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여당, 연이어 선심성 정책 내놔… 공론화 과정 없고 기존 정책 뒤집어 혼란 야기내년 총선서 여소야대 정국 뒤집지 못하면 '식물 정권' 전락할 수 있다는 절박감 묻어나선심성 정책보다 중요한 건 초심 잃지 않고 규제개혁·체질 개선 원칙 지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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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총선을 5개월여 앞두고 정부·여당이 선심성 정책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정부는 총선용이 아니라고 선을 긋지만, 표심을 의식한 티가 난다. 거야(巨野)의 발목잡기에 개혁 드라이브가 번번이 낭패를 보는 상황에서 내년 총선 패배는 곧 윤석열 정부가 식물정권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일면 이해되는 측면도 없잖다. 하지만 당장 표(票)를 의식해 정작 국민이 윤 정부에 바라던 것을 등한시할 경우 정부와 여당은 소탐대실할 수 있다는 경고음이 나온다.선심성 정책 논란의 시작은 경기도 김포시의 서울 편입 추진이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지난달 30일 김포시의 서울시 편입을 당론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 김포구' 논란은 이내 구리·하남·고양 등 서울시에 접한 위성도시로 삽시간에 번졌고, 서울시의 글로벌 도시경쟁력 저하와 맞물려 '서울 메가시티' 논쟁에 불을 댕겼다.문제는 지역주민의 삶의 질과 직결되는 핫이슈를 공론화하는 준비 과정 없이 당론으로 밀어붙였다는 점이다. 지역 내 이견은 물론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 논란이 제기됐고, 정치권의 이해득실과 지방자치단체 의견수렴 등 복합한 과정을 거쳐야만 하다 보니 공감대 형성보다는 선거용 이슈몰이에 불과하다는 역풍을 불렀다.최근 환경부가 발표한 식당과 커피전문점 등에서의 일회용 종이컵과 플라스틱 빨대 사용 규제 철회도 정부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총선용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라는 덤터기를 자초했다는 의견이 나온다. 환경부는 지난 7일 식품접객업과 집단급식소에서 일회용 종이컵 등의 사용을 금지한 조처를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일회용 플라스틱 빨대와 젓는 막대 규제에 대한 계도기간도 무기한 연장했고, 편의점 비닐봉지 사용도 한동안 단속하지 않기로 했다. 환경부는 고물가·고금리 상황에서 소상공인 부담을 고려했다는 태도지만, 환경 보호에 역행한다는 지적과 함께 정부 말을 잘 따라 준비해 온 사람만 바보가 됐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온다.내년 6월까지 한시적이긴 해도 주식 공매도를 전면 금지한 것도 표를 의식했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금융위원회는 그동안 공매도가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말해왔는데, 개미 투자자를 의식한 여당의 요구에 너무 쉽게 양보해 버렸다는 비판이 제기된다.전기요금 인상도 마찬가지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전력공사는 지난 8일 계약물량이 300킬로와트시(kWh) 이상인 대기업 산업용 전기요금을 kWh당 10.6원(6.9%) 인상하는 내용의 전기요금 조정방안을 발표했다. 다만 가정용·소상공인용은 요금을 올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산업부는 "고물가와 서민경제에 미치는 부담을 고려했다"고 설명했으나, 시장에선 정부가 내년 총선을 의식해 전기요금 인상 대상을 골랐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가뜩이나 원자잿값 인상과 고환율 등으로 어려움을 반도체·철강 등의 산업계는 비용 부담이 커졌다며 울상인 상황이다.정부는 그동안 요금 인상의 당위성은 인정되지만, 한전의 뼈를 깎는 자구책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는 태도였다. 이날 한전은 시가 2500억 원쯤인 인재개발원 부지(64만㎡)와 자회사 지분 등을 팔고 본사 조직 축소 등의 고강도 대책을 추가로 내놨다. 하지만 정부는 주택용·일반용 전기요금은 건드리지 않았다. 또한 정부는 가스요금도 동결하기로 했다. 요금을 제때 올리지 못해 천문학적인 한전 적자를 유발했다며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을 질타하던 윤석열 정부가 표 앞에 장사 없음을 인정한 꼴이 돼버린 셈이다.
