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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은 손에 힘을 풀었다. 고도계는 3500미터를 가리킨다. 불과 1년 전에는 1250미터, 2년 전에는 500미터 선에서 비행했다. 전염병 창궐 소식에 급히 고도를 낮춰 현금을 살포했지만 적진에 너무 깊숙이 들어갔다. 적은 인플레 대공포를 쏜다. 맞으면 추락이다. 급히 조종간을 잡아 당긴다. 고도를 올려도 올려도 포탄의 불빛은 선명하다. 1년 넘게 당겨 3500을 찍으니 드디어 포탄 소리가 희미해졌다. 주변은 고요하다. 하지만 너무 올라온 탓일까. 숨쉬기가 쉽지 않다. 공기가 희박하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 정도가 적당할까. 아니면 더 당겨야 할까.

    마음은 잠시 쉬고 싶다. 그 동안 너무 쉼 없이 잡아당겼다. 팔이 저릴 정도다. 하지만 조종간에서 손을 떼기엔 조심스럽다. 포격이 멈춘 건 아니니까. 게다가 최근 들어 포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우선 미국 경기가 좀처럼 식지 않는다. 인플레가 꺾여야 금리를 유지하든, 낮추든 할텐데 발표치가 예상치를 계속 웃돈다. 지난달만 해도 연준이 3월 빅스텝에 나설 거라 보는 전문가는 없었지만 지금은 4명 중 1명꼴이다. 심지어 6%까지 올릴 거라는 의견도 확산세다. 6%면 우리와 2.5%포인트까지 벌어진다.

    시장 분위기가 급변하자 국내 주가는 바로 급락했다. 환율도 다시 1300원을 뚫었다. 한은이 조종간에서 손을 떼기 어려운 여건이 최근 며칠 사이 갑자기 조성된 것이다. 연준이 예상대로 3월 베이비스텝에 나선다면 한은도 부담을 덜 수 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빅스텝에 나선다면 금리차가 너무 벌어진다. 조종간을 당겨 고도를 더 높일 수밖에 없다.

    높인다면 산소는 더 희박해진다. 호흡 곤란이 심화될 수 있다. 지금도 숨쉬기 어렵다며 가계든, 기업이든 아우성이다. 미국과 달리 우리는 이미 경기침체를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수출이 심상치 않다. 한은은 23일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1.6%로 낮춰 잡았다. 해외 요소만 고려하면 당겨야 하지만 국내 요소가 심상치 않으니 일단은 좀 더 지켜보겠다는 심산으로 읽힌다.

    지난 세월 경기가 좋아도 물가가 안정된 것은 누가 뭐래도 중국 덕택이었다. 저임금을 무기로 '세계의 공장'을 자처한 영향이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트럼프 이후로 너도나도 자국우선주의다. 기업들이 중국에 등을 돌리며 앞다퉈 미국에 공장을 짓는다. 공급망이 틀어졌는데 러시아는 전쟁까지 일으켰다.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으로선 만만치 않은 도전들이다.

    물가가 잡히려면 푸틴이나 시진핑이나 성질을 좀 죽여야 하는데 그럴 기미는 별로 안 보인다. 끊어진 공급망은 인터넷 선과는 다르다. 며칠 만에 복구되는 게재가 아니다. 결국 큰 틀에서 보면 고물가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현재 미국 금리는 4.75%. 시장에서는 5%를 정점으로 보다 5.5%까지 가능성을 열었고, 이제는 6% 얘기까지 나온다.

    미국 비행기들은 5000미터 선에서 싸우다 고도를 더 높이려 하고 있다. 한국 비행기가 나홀로 고도를 낮추긴 어렵다. 그랬다간 인플레 대공포 표적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바뀐다. 아차 하는 순간 추락이다.

    그런데 한국은 총선을 앞두고 있다. 정치인들은 물가도 잡고 경기도 잡을 수 있다고 현혹할 것이다. 재정당국은 정치인들의 압력에 취약하다. 압력은 한은으로 전이될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에서 시장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 시장금리가 튀면 기준금리는 버티기 어렵다. 팔이 저려도 한은이 쉽사리 조종간을 놓지 못하는 이유다. 한은의 예상대로 물가가 3월 4%대, 연말 3%대로 내려간다면 굳이 고도 4000미터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대외 여건이 녹록지 않다.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한은의 조종 실력은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이창용 총재는 이날 동결을 발표했지만, 전투의지도 동시에 피력했다.

    "금리 인상 기조가 끝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단은 베테랑다운 면모다. 앞으로 몇 달, 한은은 정면을 응시할까, 고도 4000을 바라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