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업 최초 기업공개… 투명경영 활성화 앞장고객중심 경영이념 발표 등 혁신 통해 경영 선진화 주도사회적 격동기에 전경련 회장 맡아 재계위상 재정립LG 인재 육성의 요람 '인화원' 개원… 인재육성 깊은 관심 내비쳐
  • ▲ 고(故) 구자경 LG 명예회장 ⓒLG
    ▲ 고(故) 구자경 LG 명예회장 ⓒLG
    상남(上南)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4일 오전 10시경 숙환으로 별세했다. 1925년생인 구 명예회장은 고(故) 구인회 창업회장의 첫째 아들로, 1970년부터 25년간 그룹의 2대 회장을 지냈다.

    구 명예회장은 기업의 외형적 성장 뿐만 아니라 선진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과감하게 실천에 옮긴 재계의 '혁신가'로 평가받는다.

    ◆기업공개로 투명경영 활성화 앞장

    구 명예회장은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기업을 공개해 자본 시장으로 이끌어 내는 역할을 했고, 국내 최초로 해외 생산공장을 설립해 세계화를 주도하는 등 우리나라 기업경영의 질적인 성장 사례를 끊임없이 제시해 왔다.

    1970년대에 잇따른 기업공개로 우리나라 초기 자본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민간 기업의 투명경영을 선도했다. 당시만 해도 기업공개를 기업을 팔아 넘기는 것으로 오해해 이를 우려하는 분위기였고, 일부 임원들은 기업공개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다. 국내 민간 기업에서는 기업공개를 한 사례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구 명예회장은 기업공개가 앞으로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 될 것이며, 선진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는 믿음을 꺾지 않았다.

    1970년 2월 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이 민간 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곧 이어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면서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다. 이후 ▲1974년 금성통신 ▲1976년 반도상사·금성전기 ▲1978년 금성계전 ▲1979년 럭키콘티넨탈카본 등 10년간 10개 계열사의 기업공개를 단행해 안정적인 자금 조달을 통한 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 구 명예회장은 다른 기업들보다 한 발 앞서 우리나라 기업의 활동 지평을 세계로 확장시켜, 재임하는 동안에만 50여 개의 해외법인을 설립했다. 특히 1982년 미국 알라바마주의 헌츠빌에 컬러TV 생산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설립된 해외 생산기지였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금성사 헌츠빌 공장 설립에 대해 "한국의 기업이 이제는 미국 사회에서도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도 성공적인 해외 진출 케이스로 헌츠빌 공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특히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던 1980년대 후반부터는 다가올 21세기를 주도할 수 있는 기업체질을 갖추기 위한 경영혁신 활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했다. 계열사 사장들이 '자율과 책임경영'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는 LG의 '컨센서스(Consensus) 문화'를 싹 틔웠고, 물건을 만들면 팔리는 시절이었음에도 '고객 중심 경영'을 표방했다.

    나아가 회사의 경영이념을 고객가치 중심으로 재정립하는 등 구 명예회장의 혁신적인 경영 활동은 재계의 큰 반향을 일으키며, 국내 기업들에게 경영활동 선진화를 위한 좋은 표상이 됐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과감한 '혁신'은 구 명예회장에게 하루도 놓칠 수 없는 경영 화두였고, 경영의 실체였다. 회장직에서 내려오며 남긴 이임사에서도 "혁신은 영원한 진행형의 과제이며 내 평생의 숙원"이라고 강조했고, 은퇴 후에도 경영혁신 활동을 재임 중 가장 큰 보람으로 꼽으며 스스로 '혁신의 전도사'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상호 신뢰 바탕으로 모범적인 합작경영 이끌어

    구 명예회장은 해외 투자에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독일의 지멘스, 일본 히타치·후지전기·알프스전기, 미국 AT&T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합작 경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를 통해 빠른 속도로 선진 기술과 경영 시스템을 습득할 수 있었고, LG는 세계의 중앙으로 활동 무대를 과감하게 확장시켰다.

    구 명예회장은 "럭키그룹은 두 가지 면에서 합작의 명분을 찾아 왔다. 하나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요, 또 하나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럭키그룹의 독특한 기업풍토 때문이 아닌가 한다. 서로 믿고 존중할 줄 아는 조직 문화, 거슬러 올라가면 그룹의 모태가 된 '인화(人和)'에 그 뿌리가 있다는 생각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서로에게 합당한 원칙을 정하고, 투명한 경영을 통해 상호 신뢰를 얻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신념으로 많은 합작법인을 운영하면서도 파트너와의 분쟁이 없이 합작사업의 국제적 모범을 보였다.

