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R 없어도 충분 심평원 마이데이터로 '패싱'생보사 특화 '정액형 급부' 공략…솔루션판매로 부수익까지
  • ▲ 천상영 신한라이프 대표. ⓒ신한라이프.
    ▲ 천상영 신한라이프 대표. ⓒ신한라이프.
    신한라이프가 보험업계의 해묵은 과제인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를 해결하기 위한 실험에 나섰다. 천상영 신임 대표 취임 이후 추진 중인 디지털 전략의 일환으로, 이번 서비스는 기존 전자의무기록(EMR) 업체와의 비용 갈등을 완화하고 보험사가 직접 구축한 데이터망을 통해 '중계업체 패싱'을 겨냥한 시도로 해석된다.

    27일 신한라이프에 따르면 현재 임직원을 대상으로 시범 운영 중인 서비스에서 고객은 '신한SOL라이프' 앱에 접속해 카카오·네이버 등 간편 인증만 거치면 된다. 본인 인증을 마치는 순간 시스템은 보험금 청구를 위한 데이터 확보 단계로 진입한다. 

    특정 EMR 업체를 거치거나 병원과 일일이 전용선을 연결하는 대신, 국가 공용 정보인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마이데이터를 활용하는 우회로를 택한 것이다. 고객이 동의하면 심평원에 축적된 본인의 진료 일자, 병원명, 진료비 상세 내역을 보험사가 조회해 청구 절차를 끝낸다. 건당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던 민간 EMR 업체의 수익 구조를 배제한 직거래 방식이다. 

    해당 시스템이 안착하면 고객들은 더 이상 병원 창구 앞에 줄을 서서 종이 서류를 발급받거나 팩스기 앞에서 전송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없다. 스마트폰 화면에 뜬 진료 내역 중 청구할 항목을 선택하기만 하면 데이터가 디지털 형태로 보험사에 전송돼 즉시 심사가 시작된다. 신속지급 서비스 대상 건은 별도의 심사 과정 없이 바로 보험금도 받을 수 있다. 

    신한라이프가 이같은 실험에 나선 배경엔 지지부진한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 논의가 있다. 지난해 정부와 보험업계는 보험개발원을 중심으로 '실손24'를 추진으나,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의원과 약국의 사전 참여율은 3.3%에 그치고 있다. 

    갈등의 본질은 결국 비용이다. 보험업계는 1000억원 이상의 예산을 투입해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데이터를 실어 나르는 통로인 EMR 업체들은 시스템 유지보수비 등 정당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맞서왔다. 금융당국도 이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서버 구축비 등을 제공하고 있지만 이해관계를 좁히기엔 역부족인 상황이다. 

    보험사들이 EMR 업체와 계약을 잇달아 해지하자 업계에선 금융위원회에 의견서를 제출하며 생존권 투쟁에 나서고 있다. 제휴 보험사 12곳이 수수료 부담 등을 이유로 전산 접수를 거부하고 청구 대행 계약을 해지하고 있어 민간 EMR 인프라가 고사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IT기업인 EMR 업체들이 금융당국의 감독권 밖에 있어 '실손24' 참여에 강제력이 없다는 점도 교착 상태를 키운 구조적 한계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한라이프의 실험은 민간 플랫폼에 지불하는 수수료를 아끼고 공공 데이터망을 직접 활용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접근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이 서비스는 병원 재방문이 어려운 지방 및 도서 산간 지역 고령층에게 큰 혜택이 될 전망이다. 전산화가 단순한 편의를 넘어 소외 계층을 위한 금융 복지로 확장되는 것이다.

    특히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가 의료기관 EMR 시스템을 전제로 추진돼 온 가운데, 보험사가 이를 우회하는 경로를 본격적으로 검토하면서 기존 전산화 추진 논리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다만, 신한라이프는 생명보험사 특성상 실손24와는 타겟이 다르다. 실손24가 실손의료보험상품에 집중한다면 신한라이프는 입원·통원 등 '정액형 급부 청구'를 공략한다. 그간 다소 소외되었던 정액형 상품의 청구 문턱을 낮춰 고객 편의성을 제고했다. 

    금융당국 역시 신한라이프의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나타난 이 모델이 업계의 빈틈을 메워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기대하는 눈치다. 신한라이프가 구축한 마이데이터 기반 청구 모델이 성공할 경우 이를 '부수업무'로 신고한 뒤 시스템 구축 여력이 부족한 타 보험사에 솔루션을 판매하거나 운영을 대행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보험사 입장에서도 직접 시스템을 구축하는 초기 투자비용이 발생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외부 플랫폼 수수료를 절감하고 고객 데이터를 직접 관리하는 디지털 주권을 확보하는 실익이 크다. 현재는 데이터가 오가는 과정에서 보안성과 데이터 매칭 정확도를 점검하며 서비스의 완성도를 올리고 있다.

    천상영 대표는 취임 이후 줄곧 '고객 가치 극대화'와 '디지털 선도'를 경영의 최우선 가치로 강조해 왔다. "고객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인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천 대표의 메시지는 결국 고객의 가장 큰 불편함에서 새로운 시장을 찾아낸 사례로 풀이된다.

    실제 4000만 실손보험 가입자의 65%는 복잡한 청구 절차 때문에 보험금 수령 없이 보험료만 내고 있으며 매년 버려지는 보험금은 수천억원에 달한다. 반면 상위 9%는 전체 보험금의 80%를 받아간다. 누군가는 너무 많이 이용하고 누군가는 귀찮아서 전혀 활용하지 않는 구조적 불균형 속에서 청구 문턱을 낮추려는 신한라이프의 실험이 업계에 어떤 효과를 일으킬지 관심이 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