시장친화적인 정책을 펴겠다던 윤 정부가 관제 일변도의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곳곳에서 감지된다. 최근 정부가 밝힌 5G, LTE 단말기 상관없는 '통합요금제'도 가계 통신비 인하를 고려하다가 차세대 통신기술 선점을 위한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8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달부터 단말기 종류에 따라 특정 요금제 가입을 강제하는 제한을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기존에는 5G 스마트폰에서는 5G 요금제만 가입하도록 제한했는데 앞으로는 LTE와 5G를 구분하지 않는 통합요금제를 출시하겠다는 얘기다. 정부는 이를 통해 가계통신비 인하를 이끌 수 있다고 자신한다. 반면 산업계는 6G 차세대 망 도입을 앞두고 기존 LTE망을 유지하는 것이 산업적인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한다. -
윤 정부의 이런 갈지자 행보에는 일면 절박함이 묻어난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매번 야당의 일방적인 반대에 부딪히면서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뼈아프게 느껴졌을 터다. 내년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패배한다면 이는 곧 윤 정부에 사망선고가 내려지는 것과 진배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8일 대구를 찾은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내년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 못하면 (윤 정부는) 식물정권이 된다"고 지적했다.그러나 윤 정부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 '총선 200석' 발언이 나오는 것도 신경 쓰이고, 어떻게든 여소야대 지형을 깨야만 한다는 절박감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여소야대 형국은 윤 정부 출범 이후 달라진 게 없다. 국민이 그걸 모를 리 없다. 어쩌면 변한 것은 윤 정부의 초심이 아닐까.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는 "(윤) 정부는 (출범한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 (개혁의) 방향이나 청사진을 제시해 본 적이 없다"며 "지속 가능한 경제발전을 위해 노동·연금·교육 개혁은 (반드시) 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추진할 정치적 리더십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쓴소리했다.경제학 박사인 이성구 기업소비자전문가협회 이사장도 "(그동안) 정부·여당은 중대재해법 등 문재인 정부가 망가뜨린 시장의 악법을 개혁하고 고치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문재인 시즌 2를 하고 있다"면서 "특히 부동산 개혁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교육·노동개혁과 달리 잘만 하면 반년 만에도 (개선의) 효과가 나타나는 데 바뀐 게 없다"고 질타했다.국민은 여소야대 지형에서 윤 정부가 어려운 걸음을 내딛게 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윤 대통령을 지지했다. 여기엔 녹록잖은 처지일지언정 묵묵하게 개혁을 추진하며 문 정부가 망가뜨린 경제의 기초체력을 되살리고 각종 규제를 풀어 우리 경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길 기대하는 바람이 깔렸다고 봐야 한다. 그런 대원칙하에 한결같은 행보를 보여줄 때 국민은 윤 정부를 신뢰하고 내년 총선에서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 수 있게 지지해 줄 것이다.그러나 정부·여당은 국민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채 불리한 여건만을 얘기하고 있다. 지난해 정부는 '국가첨단전략산업법 개정안'(반도체특별법)을 통해 대기업이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 국가첨단전략산업에 시설 투자할 경우 투자금액의 8%를 세금에서 공제해 주기로 했다. 이에 따라 대기업의 반도체 설비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은 기존 6%에서 8%로 확대됐다. 중견기업 8%, 중소기업 16%는 그대로 유지됐다. 하지만 이는 애초 민주당 제시안인 대기업 10%, 중견기업 15%, 중소기업 30%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정부는 비판이 일자 뒤늦게 대기업 투자에 따른 세액공제율을 15%로 올리고, 한시적으로 임시투자세액공제를 도입하는 내용을 발표했었다.정부는 경제계가 줄기차게 요구하는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과정에서도 매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상속세도 상황은 비슷하다. 윤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상속·증여세 개편을 약속했다. 이에 기획재정부는 유산을 피상속인이 아닌 받은 사람을 기준으로 과세하는 유산취득세를 도입하겠다고 밝혔으나 '여소야대' 정국을 이유로 올해 상속세 개편안을 국회에 제출하지도 않았다.유례없는 복합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구조개혁과 경제 체질 개선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야 상황에서 정부·여당은 처지가 녹록잖다는 이유로, 남 탓을 하며 스스로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봐야 할 타이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