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기관의 경영평가가 정부정책과 재정당국의 입맛대로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수서발 고속철도(SRT)를 운영하는 ㈜에스알(SR)의 예상 밖 '낙제점'을 두고 파문이 확산하고 있다. 평가결과를 두고 철도업계 안팎에서 신뢰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가운데 권태명 대표이사가 중대 결심을 고민하는 것으로 전해져 SR의 내부 혼란이 가중될 전망이다.
SR은 지난 19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19년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에서 한국철도공사(코레일), 대한석탄공사와 함께 공기업 부문에서 낙제점에 해당하는 D등급(미흡)을 받았다.
경영평가를 잘받아 성과급을 더 받으려고 고객만족도 조사를 조작한 코레일과 지난해 각종 지표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SR이 같은 D등급을 받았다는 것에 철도업계 안팎에선 이해가 안된다는 반응이다.
기재부는 올해 평가에서 안전분야와 고객만족도 조사 조작을 엄격히 평가했다고 강조했다. SR은 지난해 안전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행정안전부 주관 안전문화대상을 받았고 재난시나리오 최우수상, 고용노동부가 주관한 안전평가에서도 A등급을 받았다. 철도업계 최초로 안전보건경영시스템 인증도 받았다. 안전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경영이나 대국민 서비스, 사회적 가치 등의 평가에서도 낙제점을 받을만한 요소가 없다는게 철도업계 안팎의 중론이다. SR의 한 관계자는 "최종평가를 앞두고 받은 중간평가 보고서에서도 특별히 문제될만한 지적사항이 없어 이의제기도 안했다"고 말했다. -
뉴데일리경제가 23일 입수한 이번 경영평가 성과급 산정을 위한 범주별 평가등급을 보면 절대등급의 경우 SR은 경영관리와 주요사업에서 모두 C등급(보통)을 받았다. 종합평가에서도 C등급을 받았다.
그러나 상대등급에서는 경영관리와 주요사업에서 C등급을 받고도 종합평가에서 D등급으로 평가등급이 내려갔다. 경영관리와 주요사업에서 모두 C등급을 받고도 종합등급이 떨어진 공기업은 SR이 유일하다. 경영관리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도 주요사업에서 낮은 점수를 받거나 그 반대의 경우는 모두 종합평가에서 중간등급을 받았다. 한국남부발전의 경우 경영관리에서 A등급(우수), 주요사업에서 C등급을 각각 받고 종합평가에서 B등급(양호)으로 분류됐다. 석탄공사도 경영관리 E등급(아주미흡), 주요사업 C등급을 받고 종합평가에서 D등급을 받았다. SR만 이렇다 할 원칙없이 종합평가가 하락한 것이다.
과거 경영평가에 참여했던 한 철도전문가는 "경영평가 첫해 너무 좋은 성적을 주면 해당기관이 기고만장해 사고를 칠 수도 있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의 의미로 평가를 깐깐하게 했을 수 있다"면서 "경영평가할때 규모가 작은 기관은 규모가 큰 기관(코레일)보다 상대적으로 저평가하는 기조도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 사례를 보면 2017년 준시장형 공기업으로 첫 경영평가를 받았던 그랜드코리아레저가 E등급, 한국전력기술과 한전KPS가 D등급을 각각 받았다.
하지만 같은해 한전KDN과 한국가스기술공사는 각각 C등급으로 평가됐다. 첫해라고 해서 무조건 낙제점을 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에대해 전문가는 "SR이 황금노선을 운영하고 있어 경영실적에서 유리한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도 평가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면서 "코레일이 고객만족도 조사 조작과 실적 부진으로 낙제점을 받은 상황에서 경쟁상대인 SR이 대조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면 코레일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을 수 있다"고 했다. 철도업계의 또다른 관계자는 "내가 잘했거나 잘못한 부분을 평가받는게 아니라 경쟁관계에 있는 기관의 사정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 아니냐"면서 "평가결과에 따라 기관장 경고를 받고 심하면 해임까지 건의하는 중요한 평가를 비계량평가를 통해 멋대로 결정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관행"이라고 지적했다. -
SR 내부에선 이번 평가로 노조가 경영진과 등을 돌리는 등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SR은 5년 연속 무분규 임금협약 체결을 비롯해 노사상생 선언, 임금피크제 도입, 가족친화 우수기관 인증 등 노사관리 우수 기관으로 꼽혀왔다.
그래서 SR 노조는 이번 경영평가 결과에 낙담한 모습이 역력하다. 노조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 코레일은 분식회계 적발로 임직원 성과급을 반납하고 고객만족도조사 조작까지 서슴없이 자행했는데도 SR과 같은 등급이다. 사측은 무엇을 위해 경영평가에 열을 올린 것이냐"며 "앞으로는 경영평가를 이유로 직무급제, 조직개편, 서비스 질 향상 등의 소리를 하면 현장직원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경영진이 심리적 피해를 당한 현장직원을 제대로 위로하지 않으면 다음엔 사측에 부고장이 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영평가를 잘 받아보겠다고 의기투합했다가 뜻밖의 참담한 성적표를 받고서 사측에 대한 신뢰를 거둔 모습이다.
경영진도 충격으로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경영평가를 진두지휘한 부서 책임자는 이번 결과에 책임을 지겠다며 인사이동을 자청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최종 책임자인 권 사장도 깊은 고민에 빠진 것으로 전해졌다.SR 내부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권 사장이 이번 경영평가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기관장 경고를 받아서가 아니라 열심히 해준 직원들 볼낯이 없어 생각이 많은 것 같다"고 전했다. 권 사장은 임기가 1년쯤 남았다.
권 사장은 취임 초기 조직장악·현상유지용 CEO에 가깝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동안의 행보를 보면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사사로이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돌출행동을 삼가며 묵묵히 조직의 가치를 중시해 왔다는 평가다. 직원과 함께 흑자·모범 경영을 이끌고도 낙제점을 받은 권 사장이 이번 평가결과를 허투루 여기지 않을 거라는 분석이 제기되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