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국심이 자유통일의 힘이다                                       

    "김정일이 고맙지, 왜냐고? 한방에 우리 5천만 안보교육 시켜줬잖아.”
    요즘 망년회서 가끔 들리는 말이다. 6.25남침이후 60년만에 우리 영토 연평도를 포격한 침략행위가 오히려 한국인의 마비된 국민의식을 일깨워준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역설이다.

    “진짜 고마운 건 이승만 대통령이야. 미국 아니면 벌써 망했을걸.”
    이어지는 화제는 어김없이 정부와 여-야당 정치인들에게 쏟아지는 분노의 화살이다.
    그렇다. 6.25 말기에 ‘휴전 결사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며 미국을 밀어붙여 ‘한미방위조약’ 을 얻어낸 건국대통령 이승만, 대한민국 현대사의 최대 공로자인 위대한 지도자에게 우리는 고마워할 줄 몰랐다.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연평도뿐이겠는가, G20 대한민국의 성공신화도 불가능했으리라.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혁명 성공 덕분에 풍요해진 대한민국은 국가안보를 잊어버렸다.
    갈수록 국가정체성이 파괴되어 위험수위를 넘나든다. 천주교 추기경이 천안함-연평도 공격에 유감을 표시하면 신부들이 ‘반공주의자’라고 비난한다. 나라를 지켜온 ‘반공’이 그 신부들에겐 욕설로 전락했나 보다.
    야당들은 군사훈련까지 가로 막는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은 상당부분 친북-친공세력에 점령되어 있다고 봐도 될 것인가.
    왜 이 지경이 되었나? 말할 것도 없이 해방-건국이래 북한의 대남 선전선동 파괴공작과 더불어, 한국내의 ‘대한민국 부정 세력’이 크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엔 군출신 대통령이후 집권한 정치인출신 대통령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우리 문민정부는 상해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최초의 정권”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과 헌법까지 부정한 좌파가 쓴 연설문이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제2의 건국’을 선언했다. 이승만 이후 김영삼까지 대한민국 합법정부를 전면 묵살하고, 나라를 북쪽으로 몰고 간 정권이다. 진상은 언젠가 반드시 밝혀질 것이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아예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될 나라”라고 공언했다.
    무식 탓이든 이념 목적이든 3명의 대통령들이 스스로의 국가를 앞장서 부정해왔으니 국민들의 국가인식도 더불어 추락하면서 대한민국 정통성과 정체성은 정치꾼들의 포퓰리즘 장난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발등의 불은 국가정체성의 재건 강화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한 기초위에서 북한 군사독재의 전쟁노름을 무력화 시키고, 자유통일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 우리시대의 사명이다. 이명박 정부가 뒤늦게나마 통일교육을 추진하고 있으니 천만다행이다. 우리의 통일교육은 ‘자유통일’에 맞춰야 하고, 그 전제로 대한민국 정체성의 공고화 노력을 병행하지 않으면 실패하고 말 것이다.

    여기에 필자는 <이승만과 대한민국 건국역사> 교육을 다시금 강조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이 세웠다. 이승만 혼자의 힘으로 세웠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독립투쟁은 제쳐두고 해방공간 3년간. 미국의 ‘좌우합작 정부수립’ 압력과 협박, 북한과 좌익들의 파괴공세, 난립한 정치세력들의 ‘남북합작’ 난동에 막아서서 ‘자유 대한민국’을 만들어 내기까지 이승만이 고군분투한 역사적 현장의 진실은 오늘날 아무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장 귀중한 나라의 뿌리를 너무나 쉽게 잊었다.
    독재자의 오명 속에 대한민국의 정통성까지 파묻어 버리고 말았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로버트 올리버 지음, 박일영 옮김, 동서문화사 2008)는 책을 읽어본 적 있는가. 이 책을 한번만 읽는다면 “과연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탄생할 수 없었구나” 저절로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이승만을 일찍부터 배격한 것은 소련과 김일성이다.
    소련에게 이승만은 결정적인 방해물이었다. 해방 2개월만에 북한인민위원회(정부)를 구성해 놓았던 소련, 남한에선 미국이 ‘좌우합작’을 강요하며 소련에 협력하는 역사의 갈림길에서 이승만은 ‘反소비에트’ ‘反공산주의’를 외치며 ‘소련의 위성국화’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왜 그토록 완고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는가.
    우리는 여기서 잠시 한국 근현대사를 돌아봐야 한다. 그것은 이승만의 삶 자체이다.
    1875년생인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다니던 20세때 ‘민비살해’와 ‘아관파천’을 지켜보며 일본과 러시아의 한반도 쟁탈전을 몸으로 체험한다. 국모피살을 복수하겠다고 나섰다가 쫓겨다니고 러시아의 국토할양 요구에 논설로 데모로 저항했다. 왕정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입헌군주제를 주창하다가 역모죄로 몰려 투옥되었다. 조선땅에서 러일전쟁이 한창일때 유명한  <독립정신>을 옥중에서 저술한다. 외세를 배격한 독립강국의 건국이념을 설파한 책이다.

    1923년 하와이 망명시절 이승만이 발표한 논문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은 그의 反외세 反러시아가 ‘反공산주의’로 무장되는 결정적 의식변화를 보여준다.
    “평민들이 집권하는 것도 바람직하고 재산분배도 당연하다. 단지 자본가 계급을 없앤다면 개명-진보는 정지될지라. 세계를 공산화하겠다니 만국의 조국이 소련이란 말인가.”
    레닌의 공산혁명이후 전세계를 풍미한 적색 열풍 속에서 이승만이 내놓은 ‘공산주의 비판’은 프린스턴대 박사 다운 정치철학 이상의 타고난 통찰력, 세계관을 잘 드러낸 것이었다.

