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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와 이승만 -4.19 혁명 51주 아침에_
4.19 그 날의 학생들의 행동은 부정선거를 금지하는 대한민국 헌법, 선거법, 공무원 가혹행위와 살인행위를 금하는 법들을 위반 한 자유당 정부 국무위원들과 자유당 최고 간부들, 그리고 그 하수인 경찰간부들과 정치깡패들의 위법행위를 응징하고 “부정선거 다시 하라”라는 요구에 따라, 훼손된 대한민국 헌법질서를 다시 제 자리에 갖다 놓은 호헌(護憲)-준법(遵法)의 평화적 시위였다.
따라서 그것은 봉건적 절대왕정이라는 앙시앙 레짐(구체제)을 폭력적으로 전복한 18세기 서구 자유민주 시민혁명과는 달리, 이미 존재하고 있던 자유민주 헌법의 규범에 의거해서 그것에 반역한 범죄자들을 국민의 봉기로 제재(制裁)한 행위였다. 이처럼, 현존하는 헌법과 실정법의 명령에 부응한 것을 과연 체제전복에나 해당하는 ‘혁명’이라고 명명(命名)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헌법에는 부합했으면서도 그것에 반역한 정권을 물러나게 한 과정은 분명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런 방식의 정권 타도를 지목해서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르겠다면 그에 대해 굳이 반대할 이유나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제정과 대한민국 정부수립(또는 대한민국 건국)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곡이다‘를 천명한 날이었다면, 4.19 혁명은 현실권력에 의해 훼손된 그 제헌정신과 건국정신을 현실에 본격적으로 형상화하기 시작한 사태였다. 4.19 혁명의 의의(意義)는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승만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공칠과삼(功七過三)의 묘(妙)로 정리하자는 의견과, 4.19 부상자와 유가족이 아직도 고통을 받으며 시퍼렇게 살아 있는 한에는 어떻게 감히 이승만의 공칠(功七)인들 인정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더더군다나 그의 동상을 광화문 광장에 어떻게 감히 세울 수 있겠느냐는 하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이 대립에서 4.19 관련 단체들은 이승만 박사의 양자 이인수 박사의 사죄 제의를 거부했다. 사죄하는 쪽만 있고 사죄 받는 쪽은 없다면, 그 사죄는 어차피 성립할 길이 없다.
어쩔 것인가? 답은 하나-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놓아둘 수밖에 없다. 이런 걸 억지로야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나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런 논란이야 여하튼, 이승만 박사에 대한 긍정 부정의 논의 과정에서 극좌 친북파와 8.15 해방공간의 좌우합작파의 개입은 배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극좌 친북파는 대한민국과 아예 무관한 자들이니 당연히 배제해야 한다. 여기엔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 좌우 합작파는 비록 극좌파 아닌 ‘민족주의 중간파’였지만, 그들 역시 대한민국 수립에는 한사코 반대했다. 그러니 그들 역시 대한민국 수립과 발전 이후의 시점에 와서는 이승만이 어떻고 대한민국이 어떻고 하는 등등의 논의에 끼일 여지가 없다.
그들 우국충정의 민족주의 리더들을 정서적 도의적 차원에서 길이 흠모해 드릴 수는 얼마든지 있다. 아니, 그렇게 해드려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수립과 발전 과정에 관한 한에는 그들이 뭐라고 말할 그루터기란 없다. 그분들 자신이 “남한 단독정권 수립은 절대 불용(不容)!!”이라는 막다른 최후통첩을 너무나 확실하게 했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무엇인가? 이승만 박사가 주도한 대한민국 수립을 잘한 일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끼리만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를 냉정하게 따지는 일이다. 그렇게 범위 설정을 하기로 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역시 공칠과삼(功七過三)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에 대한 좌익의 반발에 대해서는, 그 자들은 의례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러니 우파를 자임하면서도 ‘이승만 전면 부정(否定)’ 운운 하는 사람들의 논리 아닌 고집은 그러려니 해주기가 어렵다.
이승만 대통령의 사찰계 형사들한테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어지간히 시달렸던 당시 반항적 대학생의 말이니 참고하기 바란다.
류근일 /본사고문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