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증산… 걸프전 이후 최대폭 하락글로벌 경기침체 불안감 등 금융시장 '위험신호'정유, 석화, 건설, 조선 등 국내 산업계 '좌불안석'
  • ▲ SK이노베이션의 그랜트·가필드 광구 펌핑유닛. ⓒ연합뉴스
    ▲ SK이노베이션의 그랜트·가필드 광구 펌핑유닛. ⓒ연합뉴스

    국제유가가 1991년 걸프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하락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가 원유 증산 전쟁에 나서면서다. 이들간 싸움이 길어질 경우 세계경제 피해는 막대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도 중국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과 맞물리면서 국가 부도위험 지수가 20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파장이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 9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4월물 서부텍사스산 원유는 전 거래일보다 배럴당 10.15달러(24.6%) 급락한 31.13달러에 마감했다. 1991년 1월17일 이후 29년 만에 가장 큰 하락률이다. 국제유가의 기준물인 5월물 브렌트유는 런던ICE선물거래소에서 이날 10.9달러 내려앉은 34.28달러에 거래됐다.

    앞서 석유수출국기구(OPEC)과 러시아 등 비회원 산유국들의 모임인 OPEC+가 지난 6일 러시아의 반대로 감산 합의에 실패하고 사우디가 7일 오히려 석유 증산과 원유 공식 판매가격(OSP)의 배럴당 6~8달러 인하를 발표하면서다.

    AFP통신은 "러시아가 감산에 합의하지 않자 사우디가 화가 났다"며 "사우디는 20년 만에 가장 큰 폭의 가격인하를 단행했고, 러시아의 시장점유율을 채가면서 에너지시장에 대혼란이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원유 수유도 줄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원유 수요가 하루 평균 9만배럴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원유 수요 감소는 2009년 금융위기 이후 11년 만에 처음이다.

    IEA는 세계 원유 수요 증가량의 80%를 담당하는 중국 경제가 회복되지 않을 경우 하루 평균 73만배럴까지 감소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유가 폭락 장세에 대해 "코로나19의 충격파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수요가 급감하고 있는데도 러시아가 추가 감산에 반대하면서 사우디가 보복에 나섰다"고 판단했다.

    실제 사우디 국영 석유공사 아람코는 다음 달부터 하루에 1230만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겠다고 10일 밝혔다. 2월 산유량(하루 970만배럴)보다 26.8% 많은 양이다.

    사우디와 러시아는 2016년 이후 각각 OPEC과 OPEC+를 대표하며 감산 공조를 주도해왔다. 사우디는 OPEC을 주도하며 쿼터보다 더 많은 감산을 이행해왔지만, 유가 회복에 따른 추가 보상은 하루 평균 1억2500만달러로 크지 않았다.

    이에 반해 러시아는 첫 감산 합의가 있었던 2016년 4분기 이후 원유 수출로 하루 평균 1억7000만달러를 더 벌었다. 결국 사우디는 러시아가 합의와 달리 그동안 속임수를 써왔다고 판단, 보복 차원에서 증산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사우디가 최대 경쟁국인 미국의 셰일산업을 옥죄려고 증산에 나섰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을 뺀 산유국들의 감산이 셰일의 생산을 늘리는 데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OPEC의 증산 경쟁으로 유가가 크게 떨어지면 고비용인 미국 셰일의 증산을 막고 점유율도 지켜낼 가능성이 커진다.

    통상 중동 산유국의 생산 단가가 배럴당 10달러라면 셰일오일 생산 단가는 배럴당 30~40달러로 높다. 미국 셰일업체가 채산성을 유지하려면 유가는 최소 60달러 이상은 돼야 한다.

    때문에 이번 기회에 세계 최대 산유국이라는 입지도 다시 다지려는 게 사우디의 속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사우디와 러시아 간 싸움이 해결되지 않으면 유가가 20달러대로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엑손모빌 자문분석가였던 알리 케데리는 미 CNBC에서 "올해 유가가 20달러대로 내려갈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모건스탠리는 "코로나19가 2분기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주요 국가들의 '기술적 경기 침체(technical recession)' 위험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며 "재정정책이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바이러스부터 잡아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 ▲ SK 울산 CLX. ⓒ성재용 기자
    ▲ SK 울산 CLX. ⓒ성재용 기자

    코로나19 확산으로 시름하고 있는 국내 경제에도 여파가 적지 않다.