    대표적인 합작 사례로는 1966년부터 시작된 호남정유와 미국 칼텍스 사와의 합작을 꼽을 수 있다. 50대 50의 대등한 비율로 경영을 양분했음에도 상생과 조화라는 합작의 기본을 존중하고, 원칙을 공정하게 지키면서 한치의 잡음 없이 합작경영을 이어왔다.

    특히 구 명예회장은 1970년대 초 두 건의 화재 사고를 겪으면서 칼텍스에 대해 커다란 신뢰를 갖게 됐다. 1971년 호남정유가 입주해 있던 건물에 불이나 중요 서류가 타버렸을 때 칼텍스는 사본을 제공하며 복원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1972년 여수 공장에서 화재가 났을 때는 칼텍스 측이 사전에 안전관리를 철저히 해둔 덕에 불이 크게 번지지 않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974년에는 금성통신이 외국과의 합작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기업공개를 했을 당시, 합작 파트너였던 지멘스 측의 협조가 원활해 언론에서 합작사업의 모범 사례로 집중 조명을 받았다.

    지멘스와의 합작은 선진기술을 배우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많을 때는 10여명의 지멘스 기술자가 금성통신에 파견돼 1년 이상 머물며 금형기술을 전수해주었고, 또 가전부문에서도 라디오나 냉장고의 부품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처럼 럭키그룹이 합작 사업의 좋은 선례를 남기면서 당시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고 하는 많은 외국기업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럭키그룹에 사전 자문을 구하러 오기도 했다.
  • ▲ 고(故) 구자경 LG 명예회장 ⓒLG
    ▲ 고(故) 구자경 LG 명예회장 ⓒLG
    ◆전문경영인 중심 '자율과 책임경영' 체제 도입

    구 명예회장은 개방과 변혁이 소용돌이 치는 1980년대를 겪으면서 국경 없는 국제 경쟁을 예견하고 깊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스스로 경영혁신 방향 수립을 진두지휘 해 1988년 21세기 세계 초우량기업으로 도약을 목표로 한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이라는 변혁방향을 발표했다. 

    이는 사업전략에서 조직구조, 경영스타일, 기업문화에 이르기까지 그룹의 전면적인 경영혁신을 담은 것으로, 특히 회장 1인의 의사결정에 의존하는 관행화 된 경영체제를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선진화된 경영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자율과 책임경영"을 절대절명의 원칙으로 내세웠다

    구 명예회장이 주창한 "자율과 책임경영"은 고객과 사업을 잘 아는 전문경영인이 권한을 갖고, 자율적으로 사업을 수행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현재는 전문경영인 체제가 보편적이지만, 당시로서는 LG 내부에서도, 그리고 재계에서도 선뜻 실행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경영체제 개념이었다.

    시행 초기 그룹 내부에서도 '중요한 결정 권한은 회장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계열사 사장들 또한 타율적인 태도를 쉽게 버리지 못해 회장을 찾아가 의사결정을 요청했다가 질책과 훈계를 듣고 나오곤 했다.

    1990년 2월에는 '고객가치 경영'을 기업 활동의 핵심으로 삼은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 '인간존중의 경영'을 선포했다. 

    고객가치 경영은 한국 재계에서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었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이제 막 주목 받기 시작한 새로운 경영 조류였다. 이를 경영이념으로 선포한 것은 기업경영의 축을 공급자 중심에서 고객 중심으로 전환한 혁신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이런 경영혁신 활동이 선언적으로 그치지 않도록 직접 '혁신 전도사' 역할을 자처했다. 구 명예회장은 일일이 임직원들을 만나 경영혁신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꼬박 2년에 걸쳐 그룹 전 임원 500여명과 오찬 미팅을 가졌고, 어느 해에는 1년 동안 현장의 임직원들과 간담회 형태의 대화 자리를 140여차례나 갖기도 했다.

    임직원 뿐만 아니라 고객의 목소리도 직접 들으러 나섰다. LG전자의 서비스센터를 비롯해 당시 LG가 사업하고 있던 분야에서 고객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생생한 고객의 목소리를 들었다. 구 명예회장은 현장에 갈 때 마다 "고객의 입장에서 듣고 생각하라. 이것이 혁신이다"라는 말을 항상 잊지 않고 강조했다.

