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주영, 박근혜- 이재용 차이에서 해법을 [박정규 칼럼]
  • 때는 1970년대 초반. 박정희 대통령이 아산 정주영을 청와대로 불렀다.

    “조선소 사업 알아보라고 했는데 어떻게 돼 갑니까?” (박 대통령)
     
    “예...일본, 미국, 유럽 각지를 알아보고 다녔는데 도저히 돈도 빌릴 수 없고, 어려울 듯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실력에 조선소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위로의 말을 들을 줄 알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상기된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시오!”

    대통령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은 정주영은 ‘조선소는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라는 사명을 갖고 다시 유럽으로 뛰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500원 짜리 지폐로 톰바톰 회장을 움직여 영국은행 차관을 약속 받고, 선박왕 리바노스의 도움을 받아, 조선소를 짓기도 전에 배를 수주하는 ‘봉이 김선달’식 경영 수완을 발휘해 울산 허허벌판에 현대중공업의 첫 삽을 뜨는데 성공했다.

    그는 훗날 “대통령의 분노가 없었더라면 조선소는 영영 세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1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특검팀은 이 부회장에게 430억원대 뇌물을 제공하고 국회에서 위증했다는 혐의를 적용했다. 

이제 이 부회장의 구속 여부는 서울지법(영장 전담판사 조의연)의 판단으로 넘어가게 됐다. 서울지법은 18일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거쳐 구속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삼성이 대통령 측인 최순실에 건네 준 돈들을 재판부가 어떤 성격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구속 여부가 갈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문제는 대한민국에서 기업인에 대한 대통령의 권유, 지시는 ‘통치행위’로 인식돼 왔다는 것이다.

정주영이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질책 때문에 현대중공업을 창업하게 됐다고 밝혔듯이,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국가 전체를 경영하는 시야에서 기업인들에게 풀기 힘든 과제들을 던져주고 이에 대한 당근책을 제시하곤 했다.  

대표적인 수단이 ‘대통령 특별사면’이다. 

기업인의 경우 특별사면을 해주면서 ‘풀어줄테니 투자도 늘리고 고용도 늘려서 경제발전에 기여해 달라’는 숙제를 주곤 했던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들이 기업인들에게 이런 저런 지시를 하고, 진척이 없을 경우 ‘왜 머뭇거리느냐’고 질책할 때 심령술사가 아닌 이상, 그 정확한 배경을 알 수 없다는데 있다.

속으로는 불만이 있어도, 또 배경을 물어보고 싶어도, 그저 ‘대통령께서 무슨 깊은 뜻이 있겠지’ 하며 지시하는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13일 특벌검사실 조사를 받고 귀가하고 있다ⓒ
    ▲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13일 특벌검사실 조사를 받고 귀가하고 있다ⓒ
  • 2015년 7월 17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안이 통과된 후인 7월 25일 이재용 부회장은 박근혜 대통령과 독대했는데,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2014년 9월 1차 독대할 때 부탁했던 대한승마협회 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이 부회장을 질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뒤 삼성은 대한승마협회장을 맡은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을 독일로 보내 최순실과 정유라를 전폭 지원하기 시작했다. 삼성 수뇌진은 대통령의 승마사랑, 정유라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비인기종목 지원을 위한 대통령의 애정으로 해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주영 고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질책과,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질책은 표면적으로는 ‘대통령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데 대한 분노의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나라의 중공업 발전을 염두에 둔 질책이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사적 편애 및 최순실 집안의 이익을 겨냥한 질책이었다.

    대통령의 지시를 이행한 기업인들이 각 대통령의 속마음을 몰랐다고 해서 뒤늦게 '뇌물죄'의 굴레를 뒤집어 써야 한다는 것은 억울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특검은 국민연금을 동원해 경영권을 방어토록 해준 사안을 놓고 삼성과 대통령이 뒷거래를 한 것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국민연금을 통한 삼성 경영권 방어를 지시한 것이 사실이라 할 경우라도, 이는 통치행위로 볼 수 있다는 학자들도 많다. 

    세계의 어느 나라 대통령이라도 ‘이익 챙기고 빠지는’ 헤지펀드가 대표 기업을 공격한다면 국가적 차원에서 방어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굵직한 대기업들이 침몰해 껍데기만 남은 영국을, 프랑스를 본다면 더욱 그렇다. 

  • ▲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13일 특벌검사실 조사를 받고 귀가하고 있다ⓒ


  • 특검은 이재용 부회장이 없어도 삼성그룹이 굴러가는데 큰 지장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초단위로 바뀌는 세계 시장에서 CEO들의 대면 접촉은 결정적인 승부수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대규모 투자마다 직접 현장을 확인하고 경영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부회장이 구속되면 그동안 쌓아올린 글로벌 인적 네트워크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지난달의 경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뉴욕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CEO, 알파벳의 래리 페이지, 애플의 팀 쿡 CEO 등 세계적 IT 기업 수장들을 불러 '테크 정상회담'을 할 때 이 부회장도 함께 초청받았지만 특검의 출국 금지 조치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적이 있다. 

    이 부회장은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과도 글로벌 하이소사이어티 활동을 전개하는 등 신시장 확대에도 애를 써왔다. 이 부회장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고스란히 삼성의 글로벌 전략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   

    삼성전자의 지난해 매출은 200조원 규모. 올해 정부의 예산 규모가 400조원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예산의 절반에 이르는 금액을 삼성전자가 전 세계에서 벌어들이는 것이다.

    불과 몇해 전까지만 해도 5% 이상을 구가하던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급락해 올해의 경우 정부나 해외기관이나 2%대 중반을 예상하고 있다. 조선, 해운, 철강 산업이 흔들리는 등 현재의 산업구조로는 경제 활력을 되살리기가 불가능해 다양한 신성장동력 발굴이 절실한 상황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AI(인공지능), Iot(사물인터넷), 자율주행차 등 초일류기술을 둘러싼 글로벌 기업들간의 이합집산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최근 상황에서 삼성그룹 최고경영자의 공백은 ‘대한민국 새 먹거리’를 박차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촛불민심의 힘으로 설치된 특검은 삼성 이재용 부회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 밖에 없는 입장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법원은 광화문의 외침 뿐만 아니라, 경기 침체로 밤새 소리없이 베개를 적시는 수백만 소상공인, 취업자들의 고통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교각살우(矯角殺牛)란 ‘쇠뿔 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우’를 빗댄 고사성어다. 
    지금 이재용 부회장과 한국경제의 상황이 그러한 경우가 아닐까.
  • ▲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13일 특벌검사실 조사를 받고 귀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