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4700조 제시, 정부는 인프라 책임 약속전력6.3GW·용수65만톤, 서남권 팹4기 첫 관문특별법 확대·재정 지원·공급 일정은 여전히 숙제
  • ▲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기업 투자계획 발표 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인사하고 있다. 왼쪽은 최태원 SK그룹 회장. ⓒ연합뉴스
    ▲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기업 투자계획 발표 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인사하고 있다. 왼쪽은 최태원 SK그룹 회장. ⓒ연합뉴스
    삼성전자와 SK그룹이 4700조원대 중장기 투자 청사진을 내놨다. 그러나 이번 국민보고회의 핵심은 투자 규모가 아니었다. 

    두 그룹은 반도체와 AI(인공지능) 인프라 투자의 전제조건으로 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를 공개적으로 제시했다. 기업은 투자 의지를 내고, 정부는 인허가·전력·용수·정주여건을 책임지겠다고 답한 자리였다. 반면 SK하이닉스가 요청한 용인·청주 반도체특별법 적용 확대는 추가 검토 과제로 남겼다.

    정부와 재계는 지난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반도체, 피지컬AI, AI 데이터센터를 국가 성장축으로 제시했다. 삼성은 국내에 총 2655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고, SK는 AI 데이터센터 약 1000조원, 반도체 공급 확장 약 1100조원 등 총 2100조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두 그룹의 투자 구상을 단순 합산하면 4700조원대에 이른다. 

    그러나 투자 규모만으로 이번 발표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반도체 팹과 AI 데이터센터는 돈만으로 지어지지 않는다. 부지, 전력, 용수, 인허가, 송전망, 협력사 이전, 핵심 인력 정착 조건이 동시에 맞아야 한다. 실제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광주를 “후보지로 계획하고 있다”고 표현했고,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서남권 투자와 관련해 “제반 요건을 충족하는 곳”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대규모 투자는 확정된 착공표가 아니라 정부 실행력을 조건으로 한 장기 청사진에 가깝다는 의미다.

    ◇원스톱 행정부터 전력·용수까지 … 기업이 꺼낸 ‘국가책임론’

    삼성과 SK가 정부에 던진 첫 번째 과제는 속도다.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장 겸 부회장은 투자 속도를 높이기 위한 원스톱 행정 지원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용인 국가산단을 비롯한 대규모 반도체 투자는 여러 부처와 지자체 인허가가 맞물리는 만큼, 전담 조직이 일괄 조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두 번째 과제는 전력과 용수다. 전 부회장은 전력과 용수를 AI 시대의 핵심 산업 인프라로 규정하고, 국가가 산업단지까지 안정적으로 공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단순한 송전망·관로 설치 지원을 넘어 글로벌 경쟁이 가능한 가격 경쟁력까지 확보해야 한다는 요구다. 전기료와 용수 비용은 반도체 생산원가와 직결되는 만큼, 기업 부담만으로는 국가 간 투자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정부가 제시한 서남권 반도체 생산거점의 인프라 수요도 만만치 않다. 서남권 팹4기에는 전력6.3GW와 용수65만톤/일이 필요한 것으로 제시됐다. 전력6.3GW는 1.4GW급 신규 원전 4~5기 설비용량에 해당한다. 정부는 원전, 재생에너지, LNG, ESS 등을 조합하고 다목적댐, 발전용수, 하수 재이용수 등을 활용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실제 공급까지는 송전망 인허가, 주민 수용성, 가뭄 대응, 지역 간 용수 배분이라는 난제가 남는다.

    세 번째 과제는 정주여건이다. 반도체 공장은 설비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연구개발 인력, 엔지니어, 협력업체 직원이 가족과 함께 지역에 머물 수 있어야 한다. SK하이닉스도 지방 거점의 최대 변수로 교육 문제를 짚었다. 초·중·고 교육환경이 부족하면 직원은 지방에서 일하고 가족은 수도권에 남는 주말부부 구조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SK가 별도로 제기한 네 번째 과제는 반도체특별법 적용 확대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용인 일반산단과 청주 투자 거점도 특별법 지원 대상에 포함해 달라고 건의했다. 용인은 SK하이닉스의 핵심 클러스터이고 청주는 낸드와 HBM(고대역폭메모리) 후공정 역량 강화를 위한 주요 거점이다. SK는 용인과 청주가 같은 반도체 생산벨트 안에 있는 만큼 기반시설 국비 지원과 인허가 특례가 함께 적용돼야 협력사까지 투자 효과가 확산될 수 있다고 본다.

    ◇대통령은 3개 책임 약속, 특별법 확대는 검토로 남겨

    이재명 대통령의 답변은 항목별로 온도 차가 있었다. 삼성과 SK가 공통으로 요구한 원스톱 행정, 전력·용수, 정주여건에 대해서는 대체로 “국가 책임”을 약속했다.

    원스톱 행정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직접 챙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청와대에 이 사업만 전담하는 팀을 별도로 두고 임기 동안 관리하겠다는 취지다. 반도체 투자 속도를 부처 행정의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실 관리 과제로 끌어올린 셈이다.

    전력과 용수도 정부 책임 영역으로 규정했다. 반도체특별법상 지방 우선 지원 근거를 활용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함께 인프라를 조성하겠다는 입장이다. 전기요금과 관련해서는 지역에서 생산한 전력을 지역 산업단지가 쓰는 지산지소 원칙을 언급하며 해당 지역에 메리트가 생기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재생에너지, 기저전원, ESS를 함께 갖추고 지방 균형발전이라는 정책 목표도 반영하겠다는 설명이다.

    정주여건 역시 정부가 책임져야 할 과제로 못 박았다. 이 대통령은 근무자들이 지역에서 교육받고 가정을 이루며 수도권 못지않은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주거, 문화, 보건의료, 대학, 초·중·고 교육까지 가능한 방안을 동원하겠다는 취지다. 

    반면 SK가 요구한 용인·청주 지원 확대와 반도체특별법 적용 문제에는 즉답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용인 SK하이닉스 클러스터가 일반산단이라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지원에서 빠지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는 공감했다. 다만 재정 지원을 어느 정도 할지, 특별법 적용을 어디까지 넓힐지는 실무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행정 지원은 적극적으로 하되 재정 지원과 법 적용 확대는 추가 논의 과제로 남긴 것이다.

    이 대목은 향후 정책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정부는 지방 신규 거점에는 전폭 지원을 예고했지만, 기존 수도권·충청 거점에 대한 재정 지원 확대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지역 균형발전과 기존 반도체 클러스터 경쟁력 강화 사이에서 정책 우선순위를 어떻게 조정할지가 다음 쟁점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국민보고회에서 기업은 4700조원대 투자 의지를 제시했고, 정부는 전력·용수·인허가·정주여건을 책임지겠다고 답했다”며 “특별법 확대, 재정 지원, 전력·용수 공급 일정이 구체화되지 않으면 4700조원은 청사진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반도체 경쟁은 기업의 자본투입 경쟁을 넘어 국가의 실행력 경쟁으로 넘어갔다”며 “시장은 이제 투자액보다 정부가 약속한 기반을 얼마나 빨리 깔 수 있는지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