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절반의 병탄: 을사강제조약(하)
군사협력 의무화 <한일의정서> 강요
강대국으로부터 한국지배권을 인정받은 일본에게 남은 과제는 한국을 요리하는 것이었다.
미국이나 영국에 대한 저자세 외교적 노력과 달리, 한국에 대하여 일본이 취한 행위는 군사력을 앞세운 억압과 위협이었다.
전쟁을 시작하면서 하야시 곤스케(林勤助) 특명전권공사는 한국의 ‘군사적 협력’을 의무화하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했다. ‘군사적 제압’ 아래서 이루어진 이 <의정서>에 의하면 일본은 한국 내 어디서든지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점유”할 수 있게 됐다.
조약체결 직후인 3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위문특파대사라는 직함으로 천황의 친서를 가지고 한국을 방문했다. 전쟁 중 나타날 수도 있는 한국의 독자적 행동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명목은 친선이지만 실제로는 위협이었다.
이토는 세 번 고종을 알현했다. 3월 20일 두 번째 알현에서 그는 한국이 “일본과 존망을 함께해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협력한다면 일본은 최대한의 동정을 표명해 영구히 한국의 산과 강이 횡포한 열강의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도록, 즉 일본 자신의 존망과 마찬가지의 아픔으로 순치보거의 관계로 함께 대처”하겠다고 했다. 한국의 보호국화를 시사하고 있는 대목이다.
'보호국' 방침 공식화...외교-재정권 박탈
일본 정부는 원로회의와 내각회의를 거쳐 5월 31일 <대한(對韓)방침에 관한 결정>을 확정했다. “제국은 한국에 대해 정치·군사상 보호의 실권을 장악하고, 경제적으로 가일층 일본의 이익을 도모한다.”라고 시작하는 이 <결정>은 한국에서 일본이 취할 군사, 외교, 교통, 통신, 척식의 기본정책을 확정하고 있다.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다는 정부의 방침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 <결정>에 기초하여 8월 22일 한국은 일본이 추천하는 일본인 재정고문과 외국인 외교고문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한 <한일협약>에 도장을 찍었다. 외교와 재정권을 빼앗긴 한국은 이미 주권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1905년 4월 8일 일본 내각은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고, 한국의 대외관계를 장악”하기 위한 “보호조약 체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10일 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그리고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0월 27일 내각은 보호권확립과 실행을 위한 구체적 방법과 절차를 확정했다. 즉 외교권 박탈,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에 사전 통고, 11월초 실행, 조약교섭의 전권을 하야시 공사에게 위임,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한국주둔군사령관에게 협력명령, 일본군대의 서울집결, 한국이 끝까지 동의하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보호권 설정을 한국에 통고한다는 단계적 수순과 구체적 방침을 확정했다.
고종황제 "한국이 아프리카 열등국이란 말이오?"
치밀한 모든 준비는 완료됐다. 집행만이 남았다. 일본 정부는 협상대표는 하야시 곤스케 공사로 하지만, 한국 황제를 설득하고 압력을 가하기에는 함량미달이었다. 보다 거물급 인물이 필요했다. 이미 고종을 몇 차례 알현했고, 일본 정계의 최대 실력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또다시 특파대사로 임명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9일 한성에 도착했다. 10일 경운궁의 수옥헌(漱玉軒)에서 고종을 알현하고 천황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15일 다시 하야시 공사를 대동하고 고종을 알현하여 외교권 위임을 핵심으로 하는 협약 초안을 제시했다. 이토가 귀국하여 천황에게 제출한 복명서(<韓國特派大使伊藤博文復命書>)에는 고종황제와의 대화록 (伊藤特派大使內謁見始末)이 들어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종은 먼저 그동안 자신은 “나의 신료들에게 의존”한 것 이상으로 이토를 신뢰하고 의존했다는 뜻을 전하면서, 초안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경이 제시한) 이번 사명의 기초, 소위 외교위임과 같은 것은 (한국이) 형식조차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서, 필경 이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관계와 같은 것이오? 아니, (한국이) 최열등국, 예컨대 열강이 아프리카를 대하는 것과 같은 지위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오?”
이토는 고종이 협약의 참 뜻을 오해하고 있고, 협약의 본뜻은 한국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다시 설명했다.
