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차 그룹, 발전 속도가 ‘벌점 30점 수준의 과속’디자인-성능으로 비상하는 ‘날개달린 호랑이’ 기아차쏘울, 피터 슈라이어의 K시리즈, 디자인으로 ‘매니아’ 만들어
  • 1980년대 ‘봉고 신화’ 이후 프라이드를 출시하며, 큰 인기를 끌었던 기아자동차는 그러나 1990년대 후반 관료주의와 매너리즘에 빠졌다. 1998년 결국 기아차는 주인이 바뀌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주인을 찾은 기아차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였다. 13년이 흐른 지금의 기아차는 '날개 달린 호랑이'다. 경영진의 결단과 현지전략형 모델, 디자인으로 승부하려는 전사적 노력의 결과다.

    1960년대 삼륜트럭, 1980년 ‘봉고신화’ 쓴 기아차의 몰락

    기아차의 역사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깊다. 1944년 12월 서울 영등포에서 김철호가 설립한 경성정공(주)가 전신(全身)이다. 1950년대 이름을 ‘기아산업’으로 바꿨고, 1960년대 삼륜 트럭을 생산했다.

  • ▲ 1970년 기아차의 삼륜차 '기아 마스터' 신문광고. 삼륜차의 대박에 힘입어 기아차는 소하리에 대형 자동차 공장을 짓는다.
    ▲ 1970년 기아차의 삼륜차 '기아 마스터' 신문광고. 삼륜차의 대박에 힘입어 기아차는 소하리에 대형 자동차 공장을 짓는다.

    기아차는 큰 인기를 얻은 삼륜트럭의 성공에 힘입어 1970년 11월 경기도 시흥에 20만평 규모의 소하리(현재 광명시 소하동) 공장을 착공했다. 당시 소하리 공장은 우리나라의 첫 종합 자동차 공장으로 연간 2만5,000대의 생산 능력을 갖췄었다.

    상용차를 만들던 기아차는 1974년 4월 일본 마쓰다의 파밀리아를 베이스로 우리나라 최초의 세단 브리사를 출시했다. 브리사는 대형차를 부담스러워 하던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탄력을 받은 기아차는 1976년 아시아자동차, 기아기공 등을 잇달아 인수했다.

  • ▲ 기아차의 첫 세단 '브리사'의 모습. 작은 차체지만 대형차를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에게는 딱 맞았다.
    ▲ 기아차의 첫 세단 '브리사'의 모습. 작은 차체지만 대형차를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에게는 딱 맞았다.

    하지만 기아차에도 시련이 닥쳤다. 1980년 들어선 전두환 정부가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를 단행하자, 기아차는 승용차를 만들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아차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국내 최초의 승합차 ‘봉고’를 내놔 이른바 ‘봉고 신화’를 쓴다.

    기아차는 전두환 정부의 ‘조치’가 언젠가는 풀리리라 보고 이 기간중에도 승용차 기술 개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87년이 되자 기아차는 마쓰다, 포드와 제휴해 소형차 ‘프라이드’를 내놨다. ‘프라이드’는 포드의 엠블럼을 달고 북미수출도 했다.

  • ▲ 프라이드의 조립라인 모습. 프라이드는 엘란트라(아반떼)와 함께 '마이카' 시대를 이끌었다.
    ▲ 프라이드의 조립라인 모습. 프라이드는 엘란트라(아반떼)와 함께 '마이카' 시대를 이끌었다.

    1987년 7월에는 마쓰다 카펠라를 베이스로 한 중형차 ‘콩코드’, 1989년에는 준중형차 ‘캐피탈’을 선보였다. 기아차는 1992년 독자 개발한 전륜구동 플랫폼을 사용한 준중형차 세피아를 내놨고, 1993년에는 독자개발한 도심형 SUV ‘스포티지’를 출시해 인기를 얻었다. 마쯔다나 포드의 도움 없이 미국 시장에 진출한 것도 이때부터다.

    하지만 기아차는 ‘성공’에 안주하면서 노사 갈등과 매너리즘, 사내 관료주의가 심해졌다. 결국 기아차는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1997년 10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기아차는 1998년 10월 국제 입찰을 통해 현대자동차에 인수됐다.

    포드, 마쯔다 등 해외 업체와의 제휴도 프라이드(수출명 페스티바), 아벨라(수출명 아스파이어)까지는 이어졌지만 1999년 현대자동차그룹에 소속되면서 끝났다.

    현대차와의 갈등, 그리고 재도약

    기아차는 2000년 법정관리를 끝낸 뒤 2001년 4월에는 현대자동차그룹으로 편입됐다.

