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미국 디지털 TV 시장에서 한국산 TV가 지난해 일본 업체들을 누르고 사상 처음으로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시장 조사기관 NPD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내 디지털TV 시장의 수량 기준 업체별 점유율은 삼성전자 26.1%, 소니 14.5%, 도시바 7.5%, 파나소닉 7.2%, LG전자 6.6% 순이었다. 톱(TOP) 5에 2개 한국업체(삼성-LG)와 3개 일본업체(소니-도시바-파나소닉)가 포진했지만 점유율 합계로는 32.7% 대 29.2%로 한국 업체가 크게 앞질렀다. 

    금액 기준으로도 지난해에는 39.6% 대 35.4%로 한국업체가 우세했다. 금액 기준 업체별 점유율은 삼성전자 33.4%, 소니 20.9%, 파나소닉 9.0%, LG전자 6.2%, 도시바 5.5% 순이었다. 

    삼성전자의 미국 디지털TV 시장 점유율 1위에 1등 공신 역할을 한 크리스털로즈LCD TV ⓒ삼성전자
    일본은 2007년까지 점유율과 금액면에서 항상 한국에 앞섰지만 지난해 마침내 한국에 역전을 허용했다. 한국이 미국 디지털 TV 시장 1위로 우뚝 선 것은 우리나라에서 첫 TV가 만들어진 지 42년만의 쾌거다.

    한국이 처음 흑백 TV를 만든 것은 금성사(현 LG전자). 금성사가 66년 TV를 처음으로 TV를 생산한 뒤 70년에는 삼성전자공업(현 삼성전자)도 흑백TV 시제품을 생산했다. 

    이들 회사가 텔레비전을 첫 생산하던 60년대 후반은 한세대 뒤 세계를 석권할 한국 전자산업이 태동한 시기였다. 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진행해 오던 박정희 당시 정권은 68년 '전자공업 종합 5개년 계획'이란 것을 만들어 한국 전자산업 발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변변히 끼니도 때우지 못하던 한국에서 전자산업이 성공할 수 있을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막 출발하려던 '세계전자 공업'이라는 기차의 맨 끝칸에 과감히 올라 탄 셈이었다. 

    1977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무역진흥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우수전자제품들을 점검하고 있다. 박 당시 대통령은 68년 전자공업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해 한국전자산업 발전에 초석을 마련했다. ⓒ연합뉴스

    다음은 한국 전자산업의 태동기 상항을 설명한 지난해 어느 신문의 기사 내용.

    '전자공업 5개년 계획’을 보도한 1968년 8월 2일자 조선일보 ⓒ조선일보
    "요 쪼매난 것이 손가방 하나면 몇 만 달러가 된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면직물밖에 수출하지 못하고 있으니…. 김 박사, 우리나라도 전자공업을 육성하고 싶은데 도와 주시오!" 

    1967년 9월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미국 컬럼비아대 전자공학과 교수 김완희(金玩熙)를 청와대로 불러 트랜지스터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김완희는 세계를 뛰어 다니며 복명(復命)에 몰두했고, 마침내 1968년 8월 1일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조사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내놓았다. "국내에서 진득하니 독자 기술을 개발하면 늦고, 어떻게든 선진 기술을 도입해 수출 제품을 개발해야 합니다. 거국적인 지원으로 단기간에 전자공업을 육성해야 합니다." 다음 날 아침 조선일보는 '전자공업 종합 5개년 계획 대통령 재가(裁可)'란 내용으로 이날의 보고 내용을 보도했다. 

    이후 한국의 전자산업은 급물살을 탔다. 1966년 처음으로 국산 TV(사진 아래)를 만들었던 금성사(현 LG전자)가 선두주자로 나섰고,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타격을 입었던 삼성도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해 경쟁체제에 들어갔다. 1965년 180만달러였던 전자산업 수출액은 1976년 10억달러를 넘어섰으며, TV와 라디오, 집적회로, 콘덴서, 녹음기, 브라운관 등이 주요 품목으로 떠올랐다. 1974년에는 한국반도체주식회사가 설립돼 미래의 '국가적 텃밭'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1969년 제1회 전자전시회를 둘러본 박정희는 고민에 빠졌다. 과연 한국에서 전자산업이 되겠느냐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유행이 다 지나서 안 팔리면 어떡하지…?" 옆에 있던 과학기술처 장관 김기형(金基衡)이 말했다. "각하, 전자산업은 두뇌활동을 전자기구로 표현하는 것이라서 스타일이 바뀌어도 계속 발전할 겁니다. 몇 년 안에 시·도지사가 집무실에서 낮잠 자는 것까지 청와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 그래?" 

    훗날 김완희는 이렇게 회고했다. "1960년대 말 세계의 전자공업은 막 출발하려던 기차와 같았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기차의 속도는 빨라졌고 이제 후진국들이 아무리 흉내내며 따라오려 해도 불가능하게 됐다. 우리는 막차 맨 끝 칸을 탔던 것이다." (조선일보 2008년 7월8일 '전자 입국(立國)… '막차 맨 끝 칸'에 올라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