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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은 혁명이었다
-거시사적 비교를 통한 건국의 재인식을 위하여-이인호(서울대서양사학과 명예교수)
1. 문제의 제기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전환점을 찾는다면 100년 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겼던 일 말고 다른 더 큰 일을 생각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우리 민족이라면, 그리고 역사가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지식인 사회에서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에 관한 합의는 그것으로 끝나는 듯하다. -
1910년 다음의 전환점으로는 1945년 8월 15일을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연합군에 대한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 민족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풀려났고 우리의 환희와 기대는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가 일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광복의 동의어는 아님이 곧 드러났다.
해방은 독립된 민족국가의 회복이 아니라 38선을 경계로 하는 민족과 국토의 분단, 이념이나 국제적 유대를 달리하는 두 개의 대치적 정치체제의 수립, 그리고 국제전으로 확대된 동족상잔의 6.25 전쟁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 의미는 많이 퇴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단과 전쟁이 얼마나 큰 비극이었던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일이고 오늘날까지도 남북한의 겨레 모두가 아직도 그 후유증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까지 같은 민족이고 같은 나라였으며 비슷한 자연적, 국제환경적 여건에 놓여있던 남과 북은 삶의 질로 볼 때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 나는 나라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무엇으로 남북 양쪽간의 그 엄청난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1948년 8월 15일 이후 더욱 분명해진 이념과 정치체제의 차이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1948년 8·15에 선포된 대한민국의 건국이 우리에게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서부터 우리 학계, 정계 내의 의견 대립은 팽팽하다.
자기나라의 건국일이 언제인가에 대해 합의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우리 한국에 대해 호의적 관심을 가진 외국의 학자들이 오히려 놀란다.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과 정부 수립 선포를 우리 민족의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공화국을 탄생시킨 사건으로 크게 기릴 것이냐 아니면 분단을 고착시킨 사건으로 부정적 평가를 내릴 것인가 하는 두 개의 상반된 정치적 입장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미시사적 연구에서는 지난 60 여 년 간에 많은 진척이 이루어졌으나 거시사적 해석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평행선을 그으며 달리는 좌우의 열차가 접점을 찾을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결국 누구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가 하는 데서 빚어지는 차이이기 때문에 사실이 밝혀진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일 강제병합이 우리에게는 침략인 반면 일본에게는 진출이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우리 역사의 방향과 우리의 역사적 운명을 좌우한 핵심적 사건으로 크게 기려야 할 일이지만 구소련이나 북한의 주도세력의 관점에서 본다면 재앙이었을 것이 당연하다.
대한민국 국민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를 주역으로 놓고 역사를 보자는 이른바 통일사학이라는 입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국토와 민족이 분단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두 개의 반목하는 정권이 역사적 실재로서 60년 이상을 작동해 왔다는 사실보다는 민족통일을 향한 염원이 낳아 놓은 가상의 통일국가에 초점을 맞춘 사고의 틀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의한 검증이나 엄정한 학술적 잣대에 의한 평가의 대상이 될 수는 없고 하나의 정치적 현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나. 분단극복이라는 목적에 절대적 가치를 두다 보면 과거의 진상을 알아내려는 학자적 동기 보다는 미래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현실화 시키려는 정치적 욕망이 앞서기 때문이다.
분단극복 역사학이라는 것은 우리민족의 현대사에는 남한의 역사와 북한의 역사, 그리고 그 두 나라간의 관계의 역사가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사실에 기초한 역사쓰기라면 크게 대조되는 오늘의 남북한의 현실을 조명하고 그러한 차이의 원인을 찾아 낼 수 있어야 할 것이지만 대한민국을 단순히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려는 시각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역사는 과거의 재현이 아니고 선별적 재구성일 뿐이라는데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던지는 질문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대답은 달라질 수밖에 없고 각기 관심이 다를 수밖에 없는 각 세대는 서로 다른 역사쓰기를 할 수밖에 없다.
유럽식 계몽주의 전통에서 나온 인간이성에 대한 신뢰가 무한으로 치닫던 유럽 중심적, 정치 중심적 사고가 학문분야로 새로 태동하는 역사학을 지배했을 때에는 랑케의 “일어났던 대로” 역사를 써야 한다는 주장을 역사학자들이 편안하고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고 “역사 없는” 인간 군이 존재한다는 헤겔 유의 가정이 학계에서도 통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의 진척에 따라 영웅중심, 승자중심의 역사 서술은 넓은 의미의 사회사, 일상생활사로 보완되었고 탈 유럽중심주의적 사고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역사가 뒤집히는 일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다.
특히 세계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고 러시아를 비롯한 전 공산권지역에서 역사교과서를 다시 쓰는 현상이 목도되면서는 “현재의 역사는 과거의 정치다.”라는 말보다는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정치다.”라는 말이 더 설득력을 가지는 듯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史實)을 무시하거나 학계에서 축적되어온 지식과 체험의 총체나 방법론적 지혜를 모두 버려도 된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학문에는 국경이 없으며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행동하는 존재이며 인간사회라면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준수해야 할 가치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묵계가 없이 개별적 사실만의 확인으로 역사가 쓰여 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지식인 세계에서는 재구성되는 역사의 힘을 통해 앞으로 만들어질 역사를 지배해 보겠다는 욕망에 넘쳐 과거의 사실(史實)을 조작하거나 또는 역사 기술에서 인간행태에 관한 보편적 이해를 무시하고 사료(史料)적 가치로서의 신빙성에 대한 검증이나 사안의 경중에 관한 균형감각 없이 사실(史實)을 자의적(恣意的으로 선정하고 의미를 침소봉대함으로써 역사를 보는 시각을 흐려 놓는 일이 너무도 거침없이 자행되어 왔다.
