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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준 포스코 회장이 갑작스레 사퇴 의사를 밝히며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포스코와 권 회장 모두 외압은 없었다고 부인하고 있지만, 그간 행보를 볼 때 여러 의문점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권 회장의 사퇴가 외압으로 여겨지는 몇 가지 정황들을 추려봤다.
우선 지난 4월 1일 열린 창립 50주년 행사때만 해도 권오준 회장은 사퇴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포항제철소에서 열린 창립 50주년 비전선포식 행사에 포스코는 정치권 인사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이강덕 포항시장만이 상징성을 고려해 자리했다.
포항에 지역구를 두고 있는 박명재 자유한국당 의원은 국내 철강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대표적 인사로 분류된다. 국회 철강포럼 수장을 맡고 있는 박명재 의원이기에 포스코 창립 50주년 행사 참석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포스코는 50주년 행사에 박 의원을 부르지 않았다. 현 정권과 정치색이 다른 야권 인사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는게 당시 포스코 내부 분위기였다. 또한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어 정치권과 엮이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안그래도 대통령 경제사절단에서 번번히 제외돼 온 권 회장 입장에서는 야권 국회의원을 초청한다는게 현 정권에 눈치가 보였을 것이라는 얘기다. 권 회장이 당시에도 사퇴할 의사가 있었다면, 포항시와 철강업 발전에 큰 힘을 실어주는 박 의원을 배제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사내에서는 "이렇게까지 정권의 눈치를 봐야 하나"하는 불만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 하나, 포스코는 5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며 처음부터 기자간담회를 계획하진 않았다. 하지만 행사를 불과 며칠 앞두고 권오준 회장이 기자간담회 개최 의사를 밝히며, 당시 조찬과 함께 간담회가 진행됐다.
간담회 내용은 모 방송국에서 연일 때리는 리튬사업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뤘다. 오죽하면 기자들 사이에서 이번 간담회는 '기승전리튬'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다.
권 회장이 예정돼 있지 않은 기자간담회까지 진행하며 리튬사업에 대해 적극적인 해명을 한 것은 본인이 향후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한 여지를 없애려던 의도로 풀이된다.
또한 간담회 중간에는 임기를 마무리하겠다는 강한 의지도 내보였다. 당시 권 회장은 CEO교체설에 대해 "저희로선 정도 경영을 하는 것이 최선책이다"며 "여러분들이 포스코가 계속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이렇게 포스코 100년 대계를 위해 한 몸 바치겠다는 권 회장이 갑자기 사퇴를 결정했다. 시점도 절묘하다. 황창규 KT 회장이 경찰에 소환된 다음날 바로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일각에서는 권 회장 역시 검찰조사가 임박해 명예롭게 퇴진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지난해 권 회장이 연임에 성공했을 때 즈음이었다. 포스코 내부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권 회장이 연임에 가장 큰 의지를 보이는 이유가 50주년 비전선포식에 본인 발자취를 남기고 싶어서라고 했다. 당시에는 웃어 넘겼지만 50주년 행사 후 3주일이 지나지 않아 사퇴를 밝힌 점으로 볼 때, 우연치고는 너무 잘 맞아 떨어진다.
권 회장은 19일 출근길에 기자들을 만나 "외압 같은건 없었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럼에도 아프면서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아련함이 전해지는건 비단 기자 뿐만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