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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7일자 오피니언면 '경제 초점'란에 이 신문 박정훈 경제부장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삼성전자의 기술력을 겁낸 미국이 세계전략 차원에서 ‘삼성전자 사냥’에 나선다. 골드만삭스며 거대 자본을 동원해 55%의 지분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이 지분을 들고 삼성전자 경영진을 찾아간 기업 사낭꾼들. 경영권을 내놓으라고 최후 통첩을 던지는데….
몇 년 전 베스트셀러가 됐던 김진명씨 소설 ‘바이 코리아’는 삼성전자의 적대적 M&A(인수합병)라는 흥미진진한 소재를 다루었다. 주제는 기술 민족주의, 즉 ‘기술을 가진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다. 과잉 발산된 내셔널리즘이 요즘 말로 ‘오버’하는 대목도 있으나, 시종 긴박한 전개로 기자도 단숨에 읽어내려간 기억이 난다.
지난주 금산법(금융산업구조개선법) 개정안이 국회 통과되는 것을 보고 이 소설을 떠올렸다. 이 법안의 사실상 타깃이 삼성이고, 삼성의 계열사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법 통과를 신호로 삼성의 M&A 가능성을 둘러싼 논쟁도 다시 불붙었다. 삼성과 재계는 이 법 때문에 삼성이 더욱 취약한 먹잇감이 됐다는 ‘먹이론(論)’을 펼친다. 반면 법개정을 주도한 여권이나 시민단체 쪽에선 “엄살 떨지 말라”며 ‘엄살론’으로 맞받아친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일본 쪽 투자자들 사정에 밝은 일본인 저널리스트 A씨에게 질문을 던졌더니 꼭 ‘엄살’만은 아닐 것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외국인 주주 입장에서 꼭 이건희 회장이라야 할 이유는 없어요. 삼성전자의 실적이 워낙 좋으니까 가만 있는 거지. 실적이 안 좋다면 외국인 주주들이 반(反)경영진 쪽으로 돌아설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지요.”
삼성 측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은 다 합쳐 16%에 불과하다. 49%를 보유한 외국인 주주 중 30% 정도만 단결하면 경영권을 공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올봄 KT&G 주총의 표 대결 때 칼 아이칸은 35% 의결권을 확보했었다. 삼성전자에서도 30%쯤 모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 대목에서 ‘먹이론’ 진영이 그것 봐라 할지 모르나 환호하긴 이르다. 설사 외국인들이 단결해 공격하더라도 삼성에겐 비상(非常)의 방어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삼성전자는 7조원 규모의 보유 현금을 동원해 자사주(自社株)를 매입, 대항할 수 있다. 핵심 인재들을 다른 계열사로 빼돌려 기업가치를 뚝 떨어뜨리는 방법도 있다.
무엇보다 한국민의 애국심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다. 외국인이 삼성전자를 공격한다면 국내 여론의 격렬한 저항에 부닥칠 것이 틀림없다. 아마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처럼 ‘삼성전자 주식 사기 운동’이라도 펼쳐질지 모른다. 세계 1등 기업 삼성전자에 대해 한국민이 갖는 자부심과 애정은 KT&G와는 차원이 다르다.
경영권 공격에 가담한 외국계 은행·증권·보험사의 국내 지점 앞에선 매일같이 시위가 벌어질 것이다. 이들 금융기관은 고객 보이콧으로 한국 내 영업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 설사 외국인 사냥꾼이 이런 난관을 극복하고 삼성전자 M&A에 성공하더라도 한국 안에서 정상적으로 기업활동을 벌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단, 이런 방어 시나리오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 있다. 삼성 경영진이 지금 같은 세계 1등의 초일류 경영을 계속하는 것이다. 만일 경영이 부진하거나 불투명한 스캔들이라도 터진다면 국민들의 ‘애국심 카드’는 보장되지 않는다.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지켜주는 것은 법제도도, 2%에도 못 미치는 이건희 회장의 지분도 아니고, 경영진의 ‘좋은 경영’ 그 자체인 것이다.
소설 ‘바이 코리아’는 이건희 회장이 애국지사들 도움으로 생물 반도체 기술을 확보,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기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고 이 회장 영웅화(化)에 동조할 생각도 없지만, 메시지는 실로 공감이 간다. 결국 경영진 하기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