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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 대학에서 우드로 윌슨을 만나다
하버드 대학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승만은 뉴욕으로 옮겨 왔다.
그는 유니언 신학교 기숙사에 머물면서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갔다가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알게 된 어네스트 홀 목사를 만났다. 홀 목사는 이승만의 딱한 사정을 듣고 나서 그에게 뉴저지의 프린스턴 대학으로 옮길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다음 날 아침 이승만은 그로부터 속달 우편을 받았다. 봉투 안에는 프린스턴 행 기차표와 함께 프린스턴 역에서 만나자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승만은 당장 프린스턴으로 갔다.
프린스턴에 도착하자, 홀 박사는 이승만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장 찰스 어드만에게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신학대학원 기숙사인 칼빈 클럽에서 무료로 먹고 자면서 대학원 정치학과에 다니도록 주선해 주었다. 1908년 9월 학기로 입학이 허용된 것이다. -
프린스턴에 있는 2년 동안 이승만은 미국에 온 이래로 가장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학비와 생활비 걱정이 없었기 때문에 공부에만 열정을 쏟았다.
신학대학 기숙사(알렉산더홀과 핫지홀)에 머물면서 신학 강의도 듣고 신학생들과도 친해졌다. 신학대원장 찰스 어드먼, 대학원장 앤드루 웨스트, 그리고 총장 우드로 윌슨은 모두 이승만을 도우려고 했다.
특히 윌슨 총장 부부와 세 딸은 그를 집으로 자주 불러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둘째 딸인 제시가 이승만에게 동정적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교육사업을 하고 있을 때 결혼 청첩장을 보낼 정도로 가깝게 느꼈다. -
윌슨 총장은 손님들을 만날 때마다 이승만은 장차 한국 독립을 되찾을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그를 강연 연사로 추천했다.
프린스턴에서 이승만은 국제법과 외교사를 전공했다. 그리고는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이란 제목의 박사학위 청구 논문을 제출했다.
논문은 1912년에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되었다. 그리고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공해상의 중립 문제가 떠오르면서,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1910년 6월 14일 졸업식에서 이승만은 윌슨 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것은 윌슨이 총장으로서 참석한 마지막 졸업식이었다.
그 길로 윌슨은 대학을 떠나 뉴저지 주지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1912년 11월에는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사 학위는 받았지만, 이승만은 돌아갈 나라가 없었다. 그가 박사 학위를 받은 지 두 달 뒤인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었기 때문이다. -
박사학위 논문이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되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서양에서 전시중립제도가 정착하는데 미국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과정을 밝힌 것이었다. 즉, 미국의 탄생과 함께 전시에도 중립국들의 통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국제관행이 만들어진 과정을 추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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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통상의 자유를 방해한 나라는 주로 해군이 강한 영국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은 영국에 대해 전시에도 통상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계속 주장했다. 미국은 1812년에 영국과 전쟁을 하면서까지 중립의 권리를 지키려고 했다.
나아가 미국은 그러한 통상의 자유를 중남미 대륙으로 확장시키기도 했다. ‘먼로 독트린’이 바로 그러한 미국의 의지를 표현한 외교적 원칙이었다.
그것은 중남미의 식민지들이 유럽의 모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그들의 독립을 승인하고 중립국의 권리로 정당화해 주었다.
그후 “미국의 중립 관행”은 제네바 국제중재재판소와 1908년의 런던회의에서 인정됨으로써 국제법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전시중립론은 자유주의적인 미국식 국제법이었다. 미국은 유럽의 해양 강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그것을 계속 천명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정착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논문 주제로 중립의 문제를 다룬 것은 한말의 개화파들이 그것을 한국의 독립 보존 방법으로 생각했던 데서 시작되고 있는 것 같다. 한 때 한국인들은 유길준의 경우처럼 영구중립을 열렬히 희망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가 된 고국땅에 돌아와 YMCA 활동을 하다 -
박사학위를 받고도 갈 곳이 없어 실의에 빠진 이승만에게 서울 기독청년회(YMCA) 총무 G. G. 그레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국에 돌아와 일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떠난지 6년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1910년 9월 3일 그는 뉴욕에서 영국의 리버풀로 가는 배를 탔다. 태평양 항로를 택하지 않고 대서양 항로를 택한 것은 유럽의 나라들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의 리버풀에서 배를 내린 이승만은 런던, 파리를 구경했다. 그리고는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만주에 도착했다.