    당장 우리나라 부도위험지표인 CDS 프리미엄이 20개월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미국 증시·국채 금리와 유가가 동반 급락하면서 금융시장의 불안감이 커진 탓이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CDS 프리미엄(5년물)은 지난 9일 기준 47bp(1bp=0.01%p)로 전날보다 9bp 상승했다. 이는 2018년 7월11일 48bp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CDS 프리미엄은 기업이나 국가의 파산 위험에 대비한 보험료 성격의 수수료율로, 신용도가 높아 부도 가능성이 낮을수록 CDS 프리미엄이 낮아진다.

    이성재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CDS 프리미엄이 급등한 것은 세계경제 불안요인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당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국내 정유·화학업계를 비롯해 조선, 건설, 플랜트 등 다른 주력 수출 분야도 떨고 있다.

    정유업계는 특히 고민이 크다. 당장 높은 가격에 구매해 둔 원유 평가가치가 최근 유가 급락과 함께 급전직하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재고평가손실은 정유업계가 맞게 될 최대 단기 악재다.

    전문가들은 정유사별로 원유 비축물량에 따라 최대 수천억원까지 재고평가손실이 가능하다고 계산한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정유4사의 원유 비축물량은 정유사별로 1000만~2000만배럴로 추정된다"며 "유가가 5달러 하락할 때마다 업체별로 최대 1000억원 규모의 재고평가손실이 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금까지 유가 하락만으로도 이미 수천억원대 잠재손실을 떠안은 것이다.

    유가 하락에 따른 원재료비 절감도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 같은 석유제품을 만들어 팔기 때문에 유가 하락은 곧 원가 절감"이라면서도 "하지만 이는 수요가 뒷받침될 때 이야기로, 코로나19로 현재로선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유가 하락 악재는 화학업계도 마찬가지다. 원유 정제 부산물로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화학업체들은 유가 하락이 원가절감 요인이지만, 지금은 수요 위축이 더 걱정스럽다는 반응이다.

    수주에서 건조까지 2~3년 시차가 발생하는 조선업계도 최근 유가 급락 폭이 워낙 커 예의주시하고 있다 자칫 저유가 추세가 장기화될 경우 유조선 발주가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저조한 해양플랜트 발주가 더욱 얼어붙을 가능성도 있다. 유전 개발에 투입되는 해양플랜트 시황은 통상 유가가 높을수록 개선되는 모습이다.

    건설업계도 마찬가지다. 유가 급락으로 중동 산유국들의 프로젝트 발주 일정이 늦춰질 가능성이 크다. 유가가 배럴당 50~60달러는 돼야 프로젝트 발주가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어서다. 유가 하락은 발주 지연으로 이어지고 결국 국내 해외건설업계는 수주절벽으로 내몰릴 수 있는 셈이다.

    철강업계도 유가 급락 충격이 전방산업인 조선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철강업계는 조선업계가 지난해에도 시황 부진에서 탈출하지 못한 탓에 후판 가격을 제대로 인상하지 못해 수익성이 나빠진 상태다. 여기에 조선업이 유가 급락 충격까지 받으면 올해도 후판 가격을 올리지 못할 수 있는 만큼 걱정이 적지 않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정유·화학, 조선, 철강, 건설업 등 산업계는 급락한 유가 하락이 하나도 반갑지 않다"며 "러시아의 미국의 감산을 둘러싼 갈등이 코로나19와 맞물리면 타격이 더 클 수 있어 이번 급락이 안정되기만을 바란다"고 말했다.

    이밖에 원유 가격이 떨어지면 수혜를 봐왔던 서비스업종도 코로나19로 수요 자체가 줄어들면서 이런 혜택을 기대하기 어렵다. 대표 업종이 항공 등 운수업이다. 항공기 탑승객의 경우 2월 3주 기준 전년동기대비 84.4% 감소했다.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연료를 사용하는 항공, 운수, 자동차 등이 수혜 업종인데 코로나19로 여행을 비롯한 이동이 위축되다보니 유가 하락 혜택을 전혀 못 누리고 있다"며 "코로나19 때문에 피해 업종은 고스란히 타격을 입고 수혜 업종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