    그룹 내부에서는 사내 문서의 결재란에 '고객결재' 칸을 회장 결재 칸 위에 만들고, 회의실마다 '고객의 자리'를 마련했다. 무슨 일을 하든 항상 고객을 생각하고, 모든 회의에서 고객의 의견을 최고로 존중하겠다는 문화를 만들어갔다. 

    구 명예회장은 1992년에 혁신의 바람이 LG를 넘어 국내 경제 전반에 퍼질 수 있도록 LG의 경영혁신활동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오직 이 길밖에 없다'를 집필했다. 

    구 명예회장은 이 책을 통해 '혁신의 풍토가 한국 기업 전반에 뿌리내려 치열한 경쟁적 토양이 형성될 때 우리나라 기업들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뒤, 'LG의 혁신활동 경험이 경쟁사를 비롯한 우리 나라 기업들에게 타산지석이 되기를 바란다'며 LG의 혁신활동이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 향상에 일조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구 명예회장의 '자율과 책임경영'이라는 혁신적인 경영체제 도입과 이를 정착시키고자 쏟아 부은 열정은 LG에서 전문경영인 경영 방식이 조기에 정착되고, 나아가 훗날 LG가 국내 대기업 최초로 순수 지주회사 체제를 구축해 선진화된 지배구조와 투명경영의 근간을 마련하는 데 문화적 토대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LG가 도입한 '고객경영'은 시장개방이 본격화되던 1990년대 초중반 주요 대기업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94년 중앙대학교는 '참 경영인 상(賞)' 수상자로 구 명예회장을 선정하고, "국내 기업인들 가운데 고객경영의 효시가 된 점"을 선정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인재육성에 깊은 관심… 'LG 인화원' 개원

    구 명예회장은 평생을 두고 인재 확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정성을 다해 인재를 육성해 나갔다. 

    '그 시대에 필요한 능력과 사명감으로 꽉 찬 사람'이 인재라 여긴 구 명예회장은 이러한 인재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스스로 성장하며 변신하고 육성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구 명예회장은 완성된 작은 그릇보다는 가꿔 크게 키울 수 있는 미완의 대기(大器)에 더 큰 기대를 걸었다. 즉 인재를 선발하는 것도 잘 해야겠지만, 그보다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 제도에 무게를 두어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이에 구 명예회장이 그룹의 영속적 발전을 위해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실천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인재 양성기관인 'LG인화원'의 설립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인화원을 건립하면서 '기업의 백년대계를 다지는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표현으로 그룹 차원의 관심과 협력을 당부키도 했다.

    1988년 인화원 개원식에서 구 명예회장은 "기업은 인재의 힘으로 경쟁하고 인재와 함께 성장한다. 기업의 궁극적 목표인 인류의 번영과 복지도 인재의 빛나는 창의와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인재 육성은 기업의 기본 사명이자 전략이요 사회적 책임이다"라며 인화를 바탕으로 한 인재 육성의 의지를 천명했다.

    이후 LG인화원은 교육 하드웨어는 물론 소프트웨어 측면을 강화해 실무 실행력 증진에 초점을 맞추며 기존의 이론 교육 중심 체계를 혁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1년에는 기업 교육과정의 우수 사례로 영국 파이낸셜타임즈가 뽑은 세계 12대 기업 대학에 선정되기도 했다. 

    ◆전경련 회장 맡아 사회와 소통하며 재계위상 재정립

    구 명예회장은 1987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후 민주화 진전에 따른 전환기에 재계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재계 원로들의 추대로 전경련 회장을 수락한 구 명예회장은 취임기자회견을 통해 "전경련이 시대적 상황에 맞춰 새로운 발전이 요청되는 이때, 분에 넘치는 중책이긴 하나 징검다리가 되어 최선을 다하겠다"고 천명했다.

    구 명예회장이 18대 전경련 회장에 재임한 1987년부터 1989년까지는 우리사회의 모든 질서가 재편되는 격동의 시기인 데다 대내적으로는 혼신을 다해 추진하는 경영혁신과 사업장의 대형분규가 맞물리는 참으로 어렵고 벅찬 시기였다.

    취임 후 그는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을 통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전경련 산하에 '경제사회개발원'을 설립하고, '국민 속의 기업인, 국민경제를 위한 기업'을 모토로 기업 이미지 개선 활동을 전개했다. 전경련과 기업들이 사회와 소통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선 일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구 명예회장의 전경련 회장 재임 기간은 2년 단임이었다. 재임 당시 '1988 서울올림픽'과 같은 범국가적 행사를 치르고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인 민간주도 경제의 틀을 잡아가는데 노력하며 소임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