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산기로 촉발된 갈등, 결국 '배드 엔딩'
  • ▲ KB금융 두 수장의 갈등은 결국 비극으로 끝났다. ⓒ NewDaily DB
    ▲ KB금융 두 수장의 갈등은 결국 비극으로 끝났다. ⓒ NewDaily DB

    지난 29일 오전 서울 명동 KB금융지주 본사. 이 날 열린 KB금융 창립 6주년 기념식의 분위기는 조용했다. 이 자리를 주도하며 빛내야 할 지주 회장과 은행장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기념식 후 이어진 봉사활동 자리에서도 회장과 은행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임영록 당시 회장과 이건호 당시 은행장이 미소를 지으며 구슬땀을 흘리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국민은행 주 전산기 교체 논란을 두고 시작된 두 수장의 갈등은 템플스테이에서의 충돌로 정점을 찍더니 결국 둘 다 자리에서 밀려나는 '배드 엔딩'으로 끝나고 말았다. 5개월에 걸친 이들의 갈등을 재구성해봤다.

◇ IBM이냐 유닉스냐…다른 선택으로 촉발된 갈등

갈등은 이건호 전 행장이 국민은행 주전산기 교체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기존의 IBM 시스템은 시스템 간 연계가 어려우며 유지·보수 비용이 상대적으로 많이 든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국민은행은 지난 4월 은행·카드 이사회 결의를 거쳐 유닉스(Unix) 시스템으로의 변경을 확정했다. 

이 과정에서 이 전 행장과 정병기 국민은행 상임감사위원이 태클을 걸고 나섰다. 기술검증 과정에서 시스템의 문제가 발견됐다는 내부 감사보고서를 근거로 시스템 결정과정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은행 감사팀의 감사 결과도 이 전 행장과 정 감사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주 전산기 결정을 위한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유닉스 시스템의 가격 경쟁력과 잠재 리스크 요인을 의도적으로 축소·누락한 정황을 발견했다고 지적한 것.

그러나 두 사람의 건의는 이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이들은 즉각 금감원에 검사를 요청했다. "우리 회사를 검사해 달라"고 '셀프 신고'한 것이다. 금융권에서는 "친(親) 임영록파 사외이사들이 이 (당시) 행장에게 어깃장을 놓은 것"이란 말이 나왔다.

◇ 부처님 앞에서 찍은 '막장 드라마'

이들의 갈등은 지난 8월 말 열린 템플스테이에서의 충돌로 정점을 찍었다.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가 임 전 회장과 이 전 행장에 대한 경징계 의결을 내리자마자 두 수장은 경기도 가평 백련사로 1박 2일간의 사장단 템플스테이를 떠났다.

템플스테이 첫 날, 임 전 회장과 이 전 행장은 나란히 서서 웃는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등,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템플스테이를 마치는 자리에 이 전 행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언론들은 "왜 회장에게만 따로 독방을 주는 등 특별 대우를 하느냐며 이 전 행장이 화를 내고 떠났다"고 보도했다. 이 전 행장은 나중에 "행사 프로그램 일부가 화합을 위한다는 당초 취지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한 것일 뿐, 잠자리 싸움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이유야 어쨌든 둘 사이의 갈등이 정점을 찍었다는 것은 인정한 셈이다.

화해를 위해 산사(山寺)를 찾았으나, 화해는커녕 부처님 앞에서 다투고 온 모양새가 되면서 이들의 다툼은 금융권 안팎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KB 내부에서는 "(이건호 전 행장이) 너무 언론플레이를 한다"며 이 전 행장을 지탄하는 여론도 있었고, "두 낙하산들의 이권 다툼이 막장 드라마를 연출한다"며 둘 다 비난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템플스테이를 주관했던 승원 백련사 주지스님도 "정성을 다해 대접했고, 마음을 안정시킨 후 돌아가시길 바랐는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안타깝다"고 했다.

◇ 회장, 행장 이어 사외이사까지… '배드 엔딩'으로

사상 유례 없는 '셀프 신고'를 받은 금감원은 이 전 행장 측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최수현 금감원장은 제재심의위의 경징계 의결을 뒤집고, 임 전 회장에게 문책경고라는 중징계를 결정했다. 주전산기 전환사업과 그에 따른 리스크에 대해 수차례 보고받았으면서도 감독의무 이행을 태만히 했다는 주장, 주전산기를 유닉스로 전환하는 사업을 강행하려는 의도로 은행 인사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주장 등 이 전 행장 측의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 행장도 중징계의 철퇴를 함께 맞았다. 최 원장은 "이 전 행장이 국민은행이 주전산기 관련 컨설팅보고서가 유닉스에 유리하게 작성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고, 유닉스 전환 관련 성능검증 결과 및 소요비용을 이사회에 허위보고한 사실 등의 책임을 물어 중징계를 내렸다"고 설명했다.

즉, 이건호 전 행장에게는 주전산기가 유닉스로 바뀌는 것을 막으려는 과정에서 '허위'가 있었다는 점을, 임영록 전 회장에게는 유닉스로 바꾸는 작업을 무리하게 강행함으로써 경영 불안을 초래한 점 등을 문제삼은 것이다.

중징계가 확정되자 이 전 행장은 "금감원의 결정을 존중한다"며 즉각 자진 사퇴했다. 하지만 임 전 회장은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러 차례의 기자회견을 통해 중징계 결정의 부당함을 언론에 호소했다.

이런 모습을 보이자 금융위원회는 임 전 회장에 대해 애초 금감원의 '문책경고' 처분에서 한 단계 높여 '직무정지 3개월' 처분을 확정했다. 은행장에 대한 징계권은 금감원장에게 있지만, 금융지주 회장은 금감원장이 건의하고 금융위원장이 확정하도록 돼 있다.

임 전 회장은 직무정지 처분이 부당하다며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내는 등 격렬히 저항했다. 그러자 이번엔 KB금융지주 이사회가 그에 대한 해임결의안을 채택했다. 결국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대표이사 회장직 복귀가 불가능해진 임 전 회장은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며 지난 28일 소송 취하의 뜻을 밝혔다.

신제윤 금융위원장과 최수현 금감원장이 중징계를 결정하기 전 사외이사들을 만난 점 등을 근거로 금융권에선 사실상 금융당국이 이사회에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금융당국의 화살은 이번엔 이사회로 향하고 있다. 갈등구도의 이면엔 이사회가 있었다는 인식 때문이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최근 KB금융 사태와 관련해 "사외이사 등 이사회의 책임 부분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 같다"며 "KB이사회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이사회 책임론이 확산되면서 26일 임기가 만료된 오갑수 이사가 연임 포기하고 김중웅 국민은행 이사회 의장 역시 "경영정상화 이후 물러나겠다"고 밝히는 등 '줄사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