    2000년 초반 기아차와 현대차 간에는 ‘보이지 않는 갈등’도 있었다. 생산직원들은 물론 사무직원들까지도 생경한 상대방의 문화 때문에 난감할 때가 많았다고 전한다. 두 회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화학적 결합’을 시작해 갔다.

    현대차는 기아차로부터 ‘기술력 우선’ 정신을 배웠다. 현대차 사람들은 기아차에 유독 ‘스테디셀러’가 많은 이유를 자체개발한 플랫폼과 안전을 제일 중시했던 정신 때문으로 봤다. 기아차는 현대차로부터 얼핏 막무가내인 듯 하면서도 필요하면 빠르게 움직이는 태도와 ‘할 수 있다’는 정신을 배웠다.

    기아차와 현대차의 화학적 결합은 제품에도 서서히 반영됐다. 2000년 5월 프라이드와 슈마의 후속으로 출시된 준중형차 ‘스펙트라’는 유선형 디자인과 150km/h까지 무리 없이 가속되는 성능으로, 쿠페가 좋지만 가족 때문에 살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줬다.

    2000년 7월 출시된 중형차 ‘옵티마’는 ‘무난한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기아차의 튼튼한 내구성과 현대차의 영업력이 합쳐지자 판매도 늘었다.

  • ▲ 기아차의 SUV 쏘렌토.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 기아차의 SUV 쏘렌토.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2002년 2월 출시된 ‘쏘렌토’는 남성적인 디자인과 넘치는 힘, 국산차 중 비교적 뛰어난 오프로드 성능 때문에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경찰 등 기관요원들까지도 ‘쏘렌토’를 찾을 정도였다. ‘쏘렌토’의 인기는 2003년 7월 美NHTSA가 실시한 안전성 테스트에서 별 5개를 받으면서 더욱 높아졌다. 수출형인 가솔린 3.5리터급 사양은 해외에서 강력한 힘과 내구성, 오프로드 능력으로 지금까지 매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다.

    2003년 3월 대형차 포텐샤, 엔터프라이즈 후속으로 나온 ‘오피러스’는 ‘그랜져XG’처럼 오너가 직접 운전하는 대형차라는 컨셉으로 전문직과 젊은 중소기업 경영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렇게 기아차는 서서히 정상궤도에 오르자 해외로 눈을 돌렸다. 기아차는 2004년 슬로바키아에서 글로벌 환경 조인식 앙해각서를 체결한 뒤 공장을 지었다. ‘모든 게 잘 되는 것(So Far So Good)’ 같았다. 하지만 변수가 있었다. 수입차들이 들어오고 소비가 양극화되면서 판매량이 정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기아차는 새로운 AS를 실시하고, 페이스리프트한 차를 내놨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결단’을 내렸다.

    정몽구 회장-정의선 부회장의 결단 ‘피터 슈라이어’ 영입

    현대차를 이끌던 정몽구 회장은 기아차의 성장 ‘정체’에 난감해 했다. 자동차 시장의 흐름을 봤을 때 ‘정체’는 곧 ‘퇴보’였고, 이대로 두는 건 폐업을 선언하는 것이나 같았기 때문이다. 

  • ▲ 기아차 디자인 혁신의 시작 '쏘울' 광고. '쏘울'은 최고 권위의 '레드닷디자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기아차 디자인 혁신의 시작 '쏘울' 광고. '쏘울'은 최고 권위의 '레드닷디자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 회장은 기아차를 살리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소비자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국산차의 문제는 디자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때부터 기아는 디자인의 일대 혁신을 준비했다. 그 첫 결과물이 바로 ‘쏘울(Soul)’이다. ‘쏘울’은 2009년 한국차 최초로 '레드닷 디자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 회장은 만족하지 않고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를 영입했다. 당시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는 BMW의 크리스 뱅글, 람보르기니의 발터 드 실바, 폭스바겐의 피터 슈라이어가 꼽혔다. 이들 중 한 명을 스카웃하기 위해 정 회장은 자신의 장남 정의선 부회장을 투입했다.

    기아차는 2006년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기아차는 슈라이어에게 부사장 직함을 주고 대표이사보다 훨씬 많은 연봉을 주기로 했다. 반발도 있었다. 슈라이어가 기아차에 왔을 때 경영진과 엔지니어, 마케팅팀에서 예전처럼 ‘간섭’을 시도했다. 이에 슈라이어가 반발하자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은 ‘엄명’을 내렸다. "디자이너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 그리고 디자이너가 제시한 컨셉대로 무조건 차를 만들라"고 했다.