공산주의 세력과 대결하며 나라를 지켜낸다는 명목으로 학문의 자유까지 탄압했던 과거 군사 정권들의 태도나 ‘역사 바로잡기’라는 구실 아래 냉정한 학자적 자세를 갖추었음을 검증받지도 않은 사람들이 대거 참여하며 역사 뒤집기의 정치적 굿판을 벌인 것은 진원지가 좌우 어느 쪽이었든 다 같은 범주에 속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 또는 다른 사적 동기에서 점점 더 추상화되어 가는 듯한 역사서술의 큰 틀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일이 허용되면 역사학은 인간적 진실을 포착하는 일에서 자기들이 “허구”라고 무시 해왔던 문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도전에 맞서기가 어려워 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역사적 수정주의의 궐기는 세계적인 추세이고 학문적으로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던지는 질문이 달라질 수 있고 접근 가능한 사료들이 새로워졌다는 이야기지 사실(史實) 자체를 무시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수정주의는 등한시되었던 많은 영역이나 주제에 불을 밝힘으로써 역사의 이해를 깊게 하고 나아가서 정치적 응어리를 풀어내는데도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반면에 기존의 학문적 성과와 역사해석의 틀을 엄격한 학문적 검증의 노력도 없이 방기하고 뒤집어 놓으려 함으로써 학문의 진정한 발전을 가로 막고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비판도 모면할 수 없다.
그 단적인 예가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이 어떻게 해서 지금 남쪽에서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자유와 번영을 누리면서도 불만에 들끓고 있고, 반면에 북쪽에서는 절대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며 국경을 불법으로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해 설득력 있는 역사적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드러난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나라인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 관해 역사학자들이 사회과학자들과 대화를 하지 못하고, 국사학 교수들의 입장이 서양사 학자들의 견해와 절충될 수가 없다면 이해관계의 충돌이 훨씬 심한 정치인들 사이에서 역사에 대한 합의점이 나올 것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최근 몇 년 사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의 선포를 민주공화국의 탄생으로 크게 기려야 한다는 입장에 반대하는 입장 가운데는 통일지상주의를 내세워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체제라고 규정하려는 사람들과는 뉴앙스를 약간 달리하는 사람들도 있다.
광복회, 일부 야당 국회의원, 한시준 단국대 교수 등으로 대표되는 그들은 1948년 대한민국정부선포를 건국으로 보는 것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세력을 무시하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친일적 책동이라는 것이며 “1910년에서 1947년까지 한반도에 주인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주인이 없는 영토에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명칭과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적 실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임시정부”와 주권을 행사하는 “정부”의 차이를 무시할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주권에 대한 개념이 없고 “나라 없는 백성”에서 “국민”으로 태어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한 현실적 이해가 전혀 없는 주장으로서 하나의 불행한 정치현상으로는 볼 수 있을 뿐 학문적 대응의 대상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국치일 이래 지난 100년간의 우리 역사의 4분의 3을 실제로 살아왔고 세계사, 그 중에서도 러시아사를 전공하는 사람인 필자가 볼 때 우리 현대사에서 1910년 이후 진정한 전환점이 있다면 그것은 1945년 해방에서 1948년 헌법제정과 정부수립 선포로 이어진 전 과정을 포함하는 대한민국 건국이었다.
그것은 시민혁명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영국혁명, 미국독립혁명, 프랑스혁명이나 사회주의 혁명으로 주창되었던 러시아 혁명 등에 비견될만한 우리 역사상 유일한 혁명이요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며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우리 현대사에 대한 발표자의 해석이다.
대한민국 건국은 구한말부터 있었던 여러 가지 노력과 투쟁의 법적, 제도적 결실이었고 그 뒤에 따른 모든 사건들과 변화는 그 혁명의 이상과 이념을 내실화 하려는 노력과 투쟁의 일환이었을 뿐 그 혁명의 이념을 뒤 엎자는 또 다른 혁명은 아니었으며 1948년 전이나 후나 학술적으로 보편성을 지니는 용어로서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사건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세계를 뒤흔들었던 외국의 혁명들의 전개과정과 우리의 현대사 전개 과정의 간략한 비교를 통해 제시해 봄으로써 우리 현대사에 관한 논쟁의 테두리를 넓혀보고자 하는 것이 이 시론(試論)의 의도이다.
2. 혁명의 의미
세계사에서 혁명이라는 말은 자주 등장한다.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 산업혁명, 러시아 혁명 등 우리 귀에 익숙한 것들 말고도 유럽의 전 식민지들에서 일어난 독립혁명들이 있고 중국의 혁명, 멕시코 혁명, 이란 혁명 등도 두드러진 사례들로 꼽힌다. 우리나라의 비판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혁명”이라면 무조건 긍정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으며 세계 공산권이 무너지기 직전까지는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희구가 만만치 않았다. 우리 역사에서 의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큰 사건들에는 서로 다투어 가며 무조건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려 했다. “동학혁명”, “4. 19 혁명”, “5.16 혁명”, “광주 민주화 혁명”등 수많은 사건들이 혁명이라는 꼬리표를 달기도 하며 그 중에서도 “4.19 혁명”은 이미 교과서적 어휘가 되었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1934년에 초판이 나온 후 고전이 된 Crane Brinton의 혁명 비교연구, [혁명의 해부] 덕분에 혁명에 관한 연구는 맑스주의 뿐 아니라 비 맑스주의 계열 학자들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이제 4세대 연구자들이 나올 정도로 결실이 크지만, 이 글에서 혁명에 대한 학술적 정의를 시도할 여유는 없다. 다만, 상식 선에서 혁명으로 이해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우선 혁명은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짐을 뜻하며 보다 나은 방향으로의 획기적 진전을 목적으로 한다.
산업혁명은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의 변환이 가져온 괄목할만한 변화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산업화의 과정은 일회성의 변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가속화 되며 변화를 낳는 것을 깨닫게 된 후부터는 경제에 관해서는 혁명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기도 한다.
