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더 공평한 임금체계라는 근거 없어"전문가 "능력·성과 중심으로"
  • ▲ 김동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지난달 19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1차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기재부
    ▲ 김동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지난달 19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1차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기재부


    "직무급 중심 보수체계 개편 등 공공기관 관리체계를 전면 개편해 공공기관의 혁신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19일 '2017년도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 결과를 심의·의결하는 자리에서 한 말이다.

    연공서열대로 급여가 인상되는 호봉제가 공공기관 개혁의 걸림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2017년도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에서 공공기관들의 성적이 우수수 떨어진 것이 이같은 판단을 내리게 된 배경으로 보인다.

    지난해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등 총 123개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평가한 결과, A등급(우수)을 받은 공공기관의 비율은 1년 전보다 2.8%p 하락했다.

    'C등급(보통)' 이하를 받은 곳은 53.6%로 절반을 넘었다. 최고 등급인 S등급(탁월)을 받은 공공기관은 단 1곳도 없었고, 대신 최하위 등급인 E등급(아주미흡)을 받은 곳은 전년 4곳에서 8곳으로 늘었다.

    E등급 기관은 그랜드코리아레저(GKL), 대한석탄공사, 우체국물류지원단, 한국국제협력단,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국제방송교류재단, 아시아문화원, 영화진흥위원회 등이다. 여기에 울산항만공사와 한국석유공사는 2년 연속 D등급(미흡)을 받아 기관장이 해임건의 대상이 됐다.

    이처럼 공공기관의 경영실적이 하향평준화한 이유는 채용 비리 등의 여파가 컸다. 실제로 이번 평가에서 채용 비리 연루로 감점을 받은 곳은 평가 대상 123곳 중 100곳이나 됐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도 경영평가 결과를 발표하면서 "채용 비리와 일자리 창출 실적 2가지는 지난해 평가에 우선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또 "공공기관은 기관별로 자체 혁신계획을 수립·이행하고 정부는 보수체계 개편 등 관리체계 혁신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호봉제는 '철밥통'으로 상징되는 공공기관의 무사안일을 낳는 주요 원인으로 꼽혀 왔다. 그런만큼 호봉제를 폐지하겠다는 게 기재부의 기본 방침이다. 현재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은 호봉제 대신 직무의 성격과 난이도, 가치를 평가해 임금을 정하는 직무급제에 힘을 싣고 있다. 노동연구원은 기재부가 발주한 '공공기관 보수체계 운용방향 마련'을 위한 연구용역을 수행하고 있는 곳이다.

    앞서 노동연구원 오계택 연구위원은 지난 5월 열린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노동자 임금체계 마련을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동일직무를 하는 공공기관에 상당한 임금격차가 존재한다는 게 기존 임금체계의 문제점"이라며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설정하고 이 원칙을 어떻게 실현할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날 토론회에 발표자로 나선 정승국 중앙승가대 교수도 "우리나라 호봉급은 상당히 예외적이고 기형적"이라며 "양극화와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배경 중 하나가 호봉제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다만 개편의 키를 쥔 기재부는 매우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보수체계는 공공기관 근로자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 만큼 자칫 거센 반발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현 호봉제의 연공성을 완화하고 직무가치 등을 합리적으로 반영하기 위한 다양한 보수체계 개편안을 검토 중"이라면서도 "연구용역 결과 등을 토대로 다양한 의견수렴 절차 등을 거쳐 '공공기관 보수체계 운용방향'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구용역 결과 발표와 보수체계 개편 시기·방법 등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다.

    그럼에도 이미 노동계 일각에서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며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남정수 민주노총 대변인은 "직무급제가 훨씬 더 공평한 임금체계라는 주장은 근거도 없고, 역사도 없다"며 "직무급제에 따른 평가는 결국 직무 능력을 평가하는 것까지 결합된 '직무성과급제' 형태로 가게 될 텐데 평가자와 피평가자가 있는 조건에서는 이미 공정한 (임금체계) 설계가 굉장히 어렵다"고 지적했다.

  • ▲ 연공성 국제비교. ⓒ노동연구원
    ▲ 연공성 국제비교. ⓒ노동연구원

    이런 가운데 전문가들은 "호봉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보수체계를 적용해야 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한국교통대학교 정의룡 교수는 "지난 정부에서 성과연봉제를 강하게 밀어 붙였지만 기대했던 성과를 내지 못했다"면서 "그렇다고 호봉제로 돌아가는 건 말이 안된다. 대신 성과에 대해 구성원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제도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직무 난의도에 맞는 성과 체계를 갖춰야 한다"며 "기본적인 것은 모두에게 제대로 보장해 주고 성과에 대해서는 굉장한 차등을 둬 작은 성과를 내더라도 많은 이득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자연스럽게 생산성은 제고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성과에 대한 차등은 그러나, 하위 조직끼리 경쟁을 심화시켜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면서 오히려 생산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괄적으로 결과를 평가하지 말고 조직의 특성에 맞춰 장기적으로 평가할 지, 단기적으로 평가할 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파이터치연구원 김강현 연구위원(행정학 박사)은 "우리나라 공공기관은 호봉제와 정년 보장이라는 전세계에서 가장 경직된 갈라파고스 임금체계와 고용체계가 남아있는 곳"이라며 "동일노동을 하면서 생산성이 오히려 떨어지는데도 근무연수가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높은 월급을 주는 호봉제는 우리사회가 지향하는 공정사회에 어긋난다"고 꼬집었다.

    이어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임금의 개념으로 셀러리(salary)가 아닌 웨지(wage)를 쓰고 있다"며 "성과와 관계없이 시간이 지나면 나오는 월급과 자신이 맡은 직무를 다했는 지 여부가 반영된 임금은 조직성과에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또 "직무에 기반한 새로운 보수체계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기관별 임금격차 업종차이와 업무특성 직무분석 성과평가 등 임금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변수들을 고려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김 연구위원은 "공공기관 보수체계 개편은 일에 대한 시각이 '사람 중심'의 인사에서 '일(직무) 중심'으로 전환되는 것을 뜻한다"며 "기존의 사람 중심 인사가 대규모 채용을 통해 기수별로 뽑고 제너럴리스트(책임자)를 육성해 동일한 호봉을 주는 인사였다면 일 중심의 인사는 각 직무별 요건과 업무의 범위 등을 사전에 명확히 정의하고 스페셜리스트(전문가)를 육성해 임금을 지급하는 직무급제로 운영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결국 중요한 것은 이미 낡은 옷이 된 호봉제를 뜯어고쳐 능력과 성과에 기반한 새로운 임금체계를 적용하는 문제"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