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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박정희(朴正熙)-이병철(李秉喆)의 위대한 만남
한 혁명가가 기업인들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는 계기였다. 가난한 농민 출신이고 질박(質朴)한 생활이 몸에 밴 박정희는 부자(富者)들에 대해서는 생래적인 거부감을 가졌으나 그의 실용적이고 유연한 사고는 그런 기업인들을 부려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쪽으로 선회하게 만들었다.
趙甲濟
작년은 삼성(三星)그룹 창립자 이병철(李秉喆)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삼성전자는 작년 매출액이 1300억 달러를 넘어 세계 22위의 회사가 되었다. 이런 거대한 발전의 배경에는 이병철(李秉喆)과 박정희(朴正熙)의 역사적 만남이 있었다. 이는 한국의 진로(進路)를 바꾼 역사적 만남이었다.
삼성물산 사장 이병철(李秉喆)은 회고록에 1961년 6월27일 군사정부의 실력자 박정희(朴正熙) 부의장과 나눈 대화를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
<그는 부정 축재자 11명의 처벌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부정 축재 제1호로 지목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말문을 열 것인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박(朴) 부의장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좋으니 기탄없이 말해 주십시오”라고 재촉했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소신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부정축재자로 지칭되는 기업인에게는 사실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朴 부의장은 뜻밖인 듯 일순 표정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탈세를 했다고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러나 현행 세법은 수익을 훨씬 넘는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 戰時(전시) 비상사태하의 稅制(세제) 그대로입니다. 이런 세법하에서 세율 그대로 세금을 납부한 기업은 아마 도산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만일 도산을 모면한 기업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朴 부의장은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액수로 보아 1위에서 11위 안에 드는 사람만이 지금 부정 축재자로 구속되어 있지만 12위 이하의 기업인도 수천, 수만 명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도 똑같은 조건하에서 기업을 운영해 왔습니다. 그들도 모두 11위 이내로 들려고 했으나 역량이나 노력이 부족했거나 혹은 기회가 없어서 11위 이내로 들지 못했을 뿐이고 결코 사양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선을 그어서 죄(罪)의 유무를 가려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사업가라면 누구나 이윤을 올려 기업을 확장해 나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업을 잘 운영하여 그것을 키워 온 사람은 부정 축재자로 처벌 대상이 되고 원조금이나 은행 융자를 배정받아서 그것을 낭비한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고 한다면 기업의 자유경쟁이라는 원칙에도 어긋납니다. 부정 축재자 처벌에 어떠한 정치적 의미가 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어디까지나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朴 부의장은 “그렇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기업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그 생계(生計)를 보장해 주는 한편, 세금을 납부하여 그 예산으로 국토방위는 물론이고 정부 운용, 국민 교육, 도로 항만 시설 등 국가 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부정 축재자를 처벌한다면 그 결과는 경제 위축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장 稅收(세수)가 줄어 국가 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오히려 경제인들에게 경제 건설의 일익(一翼)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될 줄 압니다.”
朴 부의장은 한동안 내 말을 감동 깊게 듣는 것 같았으나 그렇게 되면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국가의 大本(대본)에 필요하다면 국민(國民)을 납득시키는 것이 정치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한동안 실내는 침묵에 빠졌다. 잠시 후 미소를 띤 朴 부의장은 다시 한 번 만날 기회를 줄 수 없겠느냐고 하면서 거처를 물었다. 메트로 호텔에서 연금 상태에 있다고 했더니 자못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튿날 아침 이병희 서울분실장이 찾아오더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다른 경제인들도 전원 석방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나와 친한 사람들일 뿐 아니라 부정 축재자 1호인 나만 호텔에 있다가 먼저 나가면 후일에 그 동지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는가. 나도 그들과 함께 나가겠다”고 거절했다>(《호암자전》)
박정희(朴正熙)는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이석제(李錫濟)를 불렀다.
“경제인들은 이제 그만했으면 정신 차렸을 텐데 풀어주지.”
“안 됩니다. 아직 정신 못 차렸습니다.”
