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트럼프' 밀레이, 집권당 마사 후보 따돌리고 대권 거머쥐어살인적인 인플레 등 '경제 실정' 좌파에 민심 돌아서 '괴짜'후보 선택페소화 대신 달러화 도입·중앙은행 폐쇄 등 파격적인 공약 내세워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모습… 巨野, 1100兆 나랏빚에도 확장재정 주장
  • ▲ 19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대선 결선에서 승리한 하비에르 밀레이 당선인이 대선 결선 투표를 앞둔 지난 16일 코르도바에서 연 마지막 유세에서 100달러 디자인에 자신의 얼굴을 인쇄한 피켓을 들고 환호하는 모습.ⓒ연합뉴스
    ▲ 19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대선 결선에서 승리한 하비에르 밀레이 당선인이 대선 결선 투표를 앞둔 지난 16일 코르도바에서 연 마지막 유세에서 100달러 디자인에 자신의 얼굴을 인쇄한 피켓을 들고 환호하는 모습.ⓒ연합뉴스
    살인적인 물가 상승률에 시달리는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성향의 하비에르 밀레이(53) 후보가 당선됐다.

    이번 정권교체는 남미의 좌파 포퓰리즘으로 불리는 이른바 '페론주의'(페로니즘)에 대한 아르헨티나 국민의 심판으로 분석된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선심성 '표퓰리즘'(대중영합주의) 정책을 남발하는 우리 정치권에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는 지적이 나온다.

    20일 외신을 종합하면 밀레이(자유전진당) 후보는 19일(이하 현지시각) 대선 결선 투표에서 개표가 91.81% 진행된 가운데 55.86% 득표율로, 44.13%의 표를 얻은 집권당 세르히오 마사(51) 후보를 따돌리고 승리했다. 밀레이 당선인은 다음 달 10일 임기 4년의 대통령에 취임한다.

    밀레이 당선인은 지난 8월14일 치러진 대선 예비투표(경선)에서 총 711만 표를 얻어 전체 득표율 30.04%로 1위를 차지했다. 이후 지난달 본선 투표에서는 득표율 29.99%에 그쳐 집권 여당 '나라를 위한 연합'의 후보인 세르조 마사 현 경제부 장관(36.78%)에 밀렸지만, 과반 득표자가 없어 치러진 1·2위 후보 간 결선투표에서 역전 드라마를 썼다.

    밀레이 당선인은 기성정치권에 대한 민심 이반을 등에 업고 혜성처럼 등장했다. 경제학자이자 라디오 진행자 출신인 밀레이는 2년 전 정치 문외한 상태로 국회의원에 당선돼 유력 야권 후보로 급부상한 인물이다. 그는 '극우 무정부 자본주의자'로 불린다. 밀레이는 선거 기간 전기톱을 든 자신의 상징인형을 만들어 홍보에 활용했는데 "과도한 정부 지출을 톱으로 과감히 잘라내겠다"는 소위 '전기톱 계획'을 내세워 표몰이에 나섰다. 미국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는 밀레이를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라고 묘사했다.

    그동안 연설에서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정의한 밀레이는 지난 수십 년간 아르헨티나 현대 정치사를 지배한 '페론주의'을 비롯해 중도우파의 '마크리스모'(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대통령을 계승한 정치 운동)에 대해 심판론을 강조해 왔다.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에서 1946~1955년, 1973~1974년 집권한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과 부인 에바 페론이 내세운 포퓰리즘 성향의 경제 사회정책을 통칭한다. 외국 자본 배제, 산업 국유화, 공공의료·대중교통 등 공공지출과 복지 확대, 임금 인상을 통한 노동자 수입 증대 등으로 요약된다. 현 페르난데스 대통령도 코로나19 사태가 터지자 1인당 1만 페소 지급 같은 정부 보조금과 국민의 절반을 대상으로 하는 무상 공공의료 등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확장적 재정운용 기조를 유지했다.

