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 25년 간 '기술' 앞세운 경영으로 결실...LG그룹 주요 연구소 최초 설립에 힘실어R&D에 파격 투자 행보...LG그룹 인재 중심 기업문화 효시로 자리잡아강력한 기술 연구개발로 '국내 최고 가전회사' 입지 굳혀...화학·화장품 생산 기반 마련
  • ▲ 1983년 2월, 금성사 창립25주년을 맞아 적극적인 고객서비스를 위해 마련한 서비스카 발대식에서 서비스카에 시승해 환하게 웃고 있는 구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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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년 2월, 금성사 창립25주년을 맞아 적극적인 고객서비스를 위해 마련한 서비스카 발대식에서 서비스카에 시승해 환하게 웃고 있는 구 명예회장 ⓒLG
    14일 별세한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우리나라 화학과 전자 산업의 중흥을 이끈 경영자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그가 열정을 쏟은 연구개발로 축적된 기술력 덕분에 끊임없는 신제품 개발과 사업 확장이 가능했고, 오늘날 세계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화학·전자 산업 기틀이 마련됐다. 특히 그는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이라는 신념으로 기술 연구개발에 승부를 걸었다.

    구 명예회장은 늘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라는 말과 함께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거기에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결합해 철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은 이들이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외쳐댈 때에도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염불에 그치게 된다며 '강토소국 기술대국'의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같은 구 명예회장의 기술에 대한 믿음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작물을 가꾸는 방식에 따라 열매의 크기와 수확량이 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과학과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교직생활을 할 때도 구 명예회장은 제자들에게 늘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장에 재임하던 25년 동안에도 '연구개발의 해', '기술선진', '연구개발 체제 강화', '선진 수준 기술개발' 등 표현은 달라도 해마다 빠뜨리지 않고 '기술'을 경영 지표로 내세웠다.
  • ▲ 1987년 5월, 서울 우면동에 위치한 금성사 중앙연구소 준공식에 참석한 구 명예회장(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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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년 5월, 서울 우면동에 위치한 금성사 중앙연구소 준공식에 참석한 구 명예회장(왼쪽) ⓒLG
    ◆ "국민생활 윤택하게 할 제품 우리손으로"...재임기간 70여개 연구소 설립

    구자경 명예회장은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70년대 중반 럭키 울산 공장과 여천 공장에는 공장이 채 가동되기도 전에 연구실부터 만들어졌다.

    그는 대부분의 연구실이 각 공장 별로 소규모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1976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곳에 개발용 컴퓨터, 만능 시험기, 금속 현미경, 고주파 용해로 등 첨단 장비를 설치하고 국내외 우수 연구진을 초빙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투자가 집행된 것으로 유명하다.

    또 제품개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산업 디자인 분야의 육성을 위해 1974년 금성사에 디자인 연구실을 발족시키고 일본 등 디자인 선진국에 연수를 지원하는 등 전문가 육성에 힘썼다.

    1979년에는 대덕연구단지 내 민간연구소 1호인 럭키중앙연구소를 출범시켰다. 여기서는 고분자·정밀화학 분야를 집중 연구해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ABS수지 등 다양한 신제품 개발로 플라스틱 가공산업의 기술고도화를 이끌었다.

    이어 1985년에는 금성정밀, 금성전기, 금성통신 등 7개사가 입주한 안양연구단지를 조성하는 등 회장 재임기간 동안 70여 개 연구소를 설립했다.

    또 같은 해 우리나라 최초의 제품시험연구소를 개설하고 이곳에 가혹 환경 시험실, 한냉·온난 시험실, 실용 테스트실 등 국제적 수준의 16개 시험실을 갖춰 금성사 제품의 품질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했다. 

    구 명예회장의 이 같은 연구개발에 대한 신념 뒤에는 우리 기술로 우리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우리나라의 산업과 기업의 수준을 한층 선진화해야겠다는 비장한 사명감이 담겨 있었다.

    구 명예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생산기업을 시작하면서 항상 마음에 품어온 생각은 우리 국민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제품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라는 뜻을 밝힌 바 있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본인이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경영 철학에 대해 "첨단 산업 분야에서 제품 국산화를 통해 산업 고도화를 선도할 것이고, 부단한 연구개발을 통해 기업 활동의 질적인 선진화를 추구해 나갈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기술 연구개발을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우수 인재 유치와 육성에도 꾸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연구소만은 잘 지어라. 그래야 우수한 과학자가 오게 된다"라는 점을 강조하며 80년대 말 대덕연구단지에 LG화학 종합기술연구원 설립을 추진할 당시 프로젝트 출범 초기부터 우수 기술인재 유치를 위한 통 큰 투자를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연구 개발 조직에도 끊임없이 동기와 의욕을 북돋아주는 일에 늘 적극적이었다. 그는 연구소에 관한 한, 우수 인력을 어느 곳보다 우선해서 선발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임원의 정원도 제한하지 않았다. 또한 연구소를 지원하거나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한 예산이라면 우선적으로 승인해 주었다.