    기아차는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한 후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한동안 ‘침묵’했다. ‘디자인에 맞춰 만든 차’라는 개념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었기에 기아차 안팎에서 여러 소리가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 ‘침묵’의 결실은 대단했다.

    기아차 혁신의 첫 결과물은 유럽형 전략모델인 ‘씨드(Ceed)’였다. 해치백 스타일인 ‘씨드’는 2007년 11월 유럽 ‘올해의 차(COTY, Car of the Year)’ 평가에서 동급 최고로 선정됐다.

    슈라이어는 2007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출품한 컨셉카 ‘키(Kee)’에다 기아차의 새로운 상징인 ‘호랑이코’ 그릴을 선보인다. 2008년에는 대형 SUV 모하비로 ‘새로운 기아’의 맛배기를 보여준다. 남성적이면서 압도적인 라인에 SUV 팬들이 열광했다. 2008년 8월엔 ‘새로운 기아’의 ‘포르테’를 선보였다. 기아차 ‘비상(飛上)’의 시작이었다. 

    기아차, ‘날개를 단 호랑이’로 변신하다

    소비자의 욕구를 정확히 꿰뚫은 기아차는 말 그대로 ‘비상’했다. 슈라이어의 첫 작품 ‘포르테’는 국내에서 불과 4개월 만에 1만7,669대가 팔렸다. 2009년부터 슈라이어의 ‘호랑이코’를 단 신차들이 줄지어 나왔다. 2009년 4월 ‘승용차보다 빠른 SUV’라는 쏘렌토R이 나왔고, 2009년 11월에는 제대로 된 ‘슈라이어 디자인’ K7이 나왔다. 2010년 3월에는 ‘스포티지R’이, 4월에는 K5가 나왔다.

  • ▲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한 기아차의 본격적인 변신은 K7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한 기아차의 본격적인 변신은 K7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아차는 2010년부터 직분사(GDI) 엔진을 장착한 모델들을 내놓으며 디자인뿐만 아니라 성능에서도 변신을 시도했다. 2007년 준공한 슬로바키아 공장, 2010년 준공한 美조지아州 공장을 본격 가동하면서 해외 시장 진출에도 공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K5와 K7은 기아차라는 ‘호랑이’에 달아준 ‘날개’역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K5의 인기는 출시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계약 후 3개월 넘게 기다려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미국에서는 도요타의 캠리를 앞지르기도 했다.

    그 결과 2011년 3월 24일에는 누적 수출 대수 1,000만 대를 돌파했다. 세계 언론의 찬사도 이어졌다. 지난 6월 독일 자동차 전문잡지 '아우토빌'은 '유럽 대표 경차 6차종 비교 평가에서 기아차 모닝을 '1위'로 선정했다. 같은 달 호주의 유력 자동차 전문지 ‘ECOcar’는 ‘올해의 차’로 K5를 선정했다.

  • ▲ K5는 출시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계약 후 인도까지 3개월 넘게 걸릴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 K5는 출시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계약 후 인도까지 3개월 넘게 걸릴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북미시장에서의 희소식도 들려왔다. 기아차가 미국 소비자 충성도에서 4위를 기록한 것이다. <MSNBC>는 “자동차 정보 제공업체 '익스피리언 오토모티브' 조사에서 기아차 포르테 선호도가 68%로 1위를 차지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2011년에만 현대․기아차에 대한 세계 유력 언론과 매체의 호평이 60여 차례나 됐다.

    지난 7월 출시한 유럽형 경차 K2는 출시 5개월 만에 4만6,493대나 팔렸다. 현지 소비자들의 디자인 요구를 철저히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기아차는 2011년 11월 말까지 총 59만978대를 판매하는 기염을 토했다.

  • ▲ 최근 2012년 출시 예정인 포르테 후속 K3의 디자인 렌더링이 공개됐다. 기아차는 비상을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최근 2012년 출시 예정인 포르테 후속 K3의 디자인 렌더링이 공개됐다. 기아차는 비상을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아차의 ‘혁신’과 ‘비상’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2011년 스파이샷으로 드러난 새 대형차 K9은 이탈리아의 고급세단 ‘콰트로포르테’보다 디자인이 더 낫다는 평가를 받으며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12월에는 ‘포르테’ 후속인 K3의 디자인 렌더링이 공개돼 호평을 받았다. 이에 일본차와 미국차 브랜드들은 기아차의 성공에 관심을 가지며 경계하고 있다.

    기아차 관계자는 “한국에서는 물론 유럽, 미국에서까지 현지 소비자들의 욕구를 철저히 반영한 ‘전략형 모델’을 출시한 덕분”이라며 “이제 시작일뿐”이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