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권가는 물론 재계의 관심이 쏠렸던 연말 인사시즌도 끝나간다. 이사 또는 상무, 전무로 승진하는 사람들의 발표가 났고 이어지는 부장, 차장 등 직원 승진 명단이 회사마다 쏟아진다.

    먹고사는 일 자체가 힘든 요즘, 피터지는 경쟁과 압박에도 회사를 다니는 것 자체를 다행으로 여기고 가족들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에게 승진은 입신이나 다름없다.


    특히 기업에서 '별'을 달게 되면 제공되는 혜택들에 대한 기사들을 매년 읽어보면 '입신'이라는 표현을 쓰기에 무리가 없다. 물론 그들이 '별'을 달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려왔는지를 되짚어 보면 당연한 댓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승진이 있으면 해임과 퇴임이, 올라간 사람이 있으면 비켜줘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당연한 이치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물러나는 사람들이 열정과 역량이 소진됐기 때문에 폐기처분 되듯 떠나는 것은 결코 아니며 그렇게 보내서도 안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들의 경험과 연륜을 더 오래 쓰지 못하는 현실을 책임자들은 반성해야 한다.


    대략 20년전 이때의 일이었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 승진인사가 발표됐던 날 아버지는 이사가 되셨다. 그 소식은 아버지보다 먼저 직장 동료분들이 먼저 전해주셨다. 집전화가 끊임없이 울렸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집 전화기에서 불이 났다는 표현을 쓰기가 딱 알맞았다. 연신 전화를 받고 감사하다며 행복해하시던 어머니 모습도 생생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회사의 '별'을 그리 오래 지키지 못했다. 몇년 후 아버지가 회사를 나오셨다는 소식을 몇주 지나서야 알게 됐을 정도로, 아버지는 아주 조용히 회사에서 나오셨던 것이다.


    그당시 사무용품들이 담긴 채 집한켠에 놓여있던 종이박스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됐다. 젊음을 바쳤던 회사에서 조용히 짐을 싸셨을 그때의 아버지를 상상해본다.


    요즘처럼 기업들이 몸집을 줄이는 시기에는 100명의 승진인사가 나면 적어도 150명, 200명 이상은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다.


    '누가 이번에 나간다 더라', '누가 사장실에 불려갔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꺼내고 듣는 일이 어렵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수년째 승진이 누락된 직원들과 1년 계약직 신분이나 마찬가지인 임원들의 마음에는 매년 겨울마다 칼바람이 분다고 한다.


    물론 더 패기있고, 능력있는 사람들이 새롭게 올라와 회사를 이끌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다만 청춘을 회사에 바치다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예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가혹하다. 퇴직금 또는 몇년치 기본급정도를 손에 쥐어주고 내보냈다고 해서 그들이 위로받는 것은 아니다.


    명예롭게 떠나면서도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기업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남은 50년을 위해 퇴직금을 밑천으로 무작정 치킨집을 차리도록 내버려둬선 안된다. 나이많고 몸값 높은 사람들은 무조건 자르고, 청년 취업기회 제공이라는 명분하에 열정페이를 앞세워 인턴들로 자리를 채우며 인건비를 줄이려는 회사들도 인식도 바꿔야 한다.


    올라간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리고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전해드리고 싶다.


    올해 본격 인사시즌을 앞두고 "지난 50년 가족들을 위해 살았으니 앞으로 50년은 나를 위해 살아봐도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담담하게 말하던 그 분을 내년에도 뵐 수 있다는 점은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