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 계기 드러난 에너지 공급망 취약성 해소산업장관 "전쟁 끝나도 비중동산 원유 도입 확대""미국산 경질유 중동산 중질유와 섞어 쓰기 적합"미국산 에너지 수입 확대해 관세 협상에 활용 전략
  • ▲ 한국석유공사 서산비축기지. (사진=석유공사) ⓒ전성무 기자
    ▲ 한국석유공사 서산비축기지. (사진=석유공사) ⓒ전성무 기자
    정부가 중동 의존도가 높은 에너지 공급망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하기 위한 전략에 본격 착수했다. 중동 전쟁을 계기로 드러난 공급망 취약성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산 원유 도입 확대와 수송 루트 다변화를 추진하는 한편, 이를 대미 통상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20일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정부는 전쟁이 끝나더라도 비중동산 원유 도입을 확대하고, 수송 루트를 다원화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고 밀어붙일 계획이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19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언급하며 "이번 위기의 본질은 우리가 중동산 원유와 호르무즈 해협이라는 특정 항로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경제성 때문에 가장 빨리 올 수 있는 루트만 고집했지만, 이번 사태를 겪으며 '빠른 게 다는 아니다'라는 교훈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중동 지역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가격과 효율' 중심의 경제 논리에 기반한 선택이었다면, 이제는 공급망 안정과 리스크 분산이 우선되는 시대로 전환됐다고 강조했다. 김 장관은 "과거 여러 차례 중동 전쟁을 겪고도 다변화에 실패했던 것은 결국 비용 문제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큰 리스크를 경험했다"고 진단했다.

    현재 한국은 원유 도입의 약 70%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수송 비중도 원유 61%, 나프타 54%에 달한다. 이번 중동 전쟁으로 해협 봉쇄 가능성이 현실화되면서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이 여실히 드러났다. 특히 나프타는 '산업의 쌀'로 불릴 만큼 석유화학 산업 전반에 필수적인 기초 원료라는 점에서 공급망 충격이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김 장관은 이를 두고 "싼 맛에 한 곳에 의존하는 시대는 끝났다"며 "과거에는 비용 절감을 위해 딱 필요한 만큼만 제때 들여오는 '저스트 인 타임'(Just-in-Time)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재고를 충분히 확보하고 공급처를 쪼개는 '저스트 인 케이스'(Just-in-Case) 전략이 필수"라고 밝혔다.

    이는 필요한 만큼만 적시에 조달하는 기존 '저스트 인 타임' 방식에서 벗어나, 위기 상황을 전제로 한 구조적 대응 체계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재고를 기존 일주일 수준에서 한 달 이상으로 확대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정부가 특히 주목하는 대안은 미국산 원유다. 미국산 원유는 경질유로, 국내 정유·석유화학 산업에서 주로 사용하는 중동산 중질유와 혼합해 사용하기에 적합하다는 장점이 있다. 김 장관도 "미국산 경질유는 우리 정유사가 중동산 중질유와 섞어 쓰기에 가장 편한 유종이라고 하더라"라며 "중동산 의존도를 낮추는 과정에서 세계 최대 원유 수출국인 미국 비중이 커지는 것은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정유 공정 특성상 단일 유종만으로는 효율적 생산이 어려운 만큼, 원유 믹스 최적화 측면에서도 미국산 도입 확대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평가된다.

    미국산 에너지 수입 확대는 단순한 공급망 안정 차원을 넘어 통상 전략과도 맞물려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의 대미 무역흑자를 문제 삼고 있는 상황에서, 에너지 수입 확대는 무역 불균형을 완화하는 동시에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카드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 내부에서는 원유·가스 등 에너지 수입 확대를 관세 협상에서 활용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에너지 안보 정책이 곧 통상 협상의 레버리지로 연결되는 구조다.

    다만 이 같은 전략과 맞물려 추진 중인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프로젝트는 여전히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되지 않아 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한미 전략적 투자 관리 특별법' 통과를 기반으로 6월 '한미전략투자공사'를 출범시켜 투자 집행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전체 투자 규모 3500억달러 가운데 1500억달러는 조선업, 2000억달러는 에너지·첨단산업 등 국가안보 관련 분야에 투입될 예정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구체적인 사업 리스트는 공개되지 않았고, 루이지애나 액화천연가스(LNG) 수출 터미널 건설이나 캘리포니아 해수 담수화 사업 등이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와 달리 일본은 대미 투자 프로젝트를 단계적으로 구체화하며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은 총 5500억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 가운데 1차 프로젝트를 확정한 데 이어, 최근에는 소형모듈원자로(SMR)와 천연가스 발전소 건설 등을 포함한 2차 프로젝트까지 발표했다. 특히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한 발전 인프라 구축, 원전 및 가스 발전을 연계한 에너지 전략 등이 명확하게 제시됐다는 점에서 한국과 대비된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대해 김 장관은 "미국은 우리가 약속한 '3개월 내 한미전략투자공사 설립'이 실제로 이뤄지는지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사실 미국에서도 법 제정 후 공공기관을 3개월 만에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우리가 6월에 실제로 공사를 출범시킨다면, 미국은 한국이 말로만 협력을 외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나라라는 강력한 신뢰를 갖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현재 예비 검토단을 통해 프로젝트 논의를 지속하고 있다. 미국도 한국이 진정성을 갖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구체적 프로젝트를 밝히긴 어렵지만 핵심은 에너지와 조선 등 양국이 윈-윈(Win-win)할 수 있는 분야라는 점은 말씀드리고 싶다"고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이 일본과의 '속도전'에서 뒤처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김 장관은 "일본 프로젝트가 구체화하는 걸 한번 보면 발표한 것하고 실제 프로젝트가 진척되는 속도와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일본 발표만 보고 일본과 속도 경쟁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