천억원의 매출을 내면 기업도 성장하고, 국가에도 도움이 된다는 등의 큰 그림은 물론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 그림들을 이뤄나가기 위해서는 매우 치밀하고 세심하게 확인해나가야 한다는게 호암의 생각이었다. 큰 그림을 그리고 세부 사항을 치밀하게 점검하는 등 ‘숲과 나무를 동시에 봐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신사업에 진출할 경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사업을 벌일 때 점검하는 포인트들은 ‘90 항목 사업성 검토서’를 매뉴얼로 정착시켰다.
신규사업을 검토할 때는 삼성의 경영 이념과 합치하는지, 기업의 목적과 부합하는지, 기존의 제품보다 품질향상 성과가 있는지, 제품이 생산된 후 가격 인하 효과가 있을 수 있는지 등을 점검토록 했다. 또 자금 조달문제, 기존 사업들과의 시너지 효과 문제 등을 집중점검해 객관화시키도록 했다.
이같은 문제에 대한 조사 분석이 끝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최종 점검토록 매뉴얼화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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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은 일본을 자주 방문했다. 두 달에 한번씩 도쿄로 날아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났다. NHK의 신년 좌담회 등은 비디오 테이프로 복사해 챙겨보곤 했다. 전문가들을 만나고 방송을 비롯한 각종 자료를 검토해 앞으로 유망하다고 생각되는 영역이 떠오르면 본격적인 신사업 진출 검토 작업에 착수하곤 했다.
오늘날 한국경제의 거대한 축이 되고 있는 삼성의 전자사업, 반도체사업은 호암의 치밀한 미래 구상을 통해 시작된 것이다.
호암은 1960년대 초반에 삼성전자 설립을 결정하고, 삼성물산 도쿄지점에 근무하던 시마다를 통해 가전제품 생산공장에 필요한 조사와 기술 제휴 통로를 알아보도록 했다.
삼성전자 설립 문제는 그러나 한국비료 사건으로 인해 사업계획이 전면 중단됐다가, 1968년 본격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NEC(일본전기)와 산요전기와 합작을 통해 전자사업 진출을 추진하던 삼성에게 신규 사업의 문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힘겹게 열렸다.
호암은 합작문제, 공장설립문제, 국내 기존 미국계 전자회사들의 반발을 치밀한 시스템경영을 통해 극복해냈다.
▶모르고 넘어가는 걸 부끄러워하라
197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뛰어든 반도체사업 진출 과정은 더욱 더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우선 일본 관련업계 인사들이 ‘호랑이를 키우는 격’으로 생각해 부정적이었다.
그는 특정 분야에 진출할 때 CEO로서 1부터 100까지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상당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도체에 진출키로 하면서 호암은 스스로 어려운 반도체 분야에 대해 ‘죽기살기’ 식으로 공부하고 연구하려 했다.
그러나 책도 없었고, 바닥부터 그의 지식을 채워줄 전문가들도 찾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도쿄에서 최준명 팀장(훗날 삼성전자재팬 대표이사 역임)을 불러다놓고는 ‘RAM이 뭐꼬? ROM이 뭐꼬?’ 하면서 궁금한 내용들을 쏟아내 알아오게 했다.
호암은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게 아니라, 모르면서 그냥 넘어가는게 부끄러운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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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최강의 반도체 국가로 우뚝 서게 된 밑바탕에는 CEO 자신부터 철저하게 바닥부터 공부하려 애쓴 호암의 정신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호암은 자신이 치밀하게 일하는 동시에 임직원들에게도 각자의 직책과 역량에 맞춰 일을 잘 나눠줘 최선을 다해 일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의 ‘그릇론’도 오늘날까지 많은 경영인들의 지침이 되고 있다. 호암은 상무나 전무의 그릇이 따로 있고, 사장 그릇이 따로 있다는 말을 자주했다. 경영자는 부단히 노력해 그릇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노력하지 않는 경영자나 게으른 임원은 싫어했다. 머리만 좋고 게으르다는 평가를 받는 임원을 CEO로 승진시킨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기적을 낳는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산 정주영을 청와대로 불렀다.
“조선소 사업 알아보라고 했는데 어떻게 돼갑니까?” (박대통령)
“예...일본, 미국, 유럽 각지를 알아보고 다녔는데 도저히 돈도 빌릴 수 없고, 어려울 듯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실력에 조선소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정주영)
정주영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위로의 말을 들을 줄 알았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상기된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시오!”
대통령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은 정주영은 훗날 “조선소는 무조건,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엄숙한 사명감을 갖게 됐다”고 술회했다.
그는 다시 유럽으로 뛰어갔다. 영국을 방문해 선박 건조에 관한 기술 제휴를 얻어낸 뒤 대출을 위해 은행장들을 찾아다녔다. 영국의 은행장들은 선박 수주 계약서부터 요구했다.
정주영은 우여곡절 끝에 500원 짜리 지폐로 톰바톰 회장을 움직여 영국 은행 차관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배를 주문할 선주를 찾아야 했다. 정주영 회장이 가진 무기는 영국에서 빌린 26만톤급 선박의 설계도, 조선소 건립 예정지인 썰렁한 바닷가를 찍은 흑백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정주영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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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개월의 거듭된 실패 끝에 정주영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리바노스는 혈기왕성한 40대의 그리스 선박왕이었다. 그는 그리스에서 100년 동안 해운업을 해온 선박왕의 상속자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던 참이었다.
리바노스는 업계에서 꼼꼼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으나 황당해 보이는 정주영 회장의 프로젝트에 끌렸다.
정주영의 배짱을 믿은 리바노스는 26만톤 급 배를 2척이나 주문했다. 계약금으로 14억원이라는 거금을 내놓았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560억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배 가격은 1척당 3095만 달러(현재 가치로 1조2000억원). 리바노스도 엄청난 도박을 했던 것이다.
대형 유조선을 수주한 정주영 회장은 작업장에서 거의 매일 살다시피 했다. 작은 효율들이 모여서 공사 기간의 단축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현장에서 워커도 벗지 못한 채 직원들과 잠을 자고, 물 웅덩이에 얼굴을 대충 씻고 하루를 시작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현대중공업은 세계 최초로 도크 건설과 대형 유조선 2척을 건조해낸 기록을 쓰게 됐다.정주영은 말한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자가 성공한 사례는 없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안 보이던 해결책이 보이고, 불가능하다고 마음을 닫으면 있는 해결책도 숨어버리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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