정치적 현상으로의 혁명은 권력 주체와 권력 구조의 급격한 교체를 핵심으로 한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힘으로 분출되면서 새로운 권력 주체의 등장 가능성이 열리고 구질서가 무너진 후 대체 권력의 형성과정에서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지만 대체로 혁명 발발 훨씬 전부터 혁명을 위한 준비를 해 온 세력이 권력 장악에 유리함은 당연하다. 현실로의 생산 구조와 기존의 권력 구조 간에 벌어지는 심각한 괴리가 현실을 타파하려는 욕구 분출의 깊은 원인이 된다.
브린톤은 혁명을 질병에 비유하며 병세가 잠복해 있다가 발발하고 나면 일단 악화되었다가 위기를 거친 후 안정을 되찾게 되면 결과적으로 사회전체의 체질이 강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연구는 초기의 시민혁명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혁명이 자연적인 전개과정처럼 묘사되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의 후진국 혁명에 초점을 맞춘 후기 연구들에서는 혁명의 기획적 측면이 더욱 크게 부각되기도 한다.
경제발전의 경우에서나 마찬가지로 정치 혁명에서도 후진국들은 일종의 후진의 학습 “프리미엄” 같은 것을 누리게 되면서 혁명이 계획되고 의도적으로 준비되는 측면이 더욱 강화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동시의 대중참여의 폭이 넓어진다. 정치발전 과정에서도 경제발전 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압축성장” 또는 “비약”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고 이는 이미 레닌이나 트로츠키에 의해서도 주목되었던 바이다.
현실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혁명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긴 준비과정이 있다. 자체 수정 능력이 없는 정치 체제하에서 경제를 움직이는 생산세력과 권력구조 사이의 간극이 심화되면 대체 이데올로기가 탄생한다. 그것이 이론으로 정립되고 대중화되는 긴 과정이 있고 의식화된 대중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폭력적 대치가 불가피하게 된다. 전 근대 사회에서도 권력주체의 폭력적 교체는 빈번했고 밑으로부터의 반란은 도처에서 항시 일고 있었지만 그런 현상들에 모두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 것은 기득권 집단과 도전세력 간에 힘의 불균형이 상존하던 곳에서는 그러한 반란의 시도가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진압당하고, 설사 권력 주체의 인적 구성에 변화가 생긴다 해도 지배구조의 성격에는 현격한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말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대체로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현상이고 민주주의의 탄생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그런 면에서 영국혁명은 혁명으로서는 과도기적 현상이고 예외였다고 볼 수 있다. 시민의 기본 인권을 보장하는 인신보호령과 권리장전의 바탕 위에서 양당정치로 운영되는 의회가 주권체(主權體)임이 확립되는 과정은 무혈의 “명예혁명”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초기에는 찰스 1세의 처형 같은 유혈극이나 크롬웰의 독재 같은 현상도 일어났었다. 다만 영국의 경우에는 평등을 요구하는 일반 서민층이 아니라 1215년 이래 줄 곳 납세자의 정치 참여권 보장을 요구해온 토지귀족이 혁명의 주도권을 잡았다가 참정권의 점진적 확대를 통해 민주주의 제도가 수립되었기 때문에 혁명에서 대중의 참여는 제한되었고 대중폭력의 동원과 그에 수반되는 유혈이 최소화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17세기 영국의 정치적 변화과정을 혁명이라 부르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혁명”하면 대중 봉기를 우선 조건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영국의 정치적 변혁 과정을 보면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의 쟁취가 혁명의 공통된 목표라고 상정할 때 밑으로부터의 참여나 대중폭력이 혁명의 목표달성에 필수 조건은 아닐 수 있음이 드러난다.
혁명은 급격한 권력교체를 목적을 하기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강한 저항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그 때문에 혁명의 진척 과정에는 폭력의 사용이 불가피하게 되고 혁명 수호세력도 반혁명 세력 못지않은, 오히려 더 혹독한 독재로 치닫게 되며 공포정치까지도 동원된다. 크롬웰의 독재나 로베스피에르의 독재 없이 영국이나 프랑스 혁명을 생각할 수 없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공연하게 혁명 이데올로기의 골간으로 내세웠던 러시아에서는 공산당 독재와 그 압축판인 스탈린의 독재가 훨씬 더 긴 기간 계속되면서 개인숭배로까지 격화되었었다.
혁명의 성격 규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더 말할 것 없이 그 혁명의 궁극적인 성과가 어떠했고 그러한 성과를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영국 혁명, 미국 독립 혁명, 프랑스 혁명이 성공한 혁명의 고전적 사례로 평가 받는 것은 혁명이 내세웠던 이상과 이념이 현실화 되는데 혁명적 조치들이 없어서는 안 될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혁명기가 지난 후에도 혁명의 이상은 포기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영국의 권리 청원과 권리장전, 미국의 헌법, 프랑스의 인권선언은 수차례의 보완과 개정이 있었을망정 오늘날 까지도 그 나라들의 헌법체제의 기초를 이루고 있으며 전 세계로 그 영향을 확대시켜왔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혁명 이데올로기가 표방하는 이상이 곧 바로 현실로 정착한 예는 없었다.
혁명의 이상이 구현되는 데는 오랜 시일이 걸리고 지속적 투쟁과 거듭되는 후퇴와 전진을 통해 현실이 혁명의 이념과 이상에 접근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프랑스는 1789년에 봉건제도의 폐지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으로 역사에 큰 획을 그었고 3년 후 공화국을 선포했지만 그 후로도 공화정은 공안위원회와 로베스피에르의 테러정치 국면을 거쳐 겨우 안정국면에 접어들었다. 프랑스 혁명의 기세는 국외로 까지 뻗어나갔으나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등극하게 되는 역작용을 낳기도 했다. 그 후로도 프랑스에는 나폴레옹을 패망시킨 연합군의 보호 아래 왕정이 복구되었다가 1830년과 1848년 두 차례에 걸친 대중혁명, 단명의 제2공화국,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 체제를 경험하고 독일에게 패배 당하는 충격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제3공화국으로서 민주공화국의 기틀을 확실히 잡을 수가 있었다.
