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키우겠다던 정부 약속, 중기 보호책에 밀려 '있으나마나'
  • [취재수첩] 대기업과 1대 1로 붙어 승산이 없는 중소기업을 위해 정부는 다양한 지원책을 운영하고 있다. 중소기업만의 시장을 열어주거나, 대기업 힘을 뺀 다음 링 위에서 중소기업과 싸우게 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이들 사이에 낀 중견기업이다. 갓 중소기업 딱지를 땐, 무늬만 중견기업들도 정부의 '힘 빼기' 규제 정책을 그대로 얻어맞아야 한다. 매를 맞을 때 만큼은 예외 없이 대기업과 같은 대접을 받는 셈이다.

    맷집 키울 시간을 벌지 못한 중견기업들이 과거 중소기업 시절 썼던 성공신화를 뒤로 한 채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26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2010년 9월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추진 대책'을 발표했다. 대기업이 못 들어 오도록 진입장벽을 쳐놓고 중소기업들끼리 모여 장사할 수 있는 시장을 열어준 것이다.

    당시 정부는 중소기업이 아닌 모든 기업을 규제 대상에 포함시켰다. 중견기업 입장에선 하루 아침에 시장을 뺏긴 꼴이 됐다.

    대기업의 경우 일부 시장을 중소기업에 내줘도 그나마 버틸 힘을 갖췄다지만, 중견기업은 처지가 다르다. 당장 생존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올라선 기업 대부분은 업종 전문화를 통해 성장을 이뤄냈다. 데스크탑PC 전문기업 삼보컴퓨터가 대표적인 예다.

    삼보컴퓨터는 2013년 워크아웃 졸업 후 처음으로 매출 1000억원대를 돌파,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데스크탑PC(일체형 PC 포함)가 중소기업간 경쟁제품으로 걸려있기 때문이다.

    지금대로라면 삼보컴퓨터는 올해부터 3년 동안 유예기간을 거친 후 2018년 4월부터 공공조잘시장에 데스크탑 PC를 공급할 수 없게될 수도 있다.

    그동안 힘겹게 법정관리를 졸업하고 워크아웃을 통해 구조조정을 마친 삼보컴퓨터는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링 위에서 대기업과 생존을 건 싸움을 벌어야 한다.

    전문성 하나를 무기로 어렵게 중소기업 딱지를 떼내고 중견기업으로 올라섰지만, 돌아온 건 주력 사업에서 손을 떼라는 일방적 통보와 대기업과 곧바로 싸워야 한다는 가혹한 숙제 뿐이다.

    이에 따라 정부의 이율배반적 태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가 중견기업 육성을 위해 '성장 사다리' 제도를 마련하는 등 '중견기업특별법'을 제정, 시행중이지만 중소기업 보호 대책에 덮혀 힘을 못 쓰고 있다. 있으나 마나한 제도라는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세제혜택과 같은 정부가 중소기업을 직접 배려하는 제도가 있는가 하면, 대기업 힘을 빼 중소기업을 돕는 제도도 있다.

    대기업의 밥그릇을 뺏는 대표 정책으로는 '중소기업 적합업종'과 '중소기업간 경쟁제품' 제도가 있다. 이들 제도 모두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역할 분담을 통해 건강한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긍정적 가치를 지향한다.

    하지만 당초 취지와 달리 두 집단 사이에 낀 중견기업이 사실상 대기업으로 분류돼 땀흘려 일궈온 터전을 뺏기는 등 된서리를 맞고 있다.

    이처럼 중견기업 명찰을 단다고 해도 이로울 게 없다 보니, 기업분할이나 인력조정과 같은 꼼수를 부려 중소기업 신분을 유지하려는 기업들이 판치고 있다.

  • ▲ 이마트 용산점, LED 조명 창구가 외산으로 가득 차 있다. ⓒ뉴데일리경제.
    ▲ 이마트 용산점, LED 조명 창구가 외산으로 가득 차 있다. ⓒ뉴데일리경제.


    역차별 논란도 일고 있다. 국가간 FTA 확대로 외국산 제품들이 국내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 대기업과 중견기업들은 중소기업 보호 정책에 막혀 물건을 내다팔 수 없다. 그 사이 이미 시장을 외국기업에 전부 내준 경우도 있다.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시장의 경우 지난 2011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됐다. 이후 올 초 대기업과 중견기업에도 시장이 다시 열렸지만 분위기는 냉랭하다. 3년 동안 국내시장 대부분이 중국을 비롯한 외국기업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진입장벽이 무너졌다고 해도 수익성이 악화된 시장에 대기업과 중견기업이 뛰어들 이유는 없다. 중소기업들도 외국기업에 치여 사업을 접는 숫자가 빠르게 늘고 있는 상황이다.

    대기업과 중견기업 시장을 뺏어 중소기업에게 넘겨주는 제도의 경우 오히려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소비자 이익까지 침해한다는 이유로 지난 2006년 폐지된 후, 2010년 다시 부활 됐지만 각종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가 과도하게 시장 질서에 간섭하는 건 경제 효율성을 떨어뜨려 국가 경쟁력만 약화시킨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정부의 정책으로 일부 중소기업들이 매출액과 임직원 수 등 외형상 중견기업으로 성장을 앞두고 걱정이 가중되고 있다. 

    중소기업을 겨우 졸업한 새로운 중견기업들에게 맞는 정책 마련과 강력한 실행이 절실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