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한구 "농산물 협상은 늘 고통" … 추가 개방 시사해 논란 농식품부 "해당 발언 전후로 협의나 설명, 회의 일절 없어"전문가 "한국이 얻을 수 있는 실익 크지 않을 것" 우려
  • ▲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산업통상자원부
    ▲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산업통상자원부
    미국과의 관세 협상 시한이 임박한 가운데 정부 부처 사이의 조율 부재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농산물 시장 개방 가능성을 시사한 가운데, 정작 농림축산식품부와는 사전 협의조차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농산물 개방 문제는 관세 협상에서 소고기 월령 제한 폐지와 함께 우리 정부가 잠재적으로 지닌 핵심 카드이자, 농민들의 생존이 걸린 '뜨거운 감자'다. 

    17일 정치권과 관계 당국 등에 따르면 여 본부장은 지난 5일부터 10일(현지시간)까지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 관세 협의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 농식품부와는 관련 협상 내용이나 향후 대응 방안 등을 논의하는 회의는 단 한 차례도 갖지 않았다. 

    여 본부장이 지난 14일 방미 결과를 설명하는 기자간담회를 갖고 "어느 나라와 협상을 하건 농산물이 고통스럽지 않은 적은 없었고, 그러면서 우리의 산업경쟁력은 강화됐다"며 "농산물 부문도 지금은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15일(현지시간) "한국은 시장을 개방할 의향이 있어 보인다. 어떻게 될지 곧 알려 주겠다"고 말했다. 

    여 본부장의 이같은 발언은 농산물 시장 개방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즉각 농업계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논란이 일파만파 확산되는 양상이다. 

    그럼에도 여 본부장이 방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는 물론 논란이 불거진 기자간담회 이후에도 농식품부와 해당 사안을 논의하는 자리는 단 한차례도 마련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정작 농업 분야의 주무 부처는 배제된 채, 중대한 통상 정책 방향이 외부에 먼저 알려지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더욱이 농업 분야와 직결된 민감하고 중대한 사안임에도 산업부가 핵심 농업 현안에 대해 농식품부와 사전 조율 없이 독단적으로 메세지를 내놓은 것이어서, 부처 간 정책 조율 체계에 균열이 생긴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농식품부는 해당 발언에 대해 사전 공유나 협의가 없었다는 입장이다. 

    농식품부 당국자는 "여 본부장이 결정되지 않은 사안을 독단적으로 언급하며 농업계를 크게 자극시켰으나, 해당 발언 전후로 농식품부와 일절 대화나 협의는 물론 설명도 없었다"며 "통상 협상은 '맨데이트(협상지침)' 내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현장에 가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여 본부장의 발언은 농식품부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안으로 매우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통상 협상 과정에서 민감한 발언은 관계 부처 간 충분한 협의와 조율을 거쳐야 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자 룰인데, 이번 사례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셈"이라며 "과거 협상 전례에서 보듯 농업 협상은 매우 신중해야 하며, 전체 협상 구도로 봤을 때도 이번 상황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는 "협상의 핵심은 타결이 아니라 국민이 결과를 접했을 때 얼마나 안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라며 "계절 관세와 농산물 세이프가드, 저율할당관세(TRQ) 등도 통상협상에서 농업계에 안심을 주고 산업에 미치는 충격의 속도를 완화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이 당국자는 특히 "여 본부장 발언 이후 농민단체 항의가 빗발쳐 이를 진화하느라 곤혹스럽다"며 "사전에 협의나 정보 공유도 없었던 만큼 대응에도 한계가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를 두고 통상 부분에 있어 관계 부처와의 충분한 조율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협상 전반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독단적으로 민감한 통상 메세지를 외부로 발신하는 것은 외교적 유연성을 해치고 되려 협상 카드도 소진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도 협상 전략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서진교 GSnJ 인스티튜트 원장은 "현재 통상협상에 앞서 국내적으로도 부처간 협의를 통해 내부 입장 정립을 하고 있는 단계"라며 "이를 건너뛰고 농산물 개방 가능성을 거론한 것은 농축산업을 내주는 카드로 보고 여론의 반응을 떠보려는 시도로 읽힌다"고 말했다. 

    서 원장은 이어 "농업 부문 카드는 미국 입장에선 협상 지렛대로 쓸 수 있지만 실질적 이익을 챙길 수 있는 분야는 아니어서 협상의 최종 랜딩존(합의점)을 고려할 때 한국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크지 않아 보인다"며 "결과적으로 제대로 얻는 것 없이 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농민단체들도 강하게 저항하고 나섰다.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가 전날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데 이어 한국종합농업단체협의회는 김정관 산업부 장관 후보자에 관세 협상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힐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전국한우협회는 내일 대통령실 앞에서 농축산물 개방 반대 기자회견에 나설 계획이다. 

    강정현 한국종합농업단체협의회 집행위원장은 "농업 분야 추가 개방은 농업계 격렬한 반발이 불 보듯 뻔한 사안인데도 언급부터 먼저하고 나선 것은, 결국 통상 협상 실패 책임을 농업계 반발로 돌리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협상의 효율성 보다는 만에 하나 협상이 불발될 경우 그 책임이 쌀, 소고기 등 민감한 농업 이슈에 있었다는 식의 면피성 논리를 만들기 위한 것처럼 비친다"며 "국내에서 농업 문제를 오히려 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우려스럽고, 농업을 통상협상의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