혁명의 이상이 제도적으로 정착하는데 세기 가까이 걸렸지만 대혁명으로 태어난 “프랑스 국민”의 실체와 인권선언에 담긴 이상, 곧 주권재민 사상,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 생명권의 연장으로 본 재산권의 보호를 골간으로 하는 이데올로기가 정면으로 부정된 적은 없었고 그 것이 바로 정치와 경제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프랑스 혁명은 성공으로 평가 받는 것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세계를 뒤흔든 혁명으로 러시아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신장되게 하는데 (물론 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에서처럼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지만) 촉진제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는 러시아 혁명의 경우는 아이러닉하게도 그 혁명의 본산지인 러시아와 그 혁명으로 태어났던 소비에트 정권의 영향아래 놓였던 동유럽의 옛 공산권에서는 모두 이데올로기 자체가 포기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동력으로 이데올로기와 쌍벽을 이루는 요소는 그 이데올로기로 부터 힘을 받으며 그것을 수호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는 세력의 존재이다.
미국의 경우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자 했던 청교도와 경제적 이권의 기반을 지키며 확대할 수 있었던 WASP(영국계 백인 개신교도)계의 자산층이 있었다.
프랑스에는 능력으로 사회상승을 성취했던 법복 귀족으로 대표되는 신흥 대 부르주아지 이외에도 봉건주의 철폐로 소농계급이 형성되면서 소 부르주아 층이 두터워 졌다는 것이 지적된다,
러시아의 경우는 반대로 전제체제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진 중산층의 형성도 되어 있지 못하고 정치적 참여의 경험이 없음은 물론 기본인권에 관한 의식조차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국가가 탄생했던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도시와 농촌의 프롤레타리아를 혁명주체로 부각시켰으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여건은 되어 있지 못 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결국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산당 독재와 노동착취로 전락하면서 그 혁명을 수호해 줄 대중적 기반을 새로 형성시키는데 실패했고 결국 혁명의 후계자들 스스로가 혁명의 이념적 타당성을 고집하기가 어려워졌던 것이다.
표방하는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는 혁명주체, 그리고 객관적인 경제사회적 여건 사이에 괴리가 지나치게 컸기 때문에 결국 실패로 끝났다고 볼 수 있는 급진 혁명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성공한 혁명으로 간주되는 프랑스 혁명의 경우에서도 그 혁명의 2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발표된 연구들 가운데서는 그 혁명의 불가피성 또는 타당성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았다. 곧 대혁명과 같은 급격한 유혈의 변혁을 거치지 않고도 프랑스 역사는 결국 같은 방향으로, 어쩌면 더 평화적이고 실속 있게 발전해 나갈 수 있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그런 의문은 대한민국 수립의 정통성을 묻는 질문이나 마찬가지로 가상에 기초한 정치적 관심이나 입장의 표출일 뿐 사회과학이나 역사학의 논의 범주는 벗어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건국이 타당성이 있는 일이었는가 하는, 현재 일부 우리 지식인 사회에서 일고 있는 질문은 프랑스혁명의 불가피성에 대한 의구심 보다 훨씬 더 강한 정치적 색채를 띤 것으로서 학술 논쟁을 위장한 정치 공세에 불과한 것이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개인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이 태어난 것이 옳은 일이었는가 그른 일이었는가를 묻는 일과도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이나 사회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기정사실로서의 대한민국 건국이 어떠한 경로와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던가를 사실적으로 확실하게 밝히고 그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짚어 보려고 노력하는 일이 아닌가 한다.
3. 대한민국 건국의 혁명적 성격
대한민국의 건국을 혁명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그 사건이 앞서 열거한 혁명의 여러 가지 특징들을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급격한 변화라는 잣대로 일제 강점기의 우리 사회와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우리나라를 비교해 보면 건국은 권력 주체와 권력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고 그 후 생산관계의 현격한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었음이 분명하게 들어난다. 물론 이때 말하는 “건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에서 시작되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선포로 일단락된 독립국가 수립의 전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8·15가 광복절이냐 건국절이냐 하는 논의는 학문적으로는 무의미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이 가지는 혁명적 의미는 적어도 3중적인 것이었다.
첫 째는 우리가 일제와 미군정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 재탄생하여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 주권국가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독립을 향한 온 겨레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왕조시대의 “백성”이나 일제하의 차별 받는 식민지 “신민”, 미군정 치하 “패배한 적국의 전 식민지 시민”의 처지에서 나라의 주인인 “국민”으로 승격했으며 바로 그 국민을 자유롭고 평등한 주인으로 인정하는 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는 그러한 공화국이 채택한 국가 이상과 이념이 공산주의나 군국주의 식 집산주의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고 가치로 하고 재산권을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였다는 점이었다.
이 세 가지가 다 바로 그 직전 까지 있어 왔던 정치, 사회, 문화적 현실을 완전히 뛰어넘는 획기적인 변혁이었으며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이전으로 회귀하기는 결코 불가능한 명확한 혁명적 구분선이 그어진 것이었다.
다른 나라들의 혁명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건국혁명도 오랜 시일의 준비과정을 거쳐서 이룩된 것이었다.
독립은 나라를 빼앗기는 순간부터 우리 민족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갈구요 투쟁의 목표였다. 국내외에서 공개적으로 또는 비밀리에 진행되어 온 독립운동 세력은 물론 그와 직접 연관이 없던 평범한 사람도 독립을 희구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갖지 않았던 조선 사람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구체제 곧 일본의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거부는 혁명의 제일조건이고 힘의 원천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공화국의 이상과 이념이 배태된 것은 우리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민본주의는 전통사회에서도 생소하지 않은 개념이었고 동학 농민운동이나 의병운동 등에서 행동으로 표출되기도 했지만 구한말 독립협회의 활동이나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반포된 홍범 14조에서는 보다 분명히 표현되었었다. ‘백성’의 개념을 넘어서 서구의 ‘시민’이라는 개념에 가까운 ‘인민’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이 그 때였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적 토대가 된 인권 선언이 오랜 시일에 걸친 계몽사상의 전파와 영국이나 미국의 혁명에서 받은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과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우리에게도 중국의 신해혁명, 러시아 혁명, 1차 대전 후 윌슨 미국 대통령이 선포한 민족자결주의 원칙 등이 모두 큰 자극제가 되었다.
