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업분야 응답기업 53.1% "정부규제로 사업차질 경험"규제로 근원적 경쟁력 확보 어려워…"중복된 규제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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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한 의료업계 관계자는 중국에 인터넷전문병원을 설립하기 위해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원격진료 자체가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비용절감과 효율성을 고려하면 중국진출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 한 스타트업 종사자는 지난해 공공정보를 활용한 새로운 빅데이터사업을 준비하다 몇 달 만에 접어야 했다. 시민단체가 기업 20곳을 개인정보보호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것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앞둔 우리나라 현주소는 이처럼 암울하다. 전 세계가 4차 산업혁명에 발맞춰 사물인터넷(IoT)과 빅데이터‧블록체인 등 핵심기술을 축적한 반면 우리나라는 낡은 규제로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4차 산업혁명 기술은 미국‧일본‧중국에 비해 뒤처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달 4차 산업혁명 관련 협회 정책담당자 1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현재 우리나라 기술수준을 100으로 했을 때 미국 130‧일본 117‧중국 108로 집계됐다.
해당 수치는 클라우스 슈밥이 제시한 4차 산업혁명 12가지 분야인 △바이오 △사물인터넷(IoT) △우주기술 △3D 프린팅 △드론 △블록체인 △신재생에너지 △첨단소재 △로봇 △인공지능(AI) △증강현실(AR) △컴퓨팅기술(빅데이터)에 대해 각각 점수를 매긴 뒤 도출한 평점이다. -
설문에 응답한 이들은 5년 후에도 기술격차는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중국은 2023년이면 우리나라가 비교우위에 있던 △바이오 △IoT △로봇 등의 기술 수준을 따라잡고 경합을 벌이던 △첨단소재 △컴퓨팅기술 분야에선 우리나라를 뛰어넘을 것으로 내다봤다.
우리나라도 최근에서야 정치권과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규제를 풀거나 풀기로 결정하는 등 일부 진전된 논의가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 한참 모자란다는 지적이다. 세계적 추세에 맞춰 기술혁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민간기업 활동을 촉진시킬 수 있는 핵심적인 제도적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무엇보다 최우선 과제는 규제개혁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규제에 발이 묶여 새 먹거리 발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5개 신산업 분야 700여개 기업을 대상으로 '국내 신산업 규제 애로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설문에 응한 기업 중 53.1%가 정부규제로 사업추진이 지연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
이 외에도 사업추진 과정에서 중단하거나 보류하는 경우도 절반 가까이(45.5%) 발생했으며, 규제요건을 맞추기 위해 불필요한 비용을 지출한 경우도 있었다. 분야별로는 핀테크가 70.5%로 사업추진 차질 경험이 가장 많았고 △신재생에너지(64.7%) △무인이동체(50.0%) △바이오헬스(43.8%) △ICT융합(33.3%) 등이 뒤를 이었다.
◆어려움 겪는 현장 "규제개혁 시급"
실제로 현장에서는 4차 산업혁명 핵심과제인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자율주행 △드론 △핀테크 △바이오의약품 등 차세대 혁신산업에 대한 규제로 근원적 경쟁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차량공유 스타트업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규제 하나를 풀면 또 다른 규제 때문에 막혀 답답하다"며 "분야별로 중복된 규제가 셀 수 없이 많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인공지능·사물인터넷·3D프린팅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들을 이용하면 생산·소비 등 경제 활동부터 건강·의료·공공서비스 등에 이르기까지 활용범위가 무궁무진하지만, 규제에 가로막혀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분야는 한정적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중 하나인 빅데이터 분야도 개인정보 규제 때문에 관련 기술이 있어도 활용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일일이 개개인 동의를 받아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건 기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얼마 전 새로운 사업을 검토해 보기 위해 관련 사업의 기반이 되는 데이터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대기업이 아닌 이상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며 "과도한 정보보호 규제로 인해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
바이오헬스 분야도 마찬가지다. 생체데이터 수집부터 최적화과정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중복적인 법적 규제가 존재한다. 한 제약바이오협회 연구원은 "선진국의 기술은 따라갈 수 있어도 데이터의 양은 따라갈 수 없다"며 "빅데이터를 구축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비즈니스를 창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관련 기업들도 "4차 산업에서 중요한 것은 빅데이터 활용인데, 개인 건강정보는 유통될 수 없다"며 "본인 유전자를 알기 위해서는 병원에 가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의료데이터를 보기 위해서는 절차가 복잡하다"고 지적했다.
원격의료에 있어서도 규제개혁이 시급하다. 일본은 지난해 원격의료를 전면 허용했고 중국도 지난 3월부터 B2C 원격진료 서비스를 본격 시작한 반면, 우리 의료업계는 2000년대 중반부터 원격의료 연구개발과 인력지원에 나섰지만 의료법으로 인해 제대로 된 논의조차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활성화되기 시작한 블록체인 기술도 온갖 규제와 충돌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가 가상화폐공개(ICO)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블록체인 생태계 조성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블록체인 업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국내환경에서는 자금조달이 어려워 해외에서 가상화폐공개(ICO)를 진행하고 있다"며 "산업 생태계 뿐만 아니라 기술유출도 걱정되는 부분"이라고 언급했다.
핀테크 역시 사업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규제개혁에 나서겠다는 정부가 정작 공공기관 홈페이지에서 엑티브엑스를 사용하고 있다"며 "회원가입, 본인확인 등 금융 서비스가 필요한 분야에서 공공기관들이 앞장서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게임업계도 강제적 셧다운제나 게임중독법 제정 논란과 같은 규제 위주 정책에서 벗어나길 원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은 미비하고, 규제 위주의 정책만 실시고 있다"며 "정부기관에서 적극적으로 글로벌 B2B 비지니스의 지원자로서의 중계 역할을 지원해줬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일반 기업들도 4차 산업혁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대응하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정부 규제 때문에 겁부터 먹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4차 산업 혁명 자체가 규정화돼 있지 않아서 불확실한데, 정부가 언제 어떻게 딴지를 걸지 모르니 불안하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규제개혁 없이는 제 4차 산업혁명을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김은경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포지티브규제에서 네거티브규제로의 실질적인 전환이 시급하다"며 "특히 사전적 규제에서 사후적 감독과 규율 중심으로 규제를 정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4차 산업혁명은 융·복합이 핵심이기 때문에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구분에 따른 규제 적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산업별 칸막이 개별규제의 정리 없이 융복합산업의 발전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개별 기술‧업종‧분야 중심의 진입규제를 전면 폐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