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상무부, 칩스법 보조금 접수 기준 공개예상에 없던 '초과이익공유'에, 생산시설 외부 사용 우대권까지 '당혹'이달 중 공개 예정 '가드레일' 세부사항 우려 커져… 삼성·SK '딜레마'
  • 미국이 자국에 투자하는 반도체 기업에 총 527억 달러(약 67조 원) 규모의 보조금 지원 절차를 시작한 가운데 예상에 없던 초과이익 환수, 반도체 시설 공개 등의 지급 조건이 추가돼 반도체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미국 측에 기업 기밀이 담긴 회계장부나 연구·개발(R&D) 내용 등을 공개해야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보조금을 받아 현지 생산에 나서야 할지 삼성과 SK이 딜레마에 빠졌다.

    여기에 아직 발표되지 않은 가드레일 세부사항으로 중국 투자까지 막히게 되면 사실상 미국이 보조금 제공을 무기로 독소조항을 남발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칩스법 세부사항 열어보니...초과이익 환수·생산시설 공개 등 독소조항 가득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과학법(칩스법) 보조금 지급 기준 및 계획을 발표하며 미국 경제와 안보, 특히 첨단무기 개발에 도움이 되는 반도체 기업에 우선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날 미국 측이 밝힌 보조금 지급 조건 중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단연 초과이익 환수 관련 조항이다.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은 기업이 당초 제출한 이익 전망치와 큰 차이를 내는 수준으로 이익을 내게 되면 미국 측은 제공했던 보조금의 최대 75% 수준까지 자금 환수에 들어갈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 조건을 두고 국내 반도체업계가 크게 동요했다. 반도체 제조사들이 대규모 투자에 나서는 주된 이유가 규모의 경제를 통해 비용을 최소화하고 생산성을 높여 가격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인데, 국내에 이어 핵심 생산기지로 떠오른 미국에서 보조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초과이익 환수까지 당하게 되면 투자 효율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우리 기업들의 영업 기밀이나 주요 재무적 조건, R&D 및 투자비 현황 등을 미국 측에 고스란히 공개해야하는 상황에도 처할 수 있어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자국 생산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이유가 사실상 이런 방식으로 글로벌 주요 반도체 기업 내부를 속속들이 살펴보기 위해서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미국 측이 수익 심사에 나설 때마다 기업들이 자료 공개 범위를 두고 기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점도 부담이다.

    기밀 자료 뿐만 아니라 미국 국방부 측에는 반도체 기업들의 생산시설을 공개하고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줘야할 가능성도 있다. 반도체는 산업 특성 상 생산설비 자체가 핵심 기술이 담긴 기밀 그 자체인데 이를 여과없이 미국 측에 보여주고 심지어 미 국방부가 이 설비를 통해 실험에 나서는 데 협조해야 하는 등의 조건은 무리한 수준이라는 원성이 나온다.

     이 밖에도 미국 내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투자도 기업에게 상당부분 전가하는 조건을 포함했다. 보조금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공장 직원이나 건설 노동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보육시설을 마련해야 하고 향후 공장을 운영하면서도 관련 인력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교육하고 투자할 것인지 계획서 등을 제출해야 한다.
  • ▲ 삼성전자 미국 테일러 신규 파운드리 공장 부지 전경 ⓒ삼성전자
    ▲ 삼성전자 미국 테일러 신규 파운드리 공장 부지 전경 ⓒ삼성전자
    ◇ 아직 남아있는 '가드레일' 조항...中 투자 막히고 기밀 유출 가능성 높아져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예정이다. 아직 미국 측이 사전에 언급한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의 구체적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최대 10년 간 중국을 중심으로 한 우려 국가에 반도체 관련 투자와 생산설비 증설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가드레일 조항은 특히 중국에서 반도체 생산 규모가 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가드레일 조항도 이달 중에는 세부 내용이 공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예상치 못했던 조건이 대거 등장한 이번 미국 상무부의 보조금 지급 기준안을 두고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당황하는 기색이다. 앞서 가드레일 조항이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도 삼성과 SK 등 국내 기업들은 사실상 중국 내 반도체 투자가 막힐 위험성이 크다고 판단해 우리 정부 측과 함께 미국에 이 같은 사정을 전달해야할 필요성이 커진 바 있다.

    여기에 초과이익공유는 물론이고 기술이나 기밀 유출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들이 추가되면서 보조금을 빌미로 독소조항을 떠안게 됐다는 여론도 커지고 있다.

    ◇ 고민 깊어지는 삼성·SK...美와 소통한다는 정부 역할에 '의구심'

    특히 삼성전자가 딜레마에 빠졌다. 삼성은 지난 2021년 11월 미국 텍사스 테일러 지역에 파운드리 신규 공장을 건설한다고 선언하고 현재 기초 공사가 한창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투자금만 170억 달러(약 22조 원) 규모다.

    이에 더불어 향후 20년 간 이 테일러 지역에서 9곳의 생산공장을 신설할 계획도 갖고 있다. 기존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오스틴 지역에도 2개 공장을 신설한다. 이렇게 20년 간 총 11곳의 신규 공장을 짓는데만 거의 2000억 달러(약 260조 원)를 쏟아붓는다는게 삼성의 큰 그림이다.

    삼성이 이 같은 대규모 미국 반도체 투자를 계획한데는 미국 측에서 제공하는 보조금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향후 수십년 간 막대한 투자가 불가피한 반도체업계 구조 상 국가 보조금이나 세제 혜택 같은 지원은 생명줄이나 다름 없다.

    다만 이번처럼 기업 비밀이나 자유 경영활동이 침해될 수 있는 독소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보조금 지원은 득보다는 실이 클 수 있다. 삼성도 이런 부분을 면밀히 검토해 보조금 신청에 나선다는 입장이지만 보조금의 재정적 효과 외에도 미국과의 중장기적인 관계를 고려할 때 삼성이 보조금을 신청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현지 생산시설을 꾸릴 가능성은 낮다는게 업계의 중론이다.

    SK하이닉스는 이제 막 미국 내 패키징 공장 및 R&D 시설 투자를 추진하는 상황이라 고민할 여유가 조금 더 있다. 하지만 SK는 삼성보다 중국 생산에 의존도가 더 높은 상황이라 앞으로 나올 가드레일 조항 세부사항을 조율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공을 들여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정부는 이 같은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보조금 문제를 조율하기 위해 미국 측과 소통 채널을 열어두고 수시로 협의에 나서고 있다는 입장이다. 가뜩이나 국내에서도 반도체산업 지원법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에서도 독소조항을 품은 보조금 지원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되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는데 앞장서야 할 정부의 책임론도 더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