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디스플레이 등 핵심소재 대체재 확보가 관건일본산 소재 수입 어려움은 물론 대일본 수출 차질 우려도
  • 한·일 양국 정부가 서로를 수출 심사 절차에서 우대하는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제외하기로 한 가운데 일본산 소재 의존도가 높은 국내 기업들이 대체재 발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4일 산업계에 따르면 삼성, 현대차, SK, LG, 롯데 등 5대 그룹을 비롯한 국내 주요 기업들은 일본과의 '경제전쟁'에 따른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하며 충격 최소화에 나섰다. 

    일본은 지난 7월 4일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 공정에 필요한 3개 핵심 소재 수출 간소화 우대 조치를 철회하고 이달 2일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배제했다. 그간 한국을 수출 심사 절차에서 우대해왔지만 이를 배제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한국 정부도 이날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배제하겠다고 밝히면서 양국 간 경제협력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일본의 경제 보복은 한국의 주력 산업이자 미래 먹거리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2차전지 등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한국은 전자, 석유화학, 배터리 등 수출 주력 업종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된다. 
  •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 공정의 필수 소재로 꼽히는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품목은 일본 의존도가 특히 높은 품목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일본 수입의존도는 올 1~5월 수입액 기준 각각 91.9%, 43.9%, 93.7%에 달한다.

    이 품목은 일본의 기술 수준이 월등히 높아 대체재를 찾기 쉽지 않다. 이에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소재 확보에 나서고 투자계획을 조정하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전에 일본으로 직접 날아가 현지 기업인들을 만나 소재확보에 나선 바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콘퍼런스콜에서 "어떤 경우에든 생산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경영진과 관련 부서가 다양한 대책을 수립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며 "일본의 조치는 소재에 대한 수출금지는 아니지만 새로운 허가 절차에 따른 부담과 여러 진행 방향에 대한 불확실성이 있어 가늠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SK하이닉스도 대체선 확보에 공을 들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최근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가능한 범위에서 관련 소재 재고를 적극적으로 확보하면서도 공급처를 다변화하고 공정 투입량을 최소화하도록 조정하며 생산 차질이 없도록 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뿐만 아니라 목재, 식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업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가 예상되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1위 품목은 '반도체 제조용 장비'로 수입액이 61억9100만 달러에 달했다. 이는 지난해 전체 일본산 수입액의 11.3%에 해당한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지만, 이 반도체를 생산하는 설비는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성전자는 오는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에서도 글로벌 1위를 달성하기 위해 133조원의 대규모 투자를 계획하고 있는 만큼 일본 반도체 제조용 장비 기업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주주환원 방안 발표도 내년으로 연기하기로 했고 SK하이닉스는 D램(Dynamic Random Access Memory) 캐파(CAPA·생산 능력)를 줄이겠다는 감산 계획을 밝혔다.
  •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삼성SDI 등 배터리 업계에서는 국내 기업 간 협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차량용 배터리로 사용되는 2차 전지 핵심 소재인 분리막의 일본 제품 수입에 제약이 가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전기차 리튬이온 배터리는 양극재, 음극재, 전해액, 분리막 등의 소재가 핵심을 이루는데 분리막은 도레이, 아사히카세이 등 일본 기업의 점유율이 높다. 한국 기업 중에서는 SK이노베이션이 일본 기업들과 경쟁하고 있다.

    LG화학과 삼성SDI는 주로 일본 기업들로부터 분리막을 수입해왔지만 이번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수입에 차질을 빚을 경우 SK이노베이션과의 거래를 고려할 수 있다. 

    SK이노베이션 측은 경쟁사라고 하더라도 분리막을 공급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만큼 대체선이 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기술유출 갈등으로 국내외에서 소송전을 벌이고 있는 만큼 두 회사 간 거래 성사 여부는 미지수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에 따라 수입 차질이 우려되는 159개 관리품목을 지정하고 보세구역 내 저장기간 연장, 수입신고지연에 대한 가산세 면제 등의 조처를 취하기로 했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1~5월 기준 한국의 대일본 수출품목 상위 품목은 석유제품(18억2600만 달러), 철강판(9억5100만 달러), 정밀화학원료(9억5100만 달러), 반도체(4억1000만 달러), 자동차부품(3억5600만 달러), 플라스틱 제품(3억3600만 달러), 합성수지(3억2900만 달러), 금은 및 백금(3억1800만 달러), 기호식품(2억6800만 달러), 주단조품(2억3200만 달러) 등의 순이다.

    한국 정부가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맞대응에 나서면서 한국 기업들의 수출이 타격을 받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본산 소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기업들이 제품 생산에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대일본 수출도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력과 자본 등이 부족한 중소·중견 기업의 경우 까다로워진 대일본 수출 절차에 적응하기까지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관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