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 한해를 마무리하고 2017년 사업계획 마련에 분주해야 할 대기업 총수들은 6일 국정조사 증인으로 나서야 할 처지다.
말이 증인이지 사실상 죄인이 될 게 뻔하다. 속칭 '삥'을 뜯긴 피해자에게 '왜 삥을 뜯겼냐?'고 추궁하는 꼴이다. 삥을 뜯기고 온 피해자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법적 장치도 없다. 잘 해야 본전, 잠시라도 머뭇거리거나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간 망신을 당하게 된다.
증인으로 채택된 총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쁜 사람들이다.
가해자도 아닌데... 증인으로 서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국정조사 일정이 공개되자 마자 기업들의 경영활동은 사실상 올 스톱이다. 직원들은 예상질문 수집에, 총수들은 답변 준비에 일손을 놨다.
국정조사로 오해를 바로 잡고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는 기회로 삼으면 되는 게 아니냐고 반문 할 수 있지만, 국조는 윽박지르고, 호통치고, 망신주기용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번 사건의 프레임은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하다.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과 그 일당'의 국정농단 사건에 박근혜 대통령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지만 밝히면 된다.
하지만 최순실 의혹은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대한민국을 흔들며 '의심암귀(疑心暗鬼)' 상황으로 내몰았다. 국민들은 불안하다. 뭔가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촛불을 들었다. 촛불을 들고 보니 그동안 박근혜 정권에서 이뤄진 모든 것들이 부정부패로 얼룩져 보인다. 의심은 귀신을 만들었다. 통제가 안된다. 방향도 없다.
'의심'으로 만들어진 '귀신'은 대수롭지 않은 일까지 두려워하게 만들고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그동안 합법적으로 성사된 모든 것들이 이번 사건의 핵심인 최순실과 연결돼 보인다.
SK그룹이 사활을 걸고 올인했던 CJ헬로비전 인수합병. 실패로 끝난 것이 그동안 해온 일 중 제일 잘한 일 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경제의 '웃픈' 현실이다.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마무리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이와 정반대 양상이다.
전 임직원들이 한여름 땡볕 더위에 수박 한덩이씩 들고 전국 방방곳곳의 개인주주들을 찾아다니며 상황 설명과 이해를 기반으로 합병에 성공했지만, 뒤늦게 특혜 덕택 아니었냐고 압박하고 있다.
의심이 만든 귀신은 500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기금을 운용하고 있는 '슈퍼갑' 국민연금도 삼성의 일개 하수인으로 전락 시켰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경우 아무리 들여다 봐도 주주들의 동의를 기반으로 한 합법적 합병이다. 국민연금 보다 더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개인주주(20%)는 물론, 해외투자자들도 합병 찬성에 표를 던졌다. 가장 민주적인 방식인 '표결'로 이미 확인된 사안이다.
현재 검찰과 일부 언론들은 이번 합병을 두고 국민연금이 삼성에 특혜를 준 것이라며 '귀신'을 키우고 있다. 우려를 넘어 개탄스럽다.
삼성물산의 합병이 무산됐다면, 삼성엔지니어링과 같은 길을 걸었을 게 뻔하다. 주가 폭락으로 모든 주주들이 피해를 봤을 게 분명하다.
최순실 게이트가 만들어 낸 '의심암귀'가 전방위 재계 게이트로 번지고 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샐 수 밖에 없다.
기업들은 피해자다. 청와대가 나서 공익재단을 설립할 예정이니 좋은 일에 동참하라고 요구할 경우 기업들이 거절할 명분이 없다. 삼성전자의 작년 한해 기부금만 4000억원이 훌쩍 넘는다. 천문학적인 기부금을 각종 이권과 특혜를 위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지진, 수해 등 각종 재난지역을 돕고, 올림픽 말고는 국민적 관심이 없는 빙상 경기나 승마, 핸드볼, 양궁 등 비인기 종목육성을 지원하고, 걸음마 단계인 한류콘텐츠 확산에 앞장을 선 게 죄가 됐다.
10월 제조업 평균 가동률이 70.3%를 기록하며 가파르게 둔화되고 있다. 사실상 70% 붕괴 초읽기에 들어갔다. 우리 경제가 너무 어렵다.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시기에 재계 총수들에 대한 망신주기식 청문회는 분노에 찬 국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수는 있겠지만 '의심암귀'만 더 키우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동안의 경험상 한 번 실추된 기업 이미지와 신뢰도는 회복되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