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보다 소득 더 늘었다 … GDP·GDI 격차 9.4%p 최대반도체값 92.5% 급등, 교역조건 개선 이끈 AI 수요특정 산업으로 돈과 인력 몰려 다른 산업 약화 경고 "세수 여건 반도체 의존도 심화로 향후 재정 여력 크게 변화"李 정부 확장 재정에 우회 경고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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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데일리 자료 사진.
    한국 경제가 과도하게 반도체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오히려 다른 분야를 위축시키는, 이른바 '네덜란드병(Dutch disease)' 같은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는 중앙은행의 경고가 나왔다. '네덜란드병'은 1950년대 네덜란드가 천연가스를 발견한 이후 반짝 호황을 보였지만, 이후 퇴락의 길을 걸었던 것에서 유래하는데, 천연 자원의 호황으로 '횡재'를 거둔 나라가 자원에만 의존하다 다른 산업군의 수출 경쟁력 악화로 경쟁력을 잃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경제 전문가들이 말하는 '반도체 착시'와 이로 인한 경제 양극화의 부작용을 중앙은행이 다른 방식으로 경고한 셈이다. 

    한국은행이 19일 내놓은 '반도체 경기 호조의 실물경제 파급영향' 보고서를 보면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3.8% 늘어난 사이 실질 국내총소득(GDI)은 13.2% 증가하면서 수출 호황이 투자와 임금, 소비로 확산할 가능성도 커졌다. 반도체 가격 상승이 한국 경제의 성장 공식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반도체 호조와 교역조건 개선이 향후 내수 증가세를 뒷받침할 핵심 동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했다.

    교역조건은 수출품 한 단위로 살 수 있는 수입품의 양을 보여주는 지표다. 수출가격이 오르거나 수입가격이 떨어지면 같은 수출량으로 확보할 수 있는 구매력이 커진다. 생산 규모를 나타내는 GDP와 달리 GDI에는 이 같은 교역조건 변화가 반영된다.

    올해 1분기 두 지표의 격차는 9.4%포인트로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60년 이후 가장 컸다. 국내 생산량보다 경제 주체가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소득이 훨씬 빠르게 늘었다는 의미다. 반도체 수출 확대가 GDP를 끌어올린 데 이어 메모리 가격 급등이 수출 단가와 실질 구매력을 동시에 높인 결과다.

    이번 흐름은 국제유가 하락에 기대던 과거와도 다르다. 2000년대 이후 세 차례 교역조건 개선기는 주로 수입물가 하락에서 비롯됐지만, 최근에는 반도체 가격 상승이 수출물가를 밀어 올리고 있다. 올해 1분기 반도체 가격은 전년 동기 대비 92.5% 뛰었고, 수출물가 상승분의 73.4%를 반도체를 포함한 IT 부문이 차지했다.

    AI 확산에 따른 구조적 수요가 반도체 경기를 떠받치고 있다는 점도 차이다. 한은은 단기적인 재고 조정이나 공급 부족을 넘어 데이터센터와 AI 인프라 투자가 수요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만큼 양호한 교역조건이 상당 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소득 증가가 실물경제로 전달되는 경로도 과거보다 빨라질 전망이다. 유가 하락에 따른 구매력 개선은 일시적이라는 인식이 강해 소비 확대 효과가 제한됐지만, 수출가격 상승은 기업 이익을 직접 늘려 설비투자와 고용, 임금으로 이어질 여지가 크다.

    이종웅 한은 조사국 조사총괄팀 차장은 “이번엔 수출가격이 교역조건 개선을 주도하면서 기업 이익이 바로 늘어나는 상황”이라며 “글로벌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기업들이 투자를 바로 해야 하는 만큼 투자 효과도 과거보다 빠르게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 ▲ ⓒ한은
    ▲ ⓒ한은
    ◆ 반도체 호황 뒤에 숨은 '네덜란드병' 경고

    한은 보고서 발표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네덜란드병'이다. 유럽의 작은 국가였던 네덜란드는 1959년 북해에서 대규모 천연가스가 발견되면서 '대박'의 꿈에 젖었다. 그러나 천연가스 수출로 막대한 외화가 유입되자 통화 가치가 급격하게 상승했고 이는 수출 제품의 경쟁력을 추락시켰다. 이로 인해 글로벌 시장에서 네덜란드의 다른 제품들은 경쟁력을 잃었고, 제조업을 키워 내지 못한 채 쇠락했다. 

    반도체 호황 자체가 곧바로 네덜란드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특정 산업이 성장과 세수, 투자, 수출을 동시에 견인하는 구조가 고착되면 경제 전체가 하나의 산업 사이클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된다. 업황이 좋을 때는 경제 전반이 빠르게 성장하지만, 반대로 사이클이 꺾이면 투자와 고용, 재정 여력까지 함께 흔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산업 다변화와 성장 기반 확충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중앙은행의 문제의식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미 과거 노키아의 몰락과 함께 국가 전체가 흔들린 핀란드의 사례를 들어 초격차 기술과 함께 반도체를 대체할 신수종 주력산업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핀란드 외에도 최대 석유 산유국이었음에도 돈 뿌리기에 급급하다가 멸망한 베네수엘라와 20세기 초반 세계 5대 경제 대국에서 페론주의로 대표되는 포퓰리즘과 과도한 정책에 따른 초인플레이션으로 몰락한 아르헨티나 등에 대한 경고도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반면 노르웨이는 북해 유전을 통해 얻은 1.4조 달러 규모의 자금을 국부펀드로 전환, 전 세계 최대 규모로 키우면서 네덜란드병을 물리쳤다. 

    경제 전문가들은 특히 반도체 사이클이 바뀌어 이른바 '피크론의 함정'에 빠질 경우 한국 경제가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하고 있다. 

    한은은 실제로 특정 산업으로 돈과 인력이 과도하게 몰려 다른 핵심 산업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네덜란드병'의 발생 가능성과 함께, 재정도 반도체 사이클에 지나치게 취약해질 수 있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한은은 "세수 여건의 반도체 의존도 심화로 향후 재정 여력이 반도체 경기에 따라 크게 변화될 수 있다. 2021~2022년 IT 호조기에 발생했던 초과 세수가 이후 업황 조정 국면에서 세수 결손으로 빠르게 반전된 바 있다"고 밝혔다.

    이는 반도체 세수에 취해 내년 사상 최대의 예산을 준비하고, 추가경정예산을 또 거론하는 등 '확장 재정'을 거듭하고 있는 이재명 정부에 대한 경고나 다름없다. 

    한은은 반도체 호황의 성과가 일부 산업과 계층에 집중될 가능성도 함께 짚었다. 반도체 성과가 소재·부품·장비 기업과 다른 제조업으로 확산할 수 있도록 산업 생태계를 유기적으로 통합·고도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 늘어난 자금이 부동산 등 비생산적 부문으로 유입될 경우 금융불균형이 확대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제조업 생산 중 IT 제조업 생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과거 30% 미만에서 올 1분기 51%까지 뛰어 올랐다. 반면 전체 고용에서 IT 제조업 종사자의 비중은 2.6%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