“히로부미(博文)는 폐하의 특별한 대우에 늘 황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역시 폐하의 황실과 나라를 위해서 제안하는 것입니다. 폐하를 속이고 일본의 이익만을 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헝가리에는 황제가 존재하지 않고, 오스트리아가 통치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 두 나라에는 각각 군주가 있고 독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프리카에 이르러서는 독립국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를 일한관계에 인용하고 비교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치 않습니다. 다만 동양화란(東洋禍亂)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본은 한국의 위임을 받아 외교를 담당할 뿐이고, 그 외의 모든 국정은 지금과 같이 한국 스스로가 이끌어 가게 될 것입니다.”
고종 "형식만이라도 권한 남겨주오" 애원 되풀이고종은 비록 그것이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고 싶었다.
이토에게 다시 청했다.
“그 내용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하더라도 거절하지 않겠지만, 다만 형식적으로라도 한국에 권한을 남겨주기 바라오. 이를 위해 경의 알선과 진력을 기대하오. 짐의 이러한 절실한 희망에 경의 충분한 고려를 더하여 귀국의 황실과 정부에 전달한다면 다소 변경을 이룰 수 있지 않겠소?”복명서는 “이와 같은 폐하의 애소적(哀訴的) 정실담(情實談)이 여러 차례 반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토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이 결정은 일본정부가 모든 것을 고려하여 내린 것입니다. 추호도 변경할 여지가 없는 확정안입니다...폐하의 결정만 남았습니다. 이를 수락하든 거부하든 이는 폐하의 뜻입니다. 만일 폐하가 거부해도 그대로 시행하기로 한 것이 일본의 결정입니다. 거부할 경우 한국의 지위가 대단히 어려워 질 것입니다. 한층 더 불리한 결과를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사태의 심각성과 더 이상 이토와의 대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고종은 최종결정을 신하와 국민의 뜻에 미루었다.
“짐도 이처럼 중대한 일을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소. 짐이 정부신료에게 자문[諮詢]을 구하고 또한 일반인의 의향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오.”
이토 "국민선동하여 반항하면 안됩니다"이토는 냉담한 태도로 답했다.
“폐하가 정부 대신들의 자문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저 역시 오늘 폐하의 결정을 요구하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일반인민의 의향을 살핀다는 것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奇怪千萬]일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은 헌법정치가 아닌 모든 것을 폐하가 결정하는 군주전제국이 아닙니까? 인민의향 운운 하지만 실은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하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고, 그 책임이 폐하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이미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일본 군대가 탐지하고 있습니다.” 고종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새벽 2시반 조인..."대궐은 총칼의 숲이었다"
조약은 18일 새벽 2시 반에 조인됐다. 그때까지 이토 대사, 하야시 공사, 하세가와 사령관은 각각 정부의 대신들을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회동하고 협박, 위협, 회유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특히 17일 이토가 하세가와 사령관을 대동하고 입궐하여 대신들을 하나씩 불러 개별적으로 면담할 때 일본 군대가 궁중의 안팎을 포위하여 긴장감을 고조시켰다.『매천야록(梅泉野錄)』은 당시의 분위기를 “일본군들이 대궐에 들어와 철통같이 수옥헌을 포위하고 총칼을 수풀처럼 늘어세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영국의 <데일리 메일(Daily Mail)> 동아시아 특파원으로 현장을 지켜본 멕켄지(F.A. McKenzie)에 의하면 “하루 종일 일본군 총검의 덜거덕거리는 소리만 귀에 쟁쟁했다”고 한다. 한 나라의 특사가 군대를 이끌고 궁중까지 들어와 국왕과 대신을 위협하면서 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의 생명이 다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토, 300만원 가져와 뿌려..."을사오적은 갑자기 부자 되다"일본에 포섭된 이지용(李址鎔), 이근택(李根澤), 박제순(朴齊純), 이완용(李完用), 권중현(權重顯) 등 다섯 대신이 조약체결에 찬성했다. 그들은 한국역사에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기록되고 있다. 『매천야록』은 그들의 ‘매국’을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박문(博文)이 이번에 올 때에 금 삼백만원을 가지고 와서 정부에 두루 뇌물을 돌리며 조약을 성립시키려했다. 여러 역적 가운데 조금 약은 자는 그 금으로 농장을 넓게 마련하고 시골에 돌아가서 편히 쉬었으니, 권중현 같은 자가 그렇게 하였다. 근택과 제순 등도 또한 이 금으로 인해서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껍질만 남은 나라 "대한제국은 이날로 멸망하였다"
조약의 실체
“한국의 부강지실(富强之實)이 인정될 때까지” 조약이 유효하다는 소위 ‘을사보호조약’(한일협약, 또는 제2차한일협약)은 5개 조문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의 외교사무 일체를 일본이 감리지휘 한다는 것, 한명의 통감이 황제 직속으로 서울에 주재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 황제의 안녕과 존엄을 보증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이는 다만 외교권의 박탈이 아니었다. 장지연(張志淵)이 “오 슬프고 분하다. 우리 2천만 노예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기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작스럽게 멸망으로 끝나는 것인가. 아 슬프고 슬프도다. 동포여, 동포여”(是日也放聲大哭)라고 곡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조약은 민족사의 종식을 의미하고 있었다.