1899년에 선포된 대한제국의 국제는 전제정치였으나 1919년 4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제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규정했고 인민은 남녀, 귀천, 빈부의 차별이 없이 평등하고 신앙, 언론,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하며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고 명시했다. 국권의 회복 운동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치체제는 개인의 기본권을 존중하는 민주공화국이라는 데에는 이미 폭넓은 합의가 형성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러한 염원과 이상을 현실화 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혁명의 주된 동력은 다수 대중의 오래 쌓여왔던 분노가 폭발 하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변화를 향한 갈구가 행동으로 폭발할 수 있는 것도 대안적 체제의 성립 가능성이 다소나마 있어 보이고 기득권 세력의 억압구조에 틈이 있을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다. 절대빈곤과 철저한 억압이 자행되는 경우는 다수의 불만도 정치적 힘으로 분출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지적되어 왔다.
프랑스 혁명의 경우 혁명의 물꼬가 터진 것은 국고의 파탄 상태를 걱정한 루이 16세가 귀족회의와 신분대표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함으로서 절대왕정 체제에 틈을 보인 데서였다. 러시아의 경우는 전쟁으로 기진맥진한 전제정권이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섰던 여성들의 시위를 진압할 수 있을 정도의 경찰이나 병사들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이 혁명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이유 중 하나가 억압 체제를 무너뜨린 일차적인 물리적 힘이 권력주체로 등장하는 우리 민족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일본을 패배시킨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에게서 나왔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일제 패망이라는 목표가 그들과 우리 사이에 같았고 우리의 독립운동 세력도 일정 정도는 직접적 기여를 하면서 민족 전체의 의지를 담아냈으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체제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억압체제의 붕괴가 곧바로 우리를 권력 주체로 부상시키는 광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영토가 다시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점령 당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남북한을 합친 국민국가를 복원하려는 민족의 염원은 소련과 미국 사이에 본격화되기 시작한 냉전으로 실현이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국제적 환경에서 남한 만이라도 영토와 국민을 가진 주권국가로 독립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탁통치였던 미군정체제 까지도 극복하며 우리 운명에 대한 주도권을 다시 찾는다는 혁명적 의미를 가지는 일이었다. 그 뿐더러. 세계 평화와 질서의 적극적 지킴이 역할을 하도록 국제사회가 2차 대전 후 새로 출범시킨 국제기구 유엔(UN)의 결정대로 납북한 함께 인구비례에 따른 선거를 치를 수만 있었다면 통일된 독립국가를 건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문제는 우리 민족 다수의 자유의지에 따른 통일국가 수립 방법에 반대하는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시킬 힘이나 방법이 우리에게 없었다는 점이었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 보통선거권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선거제도가 도입된 후로도 수십 년 수백 년을 투쟁해야 했다. 우리는 다수의 국민 사이에서는 아직 유권자 의식이 제대로 생기기도 전에 역사상 최초로 치러지는 보통선거가 UN의 감시 하에서 제주지역을 제외하고는 남한 전역에서 순조롭게 치러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행운이었다.
그것을 가능케 해준 모든 사람들, 특히 이승만 대통령 등 건국유공자들에게 감사할 일이지 순수한 대중 투쟁의 결실이 아니었다고 해서 그 의미를 평가 절하할 일은 결코 아니다. 사실 선거권의 쟁취를 위해 투쟁할 정도의 정치의식도 아직 일반화 되지 못한 상황에서 남녀 모두 선거권. 피선거권을 향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건국의 혁명적 성격을 오히려 더욱 더 부각시켜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탄생을 독립혁명으로 보지 않고 축하의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새로 탄생한 국가가 북한을 배제한 남한 만의 국가로서 미완의 국가 또는 “분단국가”였다는 사실이다. 건국은 반쪽만의 성공이었으며 많은 어려움을 배태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아쉬움이 기쁨만큼 컸다.
그러나 남쪽에만 국한된 성공이었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건국이 갖는 혁명적 의미 자체가 달라지는 것인가?
그 혁명의 성과가 북녘에까지 미치게 하자는 것이 오늘날까지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가 버리지 않고 있는 꿈이 아닌가. 비록 그 효과가 남쪽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해도 우리가 일제하, 그리고 그 전에 있었던 우리 사회와 정치체제의 성격과 대한민국 수립 후의 체제 사이의 엄청난 성격 차이를 부정 할 수 있는가?
사실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독립을 되찾는 과정을 “혁명”으로 규정하려 했던 것은 공산주의 진영이었다. 이른바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민족 부르주아지와 손을 잡고 그들을 우선 앞세우자는 것이 코민테른을 통해 내려오는 소련 공산당의 지시에 따르는 각국 공산당들의 전략이었고 중국에서부터 동 유럽 국가들에까지 공통으로 적용되던 혁명 공식이었다.
궁극적인 목적은 물론 세계 공산당 조직을 통한 전 세계의 공산화에 있었다. 공산당의 집권으로 가기 전에 거쳐야 할 단계가 이미 국민국가가 완성되어 있었던 나라들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었지만 조선 같은 피지배 민족들의 경우는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 범국민정부의 창출이었다. 그러한 잣대로 볼 때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에 이르기 까지 진행된 과정은 혁명으로 보기에 적절했다.