    1945년 남한에 진주한 미국에게도 ‘반소(反蘇) 반공주의자’ 이승만은 장애물이었다.
    해방 전에 이미 이승만은 얄타회담의 미-소 밀약(1945.2, 소련의 한반도점령)을 폭로하며 워싱턴에서 반대 투쟁을 벌여 ‘반미분자’로 낙인 찍혔던 것이다.
    미국의 방해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며 민족세력 통합정부를 추진한 이승만에게 또 하나의 벽은 김구였다.

    상해임시정부의 주석 김구는 임정이 집권해야 한다는 야심을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중국서 조선공산당원들을 임정각료로 영입했던 김구, 그들이 “김일성 장군도 백범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겠답니다”라며 유혹하자 김일성이 벌여놓은 정치쇼 남북회담에 달려간다.
    “스탈린을 만나 담판해야지 꼭두각시 김일성은 왜 만나느냐”는 이승만의 만류도 뿌리치고 평양에 간 김구가 본 것은 ‘조선인민공화국’ 헌법과 인공국기, 막강한 인민군대였다.
    서울에 돌아온 김구는 유엔감시 자유총선도 반대하고 대한민국 건국도 반대했다.
    “건국하면 뭘해, 곧 인민군이 내려오면 없어질 텐데...” 김구를 설득하던 자유중국(대만) 외교관의 비망록이 전하는 이 발언의 진위는 둘째치고, 김구는 대한민국의 유엔승인 작업도 반대했다. 유엔에 보내는 정부사절단에 맞서 ‘승인반대 사절단’까지 만들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러면 왜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은 사라지고 김구만 살아있는가.
    첫째, 이승만은 김일성의 철천지 원수다. 남북합작 적화통일을 좌절시킨 이승만은 무력통일전쟁인 6.25까지 김일성을 패배시켰다. 북한은 지난 60여년간 ‘이승만은 독재자, 친일정부, 친미 괴뢰, 분단 원흉’으로 줄기차게 선전선동해 왔다. 지금도 한국의 친북-종북분자들은 그 각본을 반복암송하고 있다.

    둘째, 남한 정치세력들이 건국당시부터 이승만을 ‘독재자’로 몰아붙였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내각을 구성할 때 이승만은 지주계급을 완전히 배제했다. 당시 남한최대 정당인 한민당은 7명의 각료를 요구했으나 이승만은 거부했다. 그 이유는 (1)친일색깔의 인사들은 안된다 (2)농지개혁에 지주들은 반대한다...등이었다. 그때부터 이들에게 이승만은 ‘독재자’였고, 그들 소유 언론들은 4.19까지 10여년간 ‘독재자’를 규탄한다.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

    셋째, 4.19세대는 이승만이 ‘장기집권 독재자로 잊혀져야 할’ 입장에 있다.
    이승만은 장기집권 했지만 다른 나라 건국대통령들보다 훨씬 짧을 뿐 아니라 내용도 차원이 다르다.
    부정선거에 항거한 4.19 데모, 말년에 그의 권위를 악용한 집권세력의 ‘人의 장막’ 속에 가려졌던 대통령에게 4.19 학생의거 뉴스는 큰 충격이었다.

    “부정선거는 왜 해? 내가 그만두면 젊은이들이 안다치겠지, 국민이 원하면 하야한다”는 성명을 직접 구술하고 경무대를 스스로 걸어 나간 이승만, 85세로 너무 늙었던 것이 죄였을까. 전쟁 중에도 헌정을 중단하지 않고 선거를 치룬 그가 10년간 의무교육시킨 자유민주사상으로 성숙해진 국민, 그의 고별사는 “불의를 보고 일어서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다”였다.(김정열 전국방장관 회고록)

    넷째, 김구는 왜 현대 대한민국의 우상으로 우뚝 서게 되었나.
    (1)낭만적 민족주의자 김구의 남북합작노선은 북한정권에게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남한 분열과 반미 친북세력 양성에 효과만점의 아이콘이다.
    (2)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즉시 김구 우상화 작업에 나섰다. ‘백범기념관’을 만들어 성역화하고 ‘백범일지’를 다시 꾸미고 교과서도 바꾸고, 남북연방제를 추진하면서 자신의 이념노선을 합리화하는 국민 설득용으로 김구를 십분 활용했다.
    (3)노무현 정권에서 더욱 노골화된 친북좌파 세력은 백범 우상화교육을 극대화했다. 6.15선언, 10.4선언의 실천 촉매제로 이용되는 백범사상, 김구가 살아나와 오늘의 남북현실을 제대로 본다면 펄펄 뛸지도 모르겠다.
    (4)전교조를 비롯한 친북좌파들은 백범기념관을 ‘우리민족끼리’ 반체제-반미 통일 교육장으로 독점하고 있다. 각급 학교 학생들을 동원한 ‘계기수업’은 물론, 각종 출판물을 쏟아내고 인터넷,  방송, 학원가등 청소년 세뇌교재 백범의 활용도는 무제한이다.

    지난 10여년간 대한민국은 ‘남북연방 평화통일’의 주술에 중독되어 비틀거리고 있다.
    북한에서 외치는 ‘평화통일’은 전쟁 없이 남한국민의 봉기에 의한 적화통일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힘은 ‘建國史-護國史’에서 나온다고 확신한다.
    '군인정신'을 백날 외쳐봤자, 친북세력을 아무리 욕해봤자, 국방개혁에 돈 쏟아봤자, 밑빠진 독에 물 붓기다.   
    애국심을 교육 시키자. 애국심이 자유통일의 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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