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엔 들고 일본서 시작… 주경야독 사업자금 마련관광 유통 식품 분야 시대 앞선 선구자…재계 5위로“한국, 부존자원 빈약해 관광입국 이뤄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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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이 19일 향년 99세로 별세했다. 그의 인생은 83엔으로 시작했고 ‘관광보국’의 상징물인 123층 잠실 롯데월드타워로 요약된다.신 명예회장은 일제강점기 시절이던 1922년 경상남도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울산농고를 졸업하고 돼지 사육에 나섰지만, 공부를 더 하겠다는 생각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1941년 사촌형이 마련해준 일본 노잣돈은 83엔, 그는 이를 기반으로 와세다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신 명예회장은 청년 시절 주경야독에 몰두했다. 낮에는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고 밤에는 대학에서 학업에 정진했다.이 과정에서 일본인 사업가 하나미쓰는 신격호 명예회장을 높게 평가해 사업자금으로 5만엔을 빌려준다. 신 명예회장은 이 돈으로 1944년 도쿄 근처에 윤활유 공장을 세운다. 그러나 미군 폭격으로 공장이 불타 사업자금 5만엔은 빚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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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으로 일본에 있던 한국인이 대거 귀국했지만, 신격호 명예회장은 5만엔을 갚기 위해 일본에서 막노동을 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1946년 도쿄에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라는 공장을 짓고 비누크림 등을 만들어 팔았다. 사업의 성공으로 5만엔도 갚았다.승승가도를 달린 신격호 명예회장은 1948년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의 회사를 설립했다. ‘롯데’라는 간판은 이때 처음 생겼다. 껌 회사인 ㈜롯데를 시작으로 롯데그룹의 신화가 열린 것.롯데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따왔다. 한때 작가의 꿈을 키우기도 했던 신격호 명예회장은 롯데가 샤롯데처럼 사랑받는 기업이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기업명을 지었다.롯데는 껌에 이어 초콜릿과 캔디 등 제과로 사업영역을 넓혀 일본 굴지의 종합제과기업으로 성장했다. 1959년 롯데상사, 1961년 롯데부동산, 1967년 롯데아도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해 일본 10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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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자리를 잡아 신격호 명예회장은 고국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1967년 롯데제과를 국내에 설립해 쥬시후레쉬와 스피아민트 등 히트상품을 앞세워 빠르게 성장했다. 음료·빙과회사를 인수하는 한편 광광과 유통, 건설, 석유화학 사업에도 진출했다.신격호 명예회장은 우리나라에 관해 부존자원이 빈약해, ‘관광입국’을 이뤄야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76년 롯데쇼핑센터(現 롯데백화점) 건립공사에 나섰다. 당시 국민소득이 오르며 소비욕구와 구매패턴이 다양해졌지만, 유통업을 대표하는 백화점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미흡했다.그러나 신 명예회장은 기존 백화점의 2~3배에 달하는 규모로 쇼핑센터를 지었고, 우리나라 1등 백화점의 자리에 올랐다.관광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1984년 롯데월드 사업을 지시했다. 당시 임직원 반응은 신통치 않았지만, 국내 관광산업을 한층 끌어올리기 위한 용단이었다. 1989년 문을 연 롯데월드는 현재 세계 최대규모의 실내 테마파크로 기네스북에 등재돼있다.이러한 공로로 신격호 명예회장은 1995년 관광산업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산업훈장은 이전까지 수출기업이나 제조업종에 집중됐으나, 신 명예회장은 공로를 인정받았다.백미는 123층 롯데월드타워다. 이는 신 명예회장이 1987년 잠실에 초고층 빌딩을 짓겠다며 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됐다. 관광객에게 언제까지나 고궁 등 문화재만 보일 수 없다며, 세계적인 건축물을 짓자는 의도에서다. 완성은 2017년으로 30년이 걸렸다.롯데 관계자는 “신격호 명예회장은 우리 경제계를 지탱한 큰 거인”이라며 “관광과 유통, 식품 등 전 사업군에서 시대를 앞서간 개척자”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