“이 사람아, 이제부터 우리가 권력을 잡았으면 국민을 배불리 먹여 살려야 될 것 아닌가. 우리가 以北만도 못한 경제력을 가지고 어떻게 할 작정인가. 그래도 드럼통 두드려서 다른 거라도 만들어 본 사람들이 그 사람들 아닌가. 그만치 정신 차리게 했으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국가의 경제 부흥에 그 사람들이 일 좀 하도록 써먹자.”
이석제는 朴 부의장의 이 말에 반론을 펼 수 없었다. 다음날 이석제는 최고회의 회의실에 석방된 기업인들을 모아 놓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차고 있던 큼지막한 리볼버 권총을 뽑아들더니 책상 위에 꽝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놓고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여러분들을 석방시키는 일에 반대했습니다. 그런데도 朴 부의장께서 내놓으라고 하니 내놓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원조 물자, 국가 예산으로 또 다시 장난치면 내 다음 세대, 내 후배 군인들 중에서 나 같은 놈들이 나와서 다 쏴죽일 겁니다.”
6월 29일 아침 이병철(李秉喆) 사장이 묵고 있던 메트로호텔을 찾아온 이병희 정보부 분실장은 기업인들이 전원 석방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이병철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박정희의 유연한 정신세계와 겸손한 자세, 그리고 사심(私心)이 적은 태도가 그로 하여금 단기간에 경제의 본질을 배우게 했다. 실천력을 중시하는 박정희는 이론에 치우치는 학자나 신중한 관료들보다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기업인들과 더 잘 호흡이 맞게 된다. 전경련 상근부회장을 지낸 적이 있는 김입삼(金立三)은 1961년 6월 하순에 있었던 박 의장과 기업인들의 만남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한국경제신문 연재 《김입삼 회고록》).
<박정희 부의장은 유원식 최고위원을 통해서 金容完(김용완) 경성방직 사장(뒤에 전경련 회장), 全澤珤(전택보) 천우사 사장, 鄭寅旭(정인욱) 강원산업 사장을 최고회의로 불렀다.
“경제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견(高見)을 듣기 위해서 뵙자고 한 것입니다. 순서 없이 평소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말씀 해주시지요.”
정중하고 공손한 말투였다. 전택보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1947년에 홍콩에 갔을 때 목격한 일입니다. 모택동 군에 쫓겨 홍수처럼 밀려온 피란민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물까지 수입해서 마시는 홍콩에서 수백 만의 피란민들이 직장을 갖고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그 비결이 궁금했습니다. 바로 ‘保稅(보세)가공’을 해서 먹고살고 있더군요. 홍콩에 비교해서 우리 여건은 유리하다고 봅니다.” >
전택보가 실감 있게 설명해가도 박정희는 확실한 감을 잡지 못했다고 한다. ‘보세(保稅)가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박정희는 “미안하지만 내일 또 시간을 낼 테니 다시 오셔서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이튿날에도 경제 강의 같은 기업인들의 설명이 계속 되었다고 한다.
김용완 사장은 “대학이 너무 많다. 4년제 대학의 반은 기술 전문대학으로 개편하여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김 사장은 또 “부정축재혐의로 구속된 기업인들을 풀어주십시오. 기업인이란 개미처럼 죽을 때까지 일할 운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일할 수 있는 기업인을 양성하는 데는 20~30년이 걸립니다”라고 했다.
정인욱 사장은 “우리나라에선 지하 30m 이하의 심층에는 어떤 광물이 있는지 탐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를 탐사하여 실업자에게 일터를 만들어주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경제정책에 목말라하고 있던 박정희는 이런 충고를 너무나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여 기업인들은 오히려 긴장감을 느낄 정도였다는 것이다.
박정희와 이병철 등 기업인의 만남은 조국 근대화를 꿈꾸던 한 혁명가가 기업인들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가난한 농민 출신이고 질박(質朴)한 생활이 몸에 밴 박정희는 부자(富者)들에 대해서는 생래적인 거부감을 가졌으나 그의 실용적이고 유연한 사고는 그런 기업인들을 부려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쪽으로 선회하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그러나 대기업이 대자본을 바탕으로 하여 권력에 도전한다든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드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박정희 시대의 정경유착은 국가가 철저히 대기업을 통제하여 국가의 방향대로 몰고 가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후대의 정경유착과 성격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