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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1일자 오피니언면 '전문기자 칼럼'에 이 신문 박선이 여성전문기자가 쓴 <'한국=하멜의 표류국'이라면?>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올림픽은 즐겁다. 4년 내내 단 한 번도 이름을 못 들어보거나 관심을 보낼 일이 없는 세계 여러 나라가 난데없이 지루한 일상으로 뛰어든다. 극심한 상업화와 국가 패권주의 경쟁장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올림픽이 우리에게 주는 미덕 가운데는 세계의 다양한 인종, 국가에 대한 우호와 이해의 폭을 넓히도록 자극하는 것도 있다.
지난 주말의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은 개막 공연도 장관이었지만 3시간이나 이어진 선수단 입장식도 흥미로웠다. 참가국은 무려 204개국. 텔레비전의 힘이 유감없이 과시됐다. 선수단이 입장할 때마다 화려한 그래픽과 해설 자막이 떴다. 이름도 처음인 나라가 많았으니, 방송사가 준비한 자료는 거의 절대적 정보였다. 문제는 자막의 수준이었다.
“구글 창업자가 최근 결혼식을 올린 곳”
“돈이 모인다, 부의 깔때기”
“예수가 첫 번째 이적을 행한 나라”
“아프리카의 죽은 심장”
“카뮈의 고향, 이방인의 무대”
MBC TV의 개막식 선수단 입장 중계에 등장한 국가별 한 줄 정보들이다. '무한도전'식 무식 개그도 아니고 독설 유머도 아니라면, 어쩌면 그렇게 무지와 편견과 천박함에 용감할 수 있었을까?
구글 창업자가 결혼한 곳은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다. 구글 창업자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물론, 설사 안다 해도 그게 그 나라를 설명할 단 한 줄 중요한 사안인가. 기적의 사막 도시 두바이로 주목받고 있는 아랍 에미리트(UAE)는 '부의 깔때기'라는 한마디로 요약되었다. 식민 통치의 유산으로 21세기 최빈국에 머물고 있는 차드를 '죽은 심장'이라고 부른 이유는 또 뭔가. '죽은 심장'은 항구를 통해 아프리카 대륙에서 땅따먹기를 했던 19세기 유럽 제국주의의 언어다. 130년간의 프랑스 식민 통치에 맞선 8년간의 알제리 전쟁에서 알제리인 100만 명이 죽었다. 그런 나라를 이곳 태생 프랑스 작가 이름 하나로 설명하고 만다?
사실이 그렇지 않으냐고 따진다면 이렇게 되물어 보면 된다. 어떤 나라가 올림픽 개막식을 중계하며 한국을 "하멜이 표류한 나라" "리앙쿠르암을 포함한 많은 섬을 지닌 나라" 라고 하면 어떨는지.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있었다. 아프리카의 가나를 "예수가 최초로 이적을 행한" 곳이라고 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과 착오를 일으킨 것 같다. 고대 이스라엘의 지명과 21세기 현존하는 나라 이름을 헷갈린 것을 웃어넘겨야 할까.
경멸적 표현이 많은 것은 대부분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가난한 국가들이었다. 그래서 더욱,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올바른(correct) 표현을 찾아 썼어야 했다. 평소에는 그처럼 진보를 외쳐온 방송이, 건전한 상식과 교양을 전파해야 할 공영방송이, 올림픽 개막식 중계를 정치적으로 불공정할 뿐 아니라 역사 인식에서도 기가 막힌 허무 개그로 만들었다. '죽은 심장'은 국내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정보를 그대로 갖다 쓴 것으로 보인다. 혹 작가가 그랬다면 담당 PD는 뭘 했으며, 그 위에서는 또 무엇을 감독했는가. 온 나라를 무지에 의한 공포로 몰아넣은 MBC의 '광우병' PD수첩은 '크로이츠펠트 야코프병(CJD)' 발언에 '광우병(vCJD)'이라는 자막을 내보내고도 번역자의 실수로 치부했다. MBC는 "신뢰성과 창의성, 전문가 정신"을 자기들이 추구하는 핵심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이번 개막식 국가 해설 자막이 과연 글로벌 스탠더드에 비추어 문제는 없는지, 있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