    현 정부의 실권자로 불리는 부통령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키르치네르의 경우 지난해 18세 이상 국민에게 50달러를 '기본소득'으로 주는 법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군부 독재기간(1976~1983년)을 제외하고 페론주의자가 권력을 독식한 아르헨티나는 지독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에 상점 약탈 등 극심한 사회불안 양상을 보이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지난 6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116%다. 2월 이후 세 자릿수 상승률을 이어가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IB) JP모건체이스는 지난 8월23일 아르헨티나 경제 관련 보고서에서 올해 말 아르헨티나의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기존의 150%에서 190%로 40%포인트(p)나 올려잡았다.
  • ▲ 유세장서 연설하는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선 후보.ⓒ연합뉴스
    ▲ 유세장서 연설하는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선 후보.ⓒ연합뉴스
    밀레이 당선인은 기록적인 인플레이션 해결책으로 중앙은행 폐쇄와 자국 통화인 페소화 대신 달러화를 도입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밀레이 후보는 언론 인터뷰에서 "페소는 가치가 없다. (페소는) 아르헨티나 정치인들이 발행한 지폐여서 배설물보다도 못하다"고 거친 표현을 쏟아냈다.

    밀레이는 후보시절 라디오 인터뷰에서 "달러화에 필요한 자금은 300억 달러(40조 원) 수준이다. 이를 (조달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할 것이다. 액면가의 25%로 매입할 수 있어서,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관심 있는 투자은행이나 펀드가 많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달러화 도입은 실현 가능성이 작다고 지적한다. 공약 실현을 위해선 개헌이 필요한 데다 현재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의 외화보유고가 마이너스(-) 수준이어서 화폐로 통용할 달러화 자체가 씨가 말랐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실현 가능성을 떠나 밀레이 당선인이 이런 공약을 들고나온 배경을 곱씹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르헨티나는 비옥한 토지와 목축업을 기반으로 1890~1920년대 1인당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미국·호주와 엇비슷했던,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었다. 그러나 페론주의자들이 현금 살포식 복지정책을 남발하면서 아르헨티나는 한 세기 만에 수렁에 빠졌다.

    퍼주기식 경제정책은 인플레이션을 불렀고, 살인적인 물가와 경제 위기는 상점 약탈 등 극심한 사회불안을 야기했다. 생활고로 인구 10명 중 4명은 빈곤층으로 전락했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밀레이 당선인은 현재 18개인 정부 부처를 최대 8개로 줄이는 안도 제시했다. 정부 지출을 획기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밀레이 당선인은 장기 매매 합법화, 지구 온난화 이론 배격 등의 다소 과격한 공약도 내놓았다. 다만 중도파 포섭을 위해 일부 관련 공약을 다듬거나 속도를 조절할 가능성은 있다.

    밀레이 당선은 아르헨티나 외교에서도 변화를 예고한다. 밀레이 당선인은 중국, 브라질, 메르코수르(MERCOSUR, 공동시장을 추진하는 아르헨티나·브라질·우루과이·파라과이 등 남미 4개국) 등과의 교역에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해 왔다. 중국에 대해선 "공산주의자들과 거래하지 않을 계획"이라며 공개적으로 반중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 협력 등 전임 정부의 방침에 수정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 ▲ 나랏빚.ⓒ연합뉴스
    ▲ 나랏빚.ⓒ연합뉴스
    일각에선 이번 아르헨티나 대선이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고 지적한다.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 정책은 선거철마다 퍼주기식 '표퓰리즘'으로 일관했던 문재인 정부의 확장적 재정운용과 닮았다. 기본소득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주장하는 기본소득·기본대출 등 이른바 '기본 시리즈'와 일맥상통한다. 민주당은 내년도 예산안 심의과정에서 확장 재정을 주장하며 정부를 압박하는 중이다.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지역사랑상품권(지역화폐) 예산을 수천억 원 편성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등 소위 '이재명표 예산' 확대에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의 지출규모 증가율(2.8%)을 낮은 수준으로 통제하고 재정준칙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물가안정을 위해 섣부른 통화정책 완화를 지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난 9일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11월 재정동향'을 보면 지난 8월 말 현재 나랏빚(중앙정부 채무)은 1099조 원으로 집계됐다. 나랏빚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윤석열 정부에서 부담해야 하는 이자지출 비용만 5년간 115조 원을 웃돌 거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