다만 남한에서는 주도권이 반공 우익으로, 특히 강력한 반일, 반공주위자인 이승만에게 넘어 갔고,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였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자들로서는 대한민국 건국을 결코 혁명으로 인정 할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공산주의 운동에서 수정주의의 위협은 19세기 독일에서부터 항상 따라다녔던 것이지만 일본 패망 후 한반도의 분할은 공산주의자들로서도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었다. 남한에 독립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선다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혁명의 결실이 아직 무르익기 전에, 다시 말하면 공산당이 접수 할 수 있는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도난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소련은 처음부터 이승만 같은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미소의 공동 결정상항인 신탁통치안에 반대했다는 구실로 자기들이 허용하는 국민대표 모임에서 배제시켜야 할 세력으로 낙인 찍었었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작동하던 시기에는 미군정(軍政)도 그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엄연히 이승만, 이시영, 이범석 등 항일 독립운동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척결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것을 구실로 그 정부를 친일 반동 정권으로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였다. 항일 정신이나 투쟁의 경력에서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 청산에 미온적이었던 가장 큰 이유가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새 나라를 보호해야 될 필요성 때문이라는 것을 소련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탄생을 역사의 중심에 놓고 본다면 분단은 국토와 민족의 일부가 외세(소련)의 압력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혁명적 과업에서 제외되는 운명에 처한 것이었고 북한은 언젠가는 같은 체제 안으로 재통합되어야 할 부분이었다. 이것은 10월 혁명 직후 러시아의 볼셰비키가 전쟁의 부담에서 해방되어 혁명정권을 수호하는 일에 전력을 투구하기 위해 독일과 단독강화를 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국토의 4분의 1, 국민의 3분의 일에 해당하는 지역을 독일에 넘겨주었던 사건과 비견될 수 있는 일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도 혁명정권 수호를 국토통합 보다 우선시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분단 점령이 우리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있던 현실에 비추어 보면 혁명 직후 러시아의 대 독일 단독강화 결정은 자발적이었고 우리의 독립정부 수립 결정의 경우 보다는 훨씬 더 선택의 여지가 컸던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처사였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해방 후 남한에서 좌우익 간에 벌어졌던 쟁투는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다 같이 벌어졌던 체제 선택 투쟁과 다를 바가 없거나 오히려 더 단순한 것이었다. 구체제, 우리의 경우 일제강점통치를 종식시키는 데에는 모두가 합세했지만 어떤 대안 체제를 수립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치열한 쟁의가 이는 것이 당연했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입헌군주제를 주창하던 사람들은 일찌감치 공화주의자들 앞에 굴복했지만 그것으로 혁명세력이 단결되고 평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같은 공화주의 급진 계열 안에서도 자코벵과 지롱드 간에 치열한 경합이 일고 마라는 암살당했으며 혁명독재와 테러의 화신이었던 로베스피에르가 처형을 당한 뒤에야 혁명은 진정기로 접어 들 수가 있었다.
러시아의 경우 입헌의회의 선출을 지향하던 3월 혁명에서 11월의 볼셰비키 권력 장악으로 치닫는 과정에는 여러 갈래의 사회주의 세력들 간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일고 우익 민족주의 세력은 물론 독일 측의 전력적 배후 후원까지 작용했었다.
남한에서 건국을 준비하던 여러 세력들 간에 경쟁과 충돌이 치열했고 결국 좌우익의 첨예한 대결에서 공산주의에 반해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우위를 장악함으로써 대한민국이 탄생한 과정은 다른 나라의 혁명 과정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서도 방데 지방을 중심으로 한 큰 반혁명 저항과 폭동이 일었고 러시아가 볼셰비키의 권력장악 후로도 3년여간의 내란을 겪어야 했던 것이나 마찬가지로 반체제 세력을 내부에 품은 채로 태어났던 대한민국 역시 내란에 버금가는 시련을 계속 겪어야 했다.
공산주의 혁명이 내거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상응하는 것이 반공독재였으며 결국 폭력은 혁명의 동반자라는 사실에서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었을 뿐 건국혁명의 주역이었던 이승만이 신조나 기질에서 독재자였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자유가 억압되었던 것이라고 해석할 근거는 없는 일이다.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 외세가 개입하는 것도 프랑스, 러시아, 대한민국 건국혁명에서 공통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실을 지원할 조짐을 보이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등 외세의 움직임이 그 반작용으로 혁명군을 탄생시키고 국민개병제의 실시를 통해 평등한 국민으로 새로 탄생한 프랑스인들을 혁명적 애국주의자로 결속시킴으로써 혁명의 기운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까지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의 내전에는 연합군 세력이 섣부른 개입 조짐을 보임으로써 볼세비키에게 조국수호의 구호 아래 지지세력을 결집시키고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특히 일제의 탄압에서 바로 벗어나서 대한민국 건국을 추진하던 세력에게는 소련의 세계공산화 이념과 전략은 외세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지배나 종속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으로서 일제시대의 악몽을 되살리기에 충분한 일이었으며 신생 대한민국 내부에 침투해 있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폭력적 제압을 정당화 시키는 구실이 되었다.
공산당에 가입한다는 것은 박헌영처럼 소련공산당에 직접 가입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세계공산주의의 본산인 모스크바로부터 내려오는 당 지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항일 독립운동에 열중하는 듯 했던 좌익이 하루아침에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바꾸는 데서 이미 그러한 종속 관계의 성격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국가로 대한민국을 즉각 수립하려는 반탁투쟁 당시부터도 반공은 사회주의 이념에 대항하여 자유주의 이념을 수호하려는 투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라는, 이제는 그 사악했던 실체가 그 치하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여지없이 노출된 가공할만한 외세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민족생존의 투쟁이기도 했다.