    또 1982년 그룹 '연구개발상'을 제정해 연구원들의 의욕을 북돋고 연구개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구 명예회장의 인재 사랑은 오늘날 LG가 R&D 인재를 중시하는 기업문화의 뿌리가 됐다.

    기술 연구개발에 대한 열정과 인재에 대한 사랑에 남달랐던 구 명예회장은 은퇴를 석 달여 앞둔 1994년 11월, 나흘에 걸쳐 전국 각지에 위치한 LG그룹 소속의 연구소 19개소를 일일이 찾아 둘러 봤다. 구 명예회장은 훗날 그때 심정을 '마음이 흐뭇함으로 가득 찼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 ▲ 구 명예회장(오른쪽 세번째)이미국 현지생산법인(GSAI)에서
생산된 제1호 컬러TV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LG
    ▲ 구 명예회장(오른쪽 세번째)이미국 현지생산법인(GSAI)에서 생산된 제1호 컬러TV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LG
    ◆ '19인치 컬러TV' 등 국내 최초 제품에도 구자경 회장의 숨결...생산시설 확장해 화학·전자 산업 성장 주도

    구자경 명예회장이 기술 연구개발을 강력하게 추진한 결과, 금성사는 국내 최고의 가전회사로 입지를 굳혀 나갔다. 금성사는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프로젝션 TV, CD플레이어, 슬림형 냉장고 등 영상미디어와 생활가전 분야에서 수많은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당시를 회상하며 구 명예회장은 "1970년에 냉장실과 냉동실을 분리한 2중 구조의 '투 도어 냉장고'를 개발한 것과 74년에 개발한 가스레인지, 77년 19인치 컬러TV를 생산한 것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컬러TV 생산은 1975년 구미 공단에 연산 50만 대의 대단위 TV 생산 공장이 준공되면서 본격화됐다. 구미 공장 준공은 한국 전자 공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우리나라 전자 공업 발전에 커다란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컬러TV는 국내의 컬러 방송 시기가 미정이라 국내 시판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글로벌 기술 흐름에 뒤쳐지지 않고 해외 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전량 미국 수출용으로 먼저 생산했다. 이를 계기로 이후 우리나라 수출에서 가전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확대됐다.

    구 명예회장은 구미 공장을 비롯해 현재 LG의 국내 주요 생산거점이 되고 있는 전자 및 화학 분야의 수많은 공장을 건설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1975년 금성사 구미 TV생산공장에 이어 1976년에는 냉장고, 공조기, 세탁기, 엘리베이터, 컴프레서 등의 생산시설이 포함된 국내 최대의 종합 전자기기 공장인 창원공장을 건립했다. 창원공장 준공식 당시 구 명예회장은 "이 공장이 서고 보면 냉장고의 컴프레서 제품까지 완전 국산화될 것이고 기종도 다양하게 개발하게 될 것이므로 전기 부문의 새로운 비약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1983년부터 1986년 말까지는 미래 첨단기술시대에 대비해 컴퓨터, VCR 등을 생산하는 평택공장을 구축하며 오늘날 전자 산업 강국의 기틀을 닦았다.

    화학분야에서는 1970년대 울산에 하이타이(가루비누), 화장비누, PVC(폴리염화비닐)파이프, DOP(프탈산디옥틸), 솔비톨 등 8개의 공장을 잇달아 건설하면서부터 종합 화학회사로의 발돋움을 본격화했다. 

    또 전남 여천 석유화학단지에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PVC레진, ABS(아크릴로니트릴부타디엔), 납사(나프타) 분해공장 등을 구축해 정유(당시 호남정유)부터 석유화학 기초유분 및 합성수지까지 석유화학 분야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럭키 여천공장 가동은 70년대까지 가공산업 위주였던 국내 화학산업을 석유화학 원료산업으로 전환하는 이정표로, 원료의 안정적인 수급이 중요한 석유화학 산업에서 수입에 의존하던 원료를 직접 생산하게 됨으로써 석유화학 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1980년대 초반에는 늘어나는 제품 수요에 대응하고 전국적 제품 공급을 원활이 하기 위해 한반도의 중간지점인 충북 청주에 치약, 칫솔, 모노륨, 액체세제 등을 생산하는 생활용품 종합공장인 럭키 청주공장을 건설했다.

    또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이 플라스틱 사업에 전념하고자 지난 1954년 완전히 철수했던 화장품 사업으로의 재진출을 결정하고 청주공장에 국내 최대 규모의 화장품 공장을 건설하여 창업 당시의 사업영역이던 화장품 사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80년대 중반에는 한국종합화학의 나주 공장을 인수해 국제규모의 종합화학으로 커나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인수 당시의 시설을 몇 차례 개조하고 증설하여 옥탄올, 이소부탄올, 아크릴레이트 등 석유화학제품의 생산량을 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