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부터 개발도상국까지, '상대적 최약체' 평가이스라엘·브라질·멕시코 등 통화 대비 두 자릿수 하락파키스탄·베트남 등 개도국에도 밀린 원화 가치1년·3년 누적 기준으로 체감되는 원화 약세 심화확장재정·기업규제·한미 통화스와프 불발 … 외환 신뢰 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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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화 가치가 달러·유로 등 선진국 통화뿐 아니라 신흥·개발도상국 통화 대비로도 줄줄이 밀리면서 한국인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벼락거지'가 됐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원화 약세가 장기화되면서 원자재 및 물가 부담은 물론 원화 기준 자산 가치와 소비여력까지 함께 줄어드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시장에선 내수 취약성과 높은 가계부채, 서비스수지 부진에 더해 확장 재정, 기업 규제,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 불발, 대미 외교 불확실성 등이 겹치며 원화가 외환시장의 '상대적 약체 통화'로 밀려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일 인베스팅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원화 대비 주요국 통화의 연초 대비 상승률을 비교한 결과, 이스라엘 세켈화는 536원대로 올해 들어 18.35% 상승했다. 러시아 루블화는 16.07% 올랐고, 브라질 헤알화는 13.79% 상승했다. 헝가리 포린트화도 12.87%, 멕시코 페소화는 8.58%, 중국 위안화는 7.92%, 아르헨티나 페소화는 8.08%, 말레이시아 링깃화는 7.09%,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화는 6.75% 올랐다. 해당 통화들이 원화 대비 상승했다는 것은 그만큼 원화 가치가 떨어졌다는 의미다.

    특히 개발도상국 통화 대비 원화 약세가 뚜렷했다. 파키스탄 루피화는 연초 대비 5.25% 올랐고, 베트남 동화도 4.56% 상승했다. 칠레 페소화는 5.91%, 대만 신타이비화는 4.37%, 태국 바트화는 1.4%, 필리핀 페소화는 0.04% 상승했다. 원화가 미국·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와 중남미, 저소득·개발도상국 통화 대비로도 밀리고 있는 셈이다. 

    1년 기준으로 보면 원화 가치 하락은 더 선명해진다. 이스라엘 세켈은 원화 대비 36.03%  올랐고, 헝가리 포린트화는 27.83%, 브라질 헤알화는 23.84%, 멕시코 페소화는 22.01%,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화는 20.79%, 말레이시아 링깃화는 17.01%, 칠레 페소화는 15.78% 상승했다. 파키스탄 루피화도 10.41%, 태국 바트화는 10.2%, 베트남 동화는 7.91% 올랐다.

    3년 누적 기준으로는 원화 약세 체감 폭이 더 커진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화는 3년간 원화 대비 38.93% 상승했고, 말레이시아 링깃화는 33.73%, 러시아 루블화는 31.05%, 헝가리 포린트화는 30.47%, 태국 바트화는 22.27%, 중국 위안화는 20.66% 상승했다. 파키스탄 루피화도 17.5%, 루마니아 레우화는 17.86%, 멕시코 페소화는 16.2% 올랐다. 과거에는 상대적으로 물가가 싸다고 여겨졌던 국가에서도 원화 환산 비용이 크게 불어난 셈이다.

    선진국 통화 대비 약세도 이어졌다. 미국 달러화는 원화 대비 연초 대비 4.64%, 1년간 9%, 3년간 14.84% 상승했다. 유로화는 연초 대비 3.88%, 1년간 11.99%, 3년간 24.48% 올랐다. 영국 파운드화도 연초 대비 4.52%, 1년간 9%, 3년간 23.29% 상승했다. 미국과 유럽 여행이 비싸진 것은 물론 이제는 일부 동남아·중남미 여행 비용까지 부담스러워진 구조다.

    다만 모든 신흥국 통화 대비 원화가 약세를 보인 것은 아니다. 인도 루피화는 원화 대비 연초 대비 -1.02%, 터키 리라화는 -1.97%,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는 -2.36%, 이집트 파운드화는 -4.44%를 기록했다. 베네수엘라 볼리바르화는 연초 대비 -43.24%, 1년간 -81.14%, 3년간 -94.53% 급락했다. 일부 고물가·통화불안 국가보다는 원화가 강했지만, 주요 여행·교역 대상국과 상당수 신흥국 통화 대비로는 원화 약세가 뚜렷했다.

    원화 약세는 국내 소비자 구매력을 직접적으로 갉아먹는 요인이다. 해외여행 비용과 유학비, 해외 직구 가격이 오르는 것은 물론 기업의 원자재·부품 수입 부담도 커질 수 있다. 수입물가 상승은 시차를 두고 국내 물가와 기업 마진에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시장에선 내수 취약성과 편중된 산업 구조를 원화 약세를 부추기는 국내 요인으로 꼽는다. 한국은 민간 소비 회복력이 약한 데다 서비스수지 부진까지 겹치면서 외부 충격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구조다. 태국·말레이시아·필리핀 등은 관광, 송금, 젊은 인구 등을 바탕으로 내수 버팀목이 작동하지만, 한국은 고령화와 가계부채, 서비스수지 적자가 맞물리며 환율 변화가 곧바로 내수 부담으로 전가되기 쉽다는 분석이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1분기말 한국의 가계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87.8%로, 말레이시아(69.3%), 베트남(24.9%), 필리핀(11.6%)보다 높다. 인구 구조 측면에서도 한국은 고령층 비중 확대로 소비 탄력성이 낮은 반면, 필리핀(25세)과 말레이시아(30세)는 상대적으로 젊은 인구 구조를 기반으로 내수 확장 여력이 크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환시장 참여자들 사이에선 원화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특히 정부의 확장 재정과 낮은 금리 수준, 기업 규제 강화 등이 원화 약세 압력을 키우는 요인으로 거론된다. 이재명 정부 들어 대규모 민생소비쿠폰 등 재정 지출이 확대된 데다 노란봉투법 시행, 대미 협력 약화 논란이 겹치면서 외환시장 불안 심리를 자극했다는 시각도 있다.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 불발을 두고도 이 같은 정책 기조가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3일 방한한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을 만나 양국 간 통화스와프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4월 FOMC에서 ‘한미 통화스와프’ 논의는 없었다. 시장 일각에서는 확장 재정과 대미 외교 불확실성이 맞물리면서 미국 측의 협조를 끌어내지 못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제기된다.

    원화 가치의 지속적인 하락이 외국인 투자심리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원화 약세가 길어질수록 외국인 투자자들은 환차손 부담을 의식해 한국 자산 투자에 신중해질 수 있다. 국내 기업들도 외화를 벌어들인 뒤 원화로 환전하는 데 소극적일 가능성이 커지면서 원화 수요 기반이 약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증권가 관계자는 “지금의 원화는 외환시장에서 상대적 최약체 통화로 평가받고 있다”며 “한국은 수출·수입 모두에서 중국 비중이 높아 중국 경기 둔화나 미·중 리스크가 커질 때 환율이 더 크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에 국내 정치 불안정과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이 겹치며 원화 약세 압력이 복합적으로 누적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김대종 세종대 교수는 "국내로 유입되는 외국인 직접투자보다 기업의 해외 유출이 약 2배 많고, 대학생 취업률도 44%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지 못할 경우 자본 유출이 지속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법인세 인상과 노란봉투법 등 각종 규제로 기업 부담이 커진 점도 원화 약세와 자본 유출 우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 ▲ ⓒ인베스팅. 주요국 통화 대비 원화 환율 비교.
    ▲ ⓒ인베스팅. 주요국 통화 대비 원화 환율 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