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800조' 정부 주도 투자에 "대통령이 주주 패싱" 냉담 명분은 '대만식 모델', 정작 대만식 주주친화는 나몰라라'영남 홀대론', '9000피' 밸류업 기조 역행하는 관치 우려
  • ▲ 최태원 SK회장, 이재명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연합뉴스
    ▲ 최태원 SK회장, 이재명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연합뉴스
    800조. 

    4대강 사업을 스무번 하고도 남는 돈이다.

    이 돈은 정부가 지난 29일 발표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를 통해 호남권에 반도체 공장 4개를 짓겠다고 공언하며 제시한 투자 규모다. 

    문제는 이 천문학적인 재원이 정부의 예산이 아니라 엄연한 상장법인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회삿돈'이라는 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국민보고회에서 "AI 전쟁은 총력전"이라며 "성장의 과실이 전국 모든 국민들에게 골고루 퍼져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야겠다"고 강조했다. 

    국가적 사명과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명분을 앞세웠으나 자본시장의 시선은 싸늘하다. 

    기업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 자본 지출(CAPEX)이 주주들과의 사전 소통이나 이사회의 손익 계산 등 투명한 절차 없이 정부 주도의 정치적 이벤트에서 전격 공개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증시를 옭아매는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소 중 하나인 '주주 패싱'이 대통령에 의해 직접 자행된 상징적인 장면이다.

    ◆ "만스피 코앞인데" … 셀프 억제하는 정부

    이재명 정부는 출범 이래 줄곧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주요 국정 과제로 외쳐왔다. 

    실제로 과감한 제도 개선과 주주환원 유도 정책에 힘입어 시장은 한때 코스피 '9000선'을 넘는 업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발표는 정부가 그간 추진해 온 자본시장 선진화 기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이 증권업계의 중론이다. 

    글로벌 투자 기관들이 한국 증시를 저평가하는 3대 핵심 요인은 ▲북한으로 인한 지정학적 리스크 ▲경쟁국 대비 현저히 낮은 주주환원 ▲재벌 구조와 정부 경영 간섭으로 인한 주주 지분 가치 훼손이다.

    정부가 직접 나서 대기업의 자금 물길을 특정 지역으로 돌리는 모습은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상장기업을 공공재처럼 다룬다'는 시그널을 줄 수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정치적 논리에 밀려 대규모 자금이 구체적인 로드맵 없이 묶이게 된다면 주주 가치 훼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 "호남 편애 … 삼성전자 '전라도 법인'인가" 

    시장에선 이번 대규모 투자 계획을 두고 단순한 지역 안배를 넘어선 자본주의 시장 원리 훼손이라는 격앙된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투자자들 사이에선 "정부 마음대로 상장기업의 투자를 결정할 거면 차라리 전라도에 법인을 하나 따로 만들어라"며 정부의 지나친 경영 간섭을 공산주의적 발상이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특히 지역별 역할 분담을 두고 "호남에는 대규모 팹(공장)을 몰아주면서, 영남에는 소부장(소재·부품·장비)만 주는 것은 노골적인 특정 지역 편애이자 차별"이라는 불만이 거세다. 

    아울러 "수백조 원의 투자가 집중돼 발생하는 엄청난 규모의 성과급 등 경제적 낙수효과를 호남 사람들만 누리게 하겠다는 뜻이냐"는 형평성 논란도 급부상하고 있다. 

    이로 인해 부산, 울산 등 동남권 지역을 중심으로 차기 선거에서 '영남 홀대론'이 전면 대두될 것이라는 우려까지 확산되는 모양새다.

    졸지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정치에 이용되는 것도 모자라 지역차별 기업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쓰게 생긴 상황이다. 

    ◆ 명분으로 내세운 '대만 모델' … 주주친화 정책 선행돼야

    정부는 이날 호남을 반도체 생산 거점으로 세우기 위한 명분으로 대만의 사례를 전면에 내세웠다. 

    대만의 반도체 거점인 신주에서 가오숭까지의 거리가 약 230km로, 한국의 용인에서 광주까지의 거리와 유사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즉 단일 거점의 한계를 극복하고 호남으로 생산 기지를 확장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한다는 명분이다.

    이에 증권업계에선 정부가 대만을 명분으로 내세웠다면, 공장의 물리적 거리를 거론하기 전에 자본시장을 대하는 대만의 주주환원 자세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고 지적한다. 

    국제금융센터 보고서에 따르면 대만 상장기업의 평균 배당성향은 50%를 상회하며, 이는 20%대 후반에 불과한 한국의 두 배에 달한다. 

    대만이 올해 MSCI 신흥국지수에서 중국을 제치고 비중 1위(25%)로 올라서며 독보적인 밸류에이션을 정당화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바로 이 견고한 주주 중심 경영과 기업 자율성 보장에 있다. 

    정부가 진정으로 대만을 벤치마킹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싶다면, 기업의 현금 흐름을 정치적 목적의 지역 투자로 강제 분산시키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영에 개입하는 관치 행태부터 멈춰야 할 것이다. 

    주주환원과 경영 자율성은 뒷전인 채 외형적 거리 맞추기에만 급급해 상장기업을 공공재처럼 다루는 접근 방식은 결국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한국 시장에 대한 불신만 키우는 자충수가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