스탈린 치하 소련의 공산주의 영향을 배격 하는 데는 미국인들보다 더 앞서 나갔던 국제정치학 박사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경우 혁명적 공산주의가 아니라 민주적 사회주의 체제로의 점진적 발전은 오히려 바람직한 대안이라 생각했다. 그 증거는 교육권이나 노동권에 관련된 건국헌법의 내용이나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조소앙, 농지 개혁을 추진한 조봉암 같은 인물들과도 공조를 시도 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대한민국의 건국헌법은, 앞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세력이 일찍부터 주창해왔던 이상과 이념을 수용한 것이었다. 주권재민의 원칙은 물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재산권에 대한 보호, 권력 분립 등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체제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조건을 다 망라하고 있을뿐더러 교육과 노동에 대한 권리까지 언급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 체제로 이행할 수 있는 여지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발전에서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에서는 100년, 200년에 걸친 긴 투쟁의 과정을 거쳐 얻어 낼 수 있었던 보통선거 제도를 대한민국 국민은 피 한 방울 흘림이 없이 부여 받은 것이었다. 특히 아직도 ‘남녀칠세부동석’을 가르치고 있던 나라에서 여성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함께 획득했다는 것은 혁명적인 조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 참여권 확대라는 면에서 우리를 스위스 같은 유럽국가들 보다 앞세우는 조항이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곧 혁명의 완성이 아니었듯이 혁명적 내용을 담은 헌법체제의 선포가 곧바로 그것에 담긴 이상이나 이념의 현실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보았듯이 프랑스에서 대혁명의 공화주의 이상이 국가권력의 형태로 완전히 정착하는데 거의 90년이 흘렀다.
러시아의 경우는 70년의 노력을 투입한 후 결국 포기해야 하는 쪽으로 결판이 났다.
대한민국의 경우 주권재민의 이상이 대통령 직선제라는 형식으로 정착하는 데는 40년이 걸렸지만 정치참여를 제외한 인간의 기본권 존중과 법 앞의 평등을 대원칙으로 법제화 하는 일은 즉각 이루어졌다. 어떤 이상이나 제도도 그 본래의 뜻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원칙의 부정이나 후퇴를 막기 위한 끊임없는 감시와 투쟁이 필요하고 모든 제도적 시행 절차의 정교화를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아직도 우리의 민주주의 제도는 많은 결함을 안고 있으나 국민 개개인이 능력껏 자기 역량을 자유롭게 펴 나갈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면에서는 처음부터 문제가 없었다.
곧 적극적인 면에서 국가가 나서서 삶의 조건의 평등을 보장하는 데는 미흡했다 하더라도 소극적인 면에서 자유의 보장은 해주었다. 그러한 보장의 큰 조건 중 하나가 외부, 특히 민족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구성해 놓은 별개의 정치체제인 북한과 그 배후세력인 소련이 내포하는 위협에 대한 방어와 내부로 침투한 친공세력에 대한 방어였고 한 때 반공이 마치 국시처럼 여겨졌던 이유였다.
이런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혁명이었고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의 혁명이나 마찬가지로 성공한 혁명이었다. 그리고 그 후 민주주의의 진척과 정착에 기여했던 다른 사건들은 모두 대한민국 건국혁명의 이념과 그 혁명으로 만들어진 제도적 장치의 보호 속에서 그 효력을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나 제도에 대한 전면적 부정에서 출발하거나 그 쪽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건국과 헌법에 대한 존중 없이는 4.19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도, 6.10 항쟁도 생각할 수 없었다. 4·19가 혁명이요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라고 보는 것은 민주주의가 고귀한 생명의 희생을 대가로 하여 발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뜻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말이지만 역사적으로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부패와 부정선거를 퇴치함으로써 1948년의 건국혁명으로 태어난 자유민주공화국의 이념과 위상을 바로 잡자는 것이 4·19 주체세력의 주장이었지 대한민국 헌법체제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으며 그 때문에 범국민적 호응을 얻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전복이 시위를 이끈 사람들의 목적은 아니었으며 4·19 의거의 결과는 부정부패 책임자들의 처벌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가져왔지만 제2공화국은 단명으로 끝났고 결국은 이승만 정권보다 훨씬 폭압적인 군사독재의 장기화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러시아 혁명전설의 초석이 된 1814년 12월 14일 사건처럼 고매한 희생자들을 낳았지만 성공한 혁명이라고 볼 수는 없다.
국치 이전 우리 역사에는 정치 현실을 부정하고 개혁하려는 시도나 불의에 대해 항거하는 대중적 움직임은 있었으나 그것이 대안 이데올로기를 가진 혁명으로까지 본격화 되지는 못했다.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에서는 독립을 향한 의지의 결집과 광복후의 정치체제의 성격에 대한 대충의 이념적 합의는 있었지만 그 것을 실질적인 독립과 민주공화국 수립으로 연결시킬만한 힘이 없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는 국가건설에 필요한 능력이 많이 부족한 정부의 무능이나 부정부패에 항거하고 그 체제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움직임(4·19, 6·10)이나 좁은 의미의 지배권력과 지배구조의 교체를 목적으로 하는 쿠데타(5·16)는 있었으나 체제 부정의 혁명적 시도가 지하공작의 수준을 넘어 표면으로 분출된 적은 없었다.
인간 개개인의 도덕적 결함이나 지도자로서의 능력의 결핍을 대한민국 체제의 성격적 결함과 구분해 볼 줄 아는 지혜를 일부 학자들은 결여하고 있어도 국민 전반은 가지고 있을 만큼 사회가 성숙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4. 맺는 말
대한민국의 건국을 혁명으로 볼 수 있는가 아닌가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곧 민주주의가 좋고 필요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는 질문과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다.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로 내릴 수 있고 공산주의 국가치고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을 국호에 쓰지 않은 나라가 많지 않을 정도로 민주주의라는 말은 큰 혼돈을 낳을 수도 있는 말이다. 우리 학계에도 민주주의와 민주화를 구분하여 써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우리는 민주화에 성공했다는 말을 당연한 듯 받아드리기도 한다. 또한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따로 있다는 또는 있었다는 가정을 쉽게 받아들인다.
산업화 세력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말이고 민주화 세력이란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에 나섰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인가. 경제성장이 없이도 지금 같은 정도의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가 있었을까?
