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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slow)가 뜨고 있다. ‘빨리 빨리’에 익숙해진 한국인들에게 ‘느림’이란 무엇일까. ‘느림의 미학’은 예로부터 선비들의 생활철학이 아니던가.
몇 해 동안 장을 발효시킨 음식이 슬로우 푸드(Slow food)고, 뒷짐 짓고 걸어 다녔던 삶이 바로 슬로우 라이프(Slow life)다.
바쁜 일상에 쫓기다 보니 다시 ‘느림’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1986년 이탈리아 부라(Bra) 지방에서 슬로우 푸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미국의 맥도널드 햄버거가 이탈리아 로마에 진출하자 이에 분개한 사람들이 패스트푸드 반대운동을 벌이면서 시작된 것이다.
‘안티 맥도날드운동’으로도 불린다. 비만이나 당뇨 등을 일으키는 패스트푸드에 반기를 들고 정성이 담긴 전통음식으로 건강한 먹을거리를 되찾자는 취지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장독대에서 발효시키는 된장과 고추장, 깊은 땅속에 묻어둔 묵은지까지 우리 전통음식은 음식이 탄생하는 과정부터 ‘슬로우’다. 조상들의 밥상에 올라왔던 소박한 찌개와 반찬만 먹어도 슬로우 푸드를 실천하는 셈이다.
먹거리에서 생활환경으로 ‘슬로우’가 확대됐다. 1999년 이태리 중북부 작은 마을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ti)에서 슬로우 시티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시장이던 파울로 사투르니니(슬로우시티 창립자)씨가 ‘느리게 살자’고 호소한데서 비롯됐다.
그레베 인 키안티에는 흔한 대형 슈퍼마켓이나 자동차도 없다. 주민들은 직접 농수산물을 생산하고 걸어 다니는 것이 일상이다.
우리나라도 2000년대 중반엔 들어서 전라남도 담양, 장흥, 완도, 신안 등 4개 군이 국제 슬로우 시티에 지정됐다.
슬로우 푸드와 슬로우 시티 모두 느림을 행복한 삶으로 꼽는다. 어떤 이들은 ‘천국의 삶’이라고도 표현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슬로우 쇼핑(Slow shopping)으로 눈을 돌려보자. 천천히 먹고, 여유를 즐겼다면 이제 느리게 걸으며 쇼핑하자.
인사동 거리를 유유자적 걸으며 물건을 사는 것, 산책이나 데이트로 쇼핑가를 걷는 것, 시장에서 공연도 보고 이것저것 흥정도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이것이 슬로우 쇼핑이다.
슬로우 푸드를 주창하는 세계음식문화연구원 양향자 이사장은 "전통시장의 슬로우 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추구하는 이상적인 쇼핑공간"이라고 말했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삶이 묻어 있는 시장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여유로움이 숨어있는 보물상자란 얘기다.
한국적인 덤과 정(情)을 느끼고 싶다면 더욱 슬로우 쇼핑이 필요하다. 마트의 1+1 행사와 시장 상인들이 마음으로 듬북 얹어주는 덤과 그 정의 차이를 비교해 보라.
단골끼리 안부를 묻고 걱정해주는 인정도 남아있다. 우리 선조들은 전통시장에서 장도 보고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시장이 단순히 물건을 사기위해 찾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구경하는 복합적인 문화공간으로 변해야 하는 이유이다.
양 이사장은 "현대에 남아있는 쇼핑 공간 중에서 한국인을 대변하는 정 문화가 살아있는 곳은 전통시장이 유일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슬로우' 문화"라고 말했다.
오늘 가까운 전통시장에 들러 느리게 쇼핑하는 여유로움을 직접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