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문' 인화문(6)> 보부상패 2000명, 만민공동회 농성장 무차별 습격
  • [시장경제신문 연재 - 인보길의 역사 올레길]

    황궁앞 대격돌 "이승만 죽었다" 시민 봉기

    <정동 이야기 - '혁명의 문' 인화문(6)>

     

  •             경운궁 대안문(大安門)앞에 집결한 보부상패. 고종황제와 수구파가 동원하여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시위를

                     습격하였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가수 이문세의 히트곡 '광화문 연가'는 제목과 달리 정동 길의 풍정을 노래한다.

    서울 시내에서 서양 근대문화 유입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대사관 거리' 정동, 조그만 교회당 정동감리교회 앞의 아름다운 거리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운명을 좌우하던 '혁명의 거리'였다. 황궁 경운궁 앞에서 마침내 개화파와 수구파의 피 흘리는 대격돌이 벌어진 것.

    고종 황제에게 '입헌군주제' 등 근대화 개혁을 요구하는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의 시위가 최고조에 달했던 그날, 청년 운동가 이승만에게는 가장 극적인 하루가 되었다.

    낮밤 철야시위 17일째 18981121일 새벽, 두목 홍종우(洪鍾宇, 1894년 김옥균 암살자)가 이끄는 보부상패 2000여명은 인화문 앞에서 연좌데모 하는 만민공동회 군중을 양면에서 기습 공격했다. 몽둥이로 무장한 이들이 쳐들어오자 연설하던 이승만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여러분, 우리가 풍찬노숙하는 것이 옷을 탐하는 것이요? 밥을 탐하는 것이요? 오직 나라를 위하고 동포를 사랑함이외다. 간세배가 동원한 부상패가 당도하였으니 죽더라도 충애(忠愛)에 죽으니 천추에 큰 영광이외다!"


    무방비상태의 군중은 보부상패의 공격에
    3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격분한 이승만은 진두지휘자 길영수(吉永洙, 과천군수) 멱살을 잡았다.

    "너도 명색이 국록을 먹는 신하요, 대한의 백성이관대 어찌 만민을 친단 말이냐. 나부터 죽여라!"


    외치며 머리박치기로 난투를 벌였다. 시위군중은 폭력진압에 쫓겨 흩어지고 이승만은 꼼짝없이 몽둥이 세례 속에 갇히고 말았다. "이승만이 죽었다"는 소문이 쫘악 퍼졌다. 신문들도 그날 이 소식을 보도했다.

    보부상패에 쫓긴 사람들이 배재학당에 몰려왔다. 이승만의 친구 김원근도 달려와 "이승만이 길영수에게 맞아죽었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한탄하며 통곡했다.

    고종과 수구파는 이제 만민공동회는 해산된 것으로 믿고, 기습작전에 수고한 보부상패들에게 고깃국 백반을 내렸다. 의기양양해진 보부상패들이 아침 밥을 먹고 있을 때 돌팔매가 쏟아졌다. 소문을 듣고 분노한 시민들이 정동거리에 몰려들어 반격을 개시한 것이었다.

    군중을 회유하러 나섰던 한성판윤(서울시장) 이근용은 뭇매를 피해 도망쳤다. 성난 시민들을 제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무 장사, 신발 장사등 상인들까지 만민공동회가 습격당했다는 말에 격분하여 수구파 조병식, 민종묵, 유기환, 홍종우등 대관들의 집을 때려부수었다.

    학교들은 문을 닫고 학생들은 공동회로 몰려왔다. 밤늦게까지 장안은 난장판이었다.

    이튿날 새벽 종로엔 더 많은 시민이 모여들었다. 마포로 쫓겨간 보부상패를 추격한 시민들의 보복전이 벌어졌다. 병정들과 순검(경찰)들마저 제복을 벗어던지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지지를 외치며 합류했다. 격렬한 공방전 끝에 신기료장수(헌신 수선공) 김덕구가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를 낸 시민들은 패퇴하고 말았다. 이승만은 과연 맞아죽었을까. 보부상패의 집단폭행을 당한 이승만은 포위를 뚫고 배재학당쪽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구했다. 아버지 이경선(李敬善)이 나타나 끌어안고 통곡했다. "왜 아들을 그런 위태한 데 놔두느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아버지는 대답했다.

    "내 자식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면 엄금하겠으되, 당당한 충애의 의리로 나라와 동포를 사랑하는 일을 어찌 금할 수 있소."

    -독립신문 보도


    무장 2천명이 농성장 새벽 기습 공격 사상자 수십명
    시민들 격분,
    대관들 집 때려 부숴 군인-경찰도 합세
    "구두약속 못 믿겠다" 버티자 황제가 수습 나서 '공약'


    ▲이승만(오른쪽)과 아버지 이경선. 왼쪽은 이승만 친구 김홍서. 이 사진은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입학하기 전인 만 18세때(1893년)에 찍은 것으로 상투를 자르지 않았다.
    ▲이승만(오른쪽)과 아버지 이경선. 왼쪽은 이승만 친구 김홍서. 이 사진은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입학하기 전인 만 18세때(1893년)에 찍은 것으로 상투를 자르지 않았다.


    한성 시내는 걷잡을 수 없는 혁명전야의 분위기에 휘말리고 있었다.

    경운궁 일대는 철통경비에 들어가 정동 거리엔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이승만등 흥분한 과격파들이 이끄는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장 윤치호마저 해산시킬 수 없었다. 보부상패도 역시 해산하지 않고 두목 길영수는 가마를 타고 몰래 황궁을 들락거렸다.

    고종이 독립협회 부활과 보부상패 합법화 철회등을 구두 약속했으나 사태는 악화일로였다.

    종로를 뒤덮은 군중 속에서 이승만은 연일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연설을 계속했다. "입으로 한 약속이 이행된 적이 없다. 행동으로 보이라"는 주장을 군중들과 합창하고 있었다.

    마침내 고종황제가 직접 나섰다.

    1126일 오후 1시, 황제는 경운궁 돈례문(敦禮門) 군막(軍幕)에 나왔다. 이 자리에는 각국 공사등 외교관부부들도 초대되었다. 이것도 이승만등 공동회의 요구에 따라 '황제의 약속'을 보증하는 국제적 증인들로 입회한 것이었다. 고종은 먼저 공동회대표들에게 '독립협회 부활'등 요구조건을 허락하고 해산을 권유했다. 보부상패에게도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며 해산하라고 말했다. 양측 대표들은 만세를 부르고 궁을 나와 각각 집회를 해산했다.

    그러면 이것으로 '혁명 열풍'은 끝날 것인가? 끝이 아니라 아직도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