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노총·삼성전자 노조 반발에 발의 이틀 만에 철회“임금 통화 지급 원칙 훼손” 노동계 일제히 반발“정책 실험하듯 법안 내선 안 돼” 졸속 입법 비판 확산
  • ▲ 박민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현대건설 철근누락 보고 다음 날, 오세훈 서울시장 GTX 삼성역 관련 지시' 관련 문건을 공개하고 있다.ⓒ뉴시스
    ▲ 박민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현대건설 철근누락 보고 다음 날, 오세훈 서울시장 GTX 삼성역 관련 지시' 관련 문건을 공개하고 있다.ⓒ뉴시스
    근로자의 동의를 받아 성과급 등 임금 일부를 지역화폐로 지급할 수 있도록 하려던 법안이 발의 이틀 만에 철회됐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 이어 삼성전자 최대 노동조합까지 법안 철회를 요구하는 등 노동계의 반발이 확산하자 발의자가 법안을 거둬들였다.

    10일 정치권에 따르면 박민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8일 대표 발의한 근로기준법 일부개정안을 철회하기로 했다.

    앞서 박 의원은 지난 8일 임금의 일부를 지역사랑상품권 등 통화 이외의 수단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일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아니며 현재 발의 단계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임금을 통화로 근로자에게 직접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법령이나 단체협약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에만 통화 이외의 수단으로 지급할 수 있다.

    개정안은 여기에 근로계약서 등을 통한 ‘근로자의 명시적 동의’를 예외 사유로 추가했다. 단체협약에 규정이 있거나 개별 근로자가 동의하면 임금 일부를 ‘지역사랑상품권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통화 이외의 것’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박 의원은 기업이 창출한 이윤에 따라 지급되는 성과급과 보너스가 지역 내 소비로 이어지도록 해 지역경제의 선순환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외국인 근로자의 임금이 해외로 송금돼 지역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점도 법안 발의 배경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발의 직후 양대노총을 중심으로 임금의 통화 지급 원칙을 훼손하고 근로자의 임금처분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법안은 결국 양대노총이 철회를 요구한 지 하루, 삼성전자 노조까지 공개 반발에 나선 당일 철회 수순을 밟게 됐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지난 9일 각각 성명을 내고 개정안 철회를 촉구했다. 근로자의 명시적 동의를 전제로 하더라도 노사 간 힘의 불균형을 고려하면 근로자가 사용자의 요구를 현실적으로 거부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정책 목표 자체에는 공감할 수 있지만 이를 근로자의 임금 지급 방식과 연결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한국노총은 전날 성명을 통해 “노동자의 임금은 정책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노동의 대가로 온전히 보장돼야 할 권리”라며 “임금 직접 지급 원칙을 훼손하는 개정안을 철회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노총은 법안이 명시적 동의를 전제로 하고 있더라도 채용 과정이나 인사평가, 조직문화 등을 이유로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동의를 요구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성과급과 보너스 역시 노동자가 창출한 성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인 만큼 사용 지역과 가맹점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지급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민주노총도 같은 날 성명을 내고 개정안이 임금 통화 지급 원칙을 훼손하고 근로자의 실질임금을 잠식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동의는 고용관계의 힘의 불균형 속에서 실질적인 자유의사이기 어렵다”며 “인사상 불이익을 우려해 지역사랑상품권 지급을 거부하지 못하는 근로자가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지역사랑상품권은 사용할 수 있는 지역과 가맹점이 제한되고 유효기간도 존재하기 때문에 같은 액면가의 현금보다 활용도가 낮다는 게 민주노총의 설명이다. 이에 따라 지역화폐 지급이 사실상 실질임금을 삭감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민주노총은 개정안이 지역사랑상품권뿐 아니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통화 이외의 것’을 임금 지급 수단으로 규정한 점도 문제 삼았다. 지급 비율이나 수단에 대한 구체적인 제한 없이 시행령을 통해 통화 외 지급수단이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법안이 실제로 작동한다면 협상력이 약하고 선택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중소사업장이나 비정규직 노동자가 우선적인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외국인 근로자의 해외 송금을 법안 발의 배경으로 내세운 데 대해서도 “국적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을 다르게 취급하려는 발상으로 비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삼성전자 노조도 정치권을 향해 더욱 강도 높은 비판을 내놨다.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는 이날 성명을 내고 “근로자의 명시적 동의가 있더라도 임금 일부를 지역사랑상품권으로 지급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임금 지급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시도”라며 개정안의 즉각적인 철회를 촉구했다.

    이어 “지역사랑상품권이 현금 통화와 다를 바 없다고 확신한다면 실험적인 시도를 근로자의 임금에 적용할 것이 아니라 법안 발의에 이름을 올린 국회의원들의 세비에 먼저 적용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노조는 사용 지역과 가맹점, 유효기간이 제한된 상품권으로 임금을 지급하면 근로자의 생계와 임금 사용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용자와 근로자의 관계에서 동의가 사실상 강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노동계 관계자는 “임금처럼 근로자의 생계와 직결된 문제를 충분한 의견 수렴도 없이 정책 실험하듯 법안으로 내놓아서는 안 된다”며 “논란이 커지자 이틀 만에 철회하는 식이라면 입법의 신뢰만 떨어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