거리에 나서서 시위를 하는 대신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일에 열중했던 사람들은 민주화를 원치 않았었고 민주화에 기여한 바도 없었는가?
임금노동자로 혹사를 당하며 이 나라 경제발전에 주춧돌이 되었던 사람들은 “민주화 세력”에 포함되는 것인가 “산업화 세력”에 포함 되어야 하나? 맑스주의에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도 상식적으로 던져 볼 만한 질문들이다.
민주주의의 실패와 성공의 척도는 과연 무엇인가?
대통령 직선제의 실시와 정권교체가 곧 민주화의 성공이라고 자부 할 수 있는가?
다른 어떤 틀을 갖추어야 하는가? 형식적으로는 왕국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영국, 덴마크, 스웨덴 등이 세계에서 인권이 가장 잘 보장되는 나라이고, 살기 좋은 나라로 손꼽히는 핀란드의 케꼬넨 대통령은 이승만이나 박정희 대통령 보다 훨씬 길게 25년간이나 집권했으면서도 아직도 훌륭했던 지도자로 추앙 받는 것은 무슨 일인가?
정치체제의 형식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기본권인 인신의 자유와 법 앞의 평등, 노동의 대가로 얻는 재산에 대한 소유권, 언론과 신앙의 자유 등이며 그것을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다. 그런 기본권에 대한 존중과 보장 없이는 참정권도 무의미하며, 역으로 참정권의 보장 없이 인간의 기본권이 평등하게 보장되고 신장되기는 쉽지 않다. 또한 사회 전체의 경제적, 문화적 역량의 성장 없이는 참정권도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고무신 한 켤레에 유권자의 소중한 한 표가 팔려나가던 일이 불행히도 과거 이야기만은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고매한 정치적 이상도 그것을 뒷받침 해 줄만한 경제적 토대와 의식의 성숙, 곧 시민적 책임감이 없이는 실천에 옮겨질 수 없고 민주주의의 궁극적 목표라고 볼 수 있는 복지사회로의 이행, 다시 말하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이상이 실천으로 옮겨지고 국민 모두가 자부심을 느끼며 행복하게 사는 사회의 건설을 기대하기 어렵다.
세계사적 흐름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서구의 선진국들보다는 백 여년 늦게, 그러나 국가로 독립을 이루지 못했거나 공산주의의 유혹이나 사슬에 걸려들었던 나라들보다는 훨씬 앞서서, 건국혁명을 통해 기본 인권과 정치권을 보장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법적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다만 문제는 사회 전체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지적, 경제적, 문화적 역량이 민주주의 제도의 장점들을 살려내고 약점들을 최소화 시키는 방향으로 그 제도가 운영될 수 있게 뒷받침 해 주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는데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우리 학계나 정계 양쪽에서 다 같이 일고 있는 엄청난 혼란과 갈등, 반목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정치체제나 제도의 문제와 운영 주체의 도덕적, 지적 자질과 능력의 문제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회 전체가 극단적인 배금주의와 권력만능주의적 사고에 빠져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혁명으로 규정하고 그 역사의 전개과정을 보면 다른 나라들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 19세기 프랑스가 나폴레옹 전쟁, 복고 왕정, 1830년, 1848년 두 차례의 혁명과 단명의 제2공화국,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비견 될 만한 특징을 많이 들어냈던 루이 나폴레옹의 권위주의적 산업화 체제를 거쳐 제3공화국을 수립하는 과정을 보면 이상하리만치도 우리와 유사한 경로를 밟아 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 누구도 자기 역사가 특별히 비리와 부패가 승리했던 역사라고 매도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경우 도덕적 잣대로 역사를 재단하려는 태도가 학계에까지 만연하게 된 이유는 일차적으로 분단의 현실에 뿌리를 둔 반체제적 시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약적 경제발전과 사회변화를 따라 잡지 못한 지식인 세계의 의식의 낙후성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우리의 지식 세계, 특히 인문사회 분야는 경제발전에서 그늘진 지대로 남아 있었고 사회 전체적으로 몸체가 비대 해진데 비해 의식의 성숙은 빠르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심한 불균형이 발생한 것이었다. 곧 현실과 의식 사이의 괴리가 커지다 보니 경제는 세계 선진국 수준으로 치닫고 있어도 정치는 후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러한 수준의 정치가 결국 경제의 발목을 잡아버리는 현상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의 성공은 사회적 역동성에서 나왔으며 그러한 역동성의 배양과 발휘를 가능하게 해 준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건국혁명이었다는 것은 북한의 현실과 대비해 보면 특히 잘 알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부정일변도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해석해 온 우리 학계 일부의 자세는 이제 나라의 정상적 발전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민족 통일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세력의 오랜 기간에 걸친 집요한 공세 덕분에 지금 우리 대한민국 국민 상당수의 뇌리에는 불행히도 역사에 대한 부정적 시각뿐 아니라 국가정통성에 대한 의문까지 일고 있는 듯하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우리 민족에게 재앙이었는가 축복이었는가? 건국이 잘못된 일이고 이 나라를 만든 사람들이 모두 친일 친미 반동세력이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떻게 보아야 하고 대한민국이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에서 거둔 성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아직도 그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답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불행히도 우리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대한민국의 건국은 우리가 자랑스럽게 기리고 자축해야할 기념일이며 학문적으로 크게 조명되어야 할 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가장 등한시 되어 오거나 의도적으로 반 대한민국 세력에 의해 외면 되어온 주제이기도 하다.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의 후유증이 통일에 대한 비현실적 염원과 환상을 강화시킴으로써 역사적 현실을 직면하는 이성의 힘과 도덕적 용기를 압도해 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 아닌가? 깊이 그리고 시급히 반성해 볼 일이다.
학술적 연구의 결과가 정치에 불을 밝혀야지 정치적 염원이나 이기적 타산이 학문적 진리 추구의 의욕과 용기를 압살해 버리는 듯한 의식의 역류 현상을 우리 학계나 국민이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