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폭락으로 수주 급감..'사면초가'
  •  [뉴데일리경제 박정규 대표 칼럼] 두 꼬마와 두 마리 생쥐는 미로를 헤매다 엄청난 양의 치즈 창고를 발견한다. 두 마리 생쥐는 치즈를 실컷 맛본 후 다른 치즈를 찾아 떠나 고생 끝에 다른 치즈 창고를 발견한다. 두 꼬마는 처음 치즈 창고에서 안주하며 삶을 만끽했으나, 곧 치즈가 바닥나자 소리치며 항변한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지?’

     

    스펜서 존슨의 베스트셀러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의 일부다. 한 시간이면 모두 읽을 분량에 불과한 이 책이 꾸준히 전 세계에서 스테디셀러로 손꼽히고 있는 이유는 수시로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해나가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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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의 든든한 산업기반이었던 조선업이 최근 흔들리는 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치즈창고에서 치즈가 바닥나가고 있는 모습을 연상케한다.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를 구가하던 대한민국의 조선산업은 어느새 선두 자리를 중국에 내줬다. 한국이 중국에 비해 우위에 있던 고부가선박 시장까지 중국이 잠식해 들어오는 가운데, 3위로 뒤쳐졌던 일본은 엔화 약세 효과를 등에 업고 빠르게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기업은 구조적으로 지출이 증가하게 돼 있다. 자연히 매출이 증가세를 유지하지 않으면 늘어나는 임금과 각종 부대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다. 매출 목표를 줄이는 것은 기업 경영진으로서는 백방의 카드를 다 동원해도 불가능할 때 최후에 던지는 카드일 수 밖에 없다. 

     

    국내 대형 조선업체들은 물론 ‘영원히 지지 않을 태양의 제국’ ‘블루칩 중의 블루칩’으로만 여겨졌던 현대중공업이 지난해 3조원 규모의 적자를 내고 올해 사업 목표를 지난해 초 세웠던 목표보다 10% 줄어든 24조원 규모를 제시한 것만 봐도 조선업계의 위기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케 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연합뉴스

     

    ▶유가 폭락으로 수주 급감, 경쟁사들의 맹추격...

     

    오늘날 조선업의 위기는 가히 ‘사면초가’의 형국에 휘말려들고 있다.

     

    최근 국제 유가가 배럴당 50달러선으로 1년만에 반토막이 나면서 선박 발주가 급감하는 상황이다. 산유국들을 중심으로 발주되던 해양 플랜트사업, 발전플랜트 사업들도 끊기고 있다.

     

    미국이 원유 대체 프로젝트로 셰일가스 개발을 확대하면서 LNG선 발주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나, 유가 폭락으로 셰일가스 개발이 주춤해지면서 LNG선 시장도 위축될 조짐이다.

     

    일본과 중국 등 경쟁국들과의 경쟁이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 중국 정부와 국책 금융기관들은 자국 조선업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오히려 통상임금 범위 확대, 화학물질 등록의무제 도입 등 노동, 환경분야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다.   

     

    여기에 노사문제까지 가세했다. 현대중공업 노사가 어렵사리 합의한 임단협 잠정합의안마저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부결된 것이다.

     

    기본급 3만7,000원 인상, 격려금 150%+200만원 등 노사가 도출한 방안이 그동안의 추이를 생각하면 일반 노조원들 입장에서는 미흡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악화일로로 치닫는 시장환경에다 이미 현대중공업의 임금은 국내 제조업 중 최고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현대중공업의 평균 연봉은 7,200만원선으로, 대기업(300인 이상) 평균 연봉 6,200만원을 훌쩍 상회한다. 또 국내 중소기업(5-99인) 평균 연봉 2,600여만원의 3배에 육박하는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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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업 위기 극복 주체는 중공업 노사. 다른 대안 없어

     

    조선업이 위기로 치닫고 있지만, 정부가 조선업을 지원하려 해도 일부 규제를 완화하는 방법 외에 수단은 그리 많지 않다.  각 기업들 스스로 경쟁사들보다 인건비를 포함한 제조원가를 대폭 낮추는 등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는 방법 만이 유일한 해법인 것이다.

     

    권오갑 사장이 취임 후 석달간 연일 각 공장을 돌며 직원들과 점심식사를 하면서 대화의 폭을 넓혀온 것은 직원들 사이에서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7일 조합원 투표에서 잠정합의안이 부결됐다는 것은 권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조합원들의 가슴으로 더욱 더 깊이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중공업 조선소 건설 초기에 고 정주영 창업주는 워커를 신은 채 현장에서 잠을 자며 직원들과 뒹굴었다. 같은 ‘현장 노동자’라는 인식이 뿌리 내린 상황에서는 노사 입장이라는게 있을리 없다.
     
    현대중공업 사측 간부들은 이제 합의안 부결에 따른 서운한 감정을 털고 다시 뛰어야 할 시점이다. 우선 스스로 관료화돼 있는 게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임원들은 방에 앉아 결제 서류 기다릴 시간에 현장을 돌며, 퇴근 후 소주잔을 기울이며 조합원들과 더욱 진솔한 대화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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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조는 다시 일어서서 투쟁해야 한다.

    그 투쟁은 회사를 겨냥한 투쟁이 아니라, 경쟁사들을 향한 투쟁이다. 임금을 포함한 원가절감 노력을 감행해 최고의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지난해 19년간 무분규 기록이 깨졌을 때 일본과 중국의 경쟁사들은 쾌재를 불렀다는 얘기도 들렸다.

     

    조선업계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길은 하나도 단합, 둘도 단합이다.

     

    빙하기 때 죽은 맘모스 사체의 뱃 속에서는 풀이 발견된다고 한다. 풀을 먹다가 갑자기 빙하가 닥쳤던 것이다. 오늘날 조선산업의 위기는 다시 예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환경이 송두리째 바뀐 상황이다. 과거에는 투쟁을 했어도 흑자구조를 유지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적자를 낼 정도의 위기 상황에서 투쟁은 기업의 생사를 가를 수 있다.

     

    현대중공업 노사가 하루 속히 새 협상에 나서 모두 새 비전을 향해 뛰어야  할 때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책이 시사하는 것처럼 우리가 내부에서 싸우는 사이에 기존 '치즈창고'들은 바닥나고, 새로운 치즈창고들은 경쟁사들의 손에 넘어갈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