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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일류 조경가라고 생각하곤 했다. 퇴청 후에도 창안하고 메모하고 그림을 그려 다음날 아침에 지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정렴 비서실장의 회고이다.
1975년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대구로 내려갈 때 박 대통령은 고속도로 주변 구릉과 절토부분의 조림 및 조경에 대해 24건의 지시를 내렸다. 거리로 따져 9km당 1건, 매 6분마다 1건씩 지시를 내린 셈이었다. 각종 대규모 사업을 둘러보던 박정희의 시찰⋅지시⋅확인은 조경 프로젝트의 조사⋅계획⋅설계⋅감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직접 청와대 정원수의 가지치기도 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가지치기를 즐겨 집무실 서랍 속에 전정가위를 항상 넣어 두고 있었다. 1979년 11월, 시해사건 직후 유품을 정리할 때 전정가위가 서랍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
1961년의 우리나라 산은 절반 이상이 민둥산이었다. 그러니 댐이라고 할 만한 것도 몇 개 되지 않았다. 일제 하에 준공된 화천, 청평, 보성강 댐과 해방이후 건설된 괴산댐이 전부였으며, 저수량은 화천댐(6억 6000만 톤)을 제외하면 1억 톤급도 안 되는 소형 댐들이었다.
헐벗은 산하를 푸른 강산으로, 상전벽해의 기적을 이룬 이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1967년 박 대통령은 산림녹화를 위해 농림부 산림국을 산림청으로 독립시켰다. 그러나 농림부장관은 당면한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시급하였으므로 산림청의 산림녹화사업에까지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보다 못한 박 대통령은 1973년 1월 15일, 제3대 산림청장에 손수익을 임명한 뒤 2월 23일의 비상 국무회의를 거쳐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해버렸다. 그 만큼 산림녹화에 관한 의지가 집요했던 것이다.산림청이 내무부로 이관되자 지방행정조직과 경찰행정조직을 활용하여 산림보호를 강화할 수 있었다. 종합적인 산림의 보호 관리는 도지사와 시장 ⋅군수가, 보호단속은 경찰서장이, 기술지도는 산림공무원이 맡는 삼위일체의 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이로써 산림녹화와 보호 위주의 산림정책을 강력히 추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제 박 대통령의 집념으로 우리는 푸른 숲을 가진 나라, 풍요로운 물을 가진 나라가 됐다. 그는 왜 국토녹화를 국정 최고 목표의 하나로 삼았으며, 어떤 수단을 동원하여 어떤 방식으로 국토를 녹화했는가? 그런 노력은 우리에게 어떤 열매를 맺게 해주었는가?
‘박정희가 이룬 기적, 민둥산을 금수강산으로’는 이같은 질문에 답해준다.
한 위대한 초인이 헐벗은 산하를 금수강산으로 바꾼 이야기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기파랑 펴냄, 362쪽, 1만 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