'국책 2000년 숙원 달성" 일본천황은 이토를 치하조약체결이 완료됐다는 소식이 도쿄정부에 전달되자 외무대신을 겸하고 있는 수상 가츠라 다로(桂太郞)는 19일 이토에게 “각하의 진력으로 협약이 속히 체결된 것을 경하 드리며 [정부는] 이에 깊이 감사”드린다는 전문을 보냈다. 다음날에는 “짐은 경의 깊은 노고에 크게 치하[嘉賞]”한다는 천황의 ‘칙어(勅語)’가 전달됐다. 이어서 20일 일본정부는 미국과 영국을 위시한 모든 나라에게 조약사실을 통보하고, 한국과 관련된 일체의 외무업무를 일본이 담당한다는 것을 알렸다. 이로써 일본은 하야시 공사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동안 고심해 온 대한국책 2000년의 현안을 완성”했다.
고종 "통감으로 다시 와주기 바라오" 이토에게 당부
업무를 완수한 이토는 29일 귀국길에 오른다. 그 전날 귀국인사차 궁중을 찾아온 이토에게 고종은 “경의 머리를 보니 흰 머리칼과 검은 머리칼이 반반씩이구려. 백발은 그동안 일본황제폐하를 보필함에, 한 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충성을 다한 징표이겠지요. 나머지 검은 머리칼이 희어질 때까지 짐을 위하여 마음을 열고 성심성의껏 힘을 다해주기 바라오[啓沃의 勞]”라고 정담을 보냈다. 그러면서 고종은 “짐은 경이 통감으로 다시 서울에 오기를 간절히 바라오.”라고 당부했다. 을사강제조약 조인 과정에서 협박과 수모를 당한지 열흘 후다. 고종의 의도가 무엇인지 가름 할 수 없다. 고종의 당부가 외교적 발언일까? 모르는 사람이 통감으로 오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토가 낫다는 판단에서일까? 아니면 마음 한 구속에 이토에 대한 어떤 친근한 정이 있어서일까? 그러나, 뒤에서 볼 수 있듯이, 고종은 이토에게 ‘啓沃의 勞’를 당부한지 16개월 만에 그의 강압에 밀려 결국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1905년 11월 을사조약 성공을 기념하며, 이토 히로부미(오른쪽)와 하야시 공사.
"병탄 완결할 사람은 이토뿐" 한국통감으로 부임
일본정부는 12월 20일 통감부의 관제를 발표하고 21일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으로 임명했다. 한국은 물론 서양제국을 상대하면서 ‘병탄’이라는 막중한 통감의 임무를 수행해낼 수 있는 인물은 경력이나 능력으로 이토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데 이론이 없었다. 이토는 한국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지휘권 장악을 조건으로 통감직을 수락했다. 통감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군부의 간섭이나 관여를 차단하겠다는 뜻이다. 일본군은 천황 직속으로 다른 문민은 지휘할 수 없는 특수한 영역에 존재했다. 실질적 통수 책임자인 참모총장이 천황의 칙명을 받아 지휘하게 돼있다. 일본군이 군부의 영역을 벋어나 문민의 지휘를 받게 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토에게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것은 한편으로는 한국병탄의 과업이 그만큼 중대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토의 위세가 당당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