만주에서 한반도로 들어 올 때 그는 한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일본 관리들에게 여행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슬픔을 맛보야야 했다. -
그리고는 1910년 10월 10일 기차로 서울역에 도착했다. 조국이 일본에 병탄된 한달반 뒤였다. 그리고 6년 만에 부친을 만났다.
그는 제일 먼저 한국인들의 큰 지도자였던 이상재(李商在)를 찾아 갔다. 이상재는 한성감옥서 시절 이승만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후 기독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승만을 아들처럼 아끼고 있었다.
서울 YMCA에서 이승만은 학생부 간사와 청년학교 학감으로 강연을 하고 성경을 가르쳤다. -
당시 이승만은 최고 학력의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수많은 청년들이 모여 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영향을 받아 미국 유학의 꿈을 키웠다. 그들 가운데는 임병직, 이원순, 허정 등이 있었다.
1911년에는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전국을 다니면서 교회와 학교를 방문했다. 그는 강연과 설교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자유주의 사상을 불어넣고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려고 했다.
그 때문에 일본 헌병들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특히 윤치호가 경영하는 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院)에서 모인 하령회(夏令會) 이후로 일본헌병의 감시가 심해졌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종로학당 교장으로만 일했다. 5년 7개월의 감옥 생활을 겪었던 그에게 체포의 악몽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
‘105인 사건’과 함께 조여오는 일본의 압박
그러나 그러한 이승만의 신중한 처신도 오래 갈 수 없었다.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해 개신교 세력의 민족운동을 타도하려 했고, 그 파장이 이승만에게도 밀려 왔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평안북도 선천의 기독교계 신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데라우찌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조선총독부의 사건 조작이었다. 그 사건으로 135명의 한국인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심문 도중에 3명이 고문으로 숨졌고 많은 사람들이 옥살이를 했다. 그 사건의 대표급 인물인 윤치호(尹致昊)는 3년형을 살았다.
이승만도 위험한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지만, 당장 체포되지는 않았다. 당연히 그도 체포대상이었지만, 한국 YMCA 총무였던 필립 질레트, 그리고 일본 YMCA 지도자인 존 모트 같은 미국인 선교사들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잘 알려진 이승만을 체포하면 미국과 일본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일어날 것이라고 일본인들을 위협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 있던 동북아시아 감리교 책임자 해리스 감독이 ‘105인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한국으로 온 것도 그의 체포를 막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아서 브라운 박사의 한국 방문도 이승만에게 도움이 되었다.
일본에 잠시 와 있던 하버드 대학 총장 찰스 엘리엇의 105인 사건 진상 조사 활동도 이승만의 체포를 막는 데 도움이 되었다. -
그러나 미국인들의 보호막도 오래 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에게 남은 길은 애국계몽 운동을 그만두든가, 아니면 한국을 떠나는 것뿐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날 것을 적극 권유했다.
그때 마침 세계 감리교 총회가 1912년 5월 미국 미네소타 주의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 회의는 4년마다 열렸다.
이승만은 주변 인물들의 도움으로 거기에 참석할 한국 대표로 뽑힐 수 있었다. 그가 한국 대표로 뽑히는 데는 배재학당 동창이자 인사동 중앙감리교회 책임자인 이경직(李璟直)목사의 도움이 컸다.
이승만은 37회 생일인 1912년 3월 26일에 회의 참석을 이유로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실제로는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망명 길이었다. -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