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촛불시위가 김수환 추기경 애도와 같은 것?

    ⓒ한겨레신문 지면 촬영

    한겨레신문이 23일 논설위원의 기명칼럼(사진)을 통해 촛불시위와 김수환 추기경 애도 움직임이 같은 것이며 이는 법 질서보다 우위에 있는 ‘사회 정의’의 발로라고 주장, "지나친 견강부회"라는 지적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이 신문은 이날치 여론면 ‘아침햇발’란에 ‘사회정의는 법질서에 우선한다’는 정영무 논설위원 명의의 칼럼을 실었다. 

    정 위원은 이 칼럼에서  “불법집회와 시위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것은 기만”이라며 “물리력으로 통제할수 없을 만큼 생존권 위기가 심화된 절박한 상황에서 엄한 법 집행으로 대처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정 위원은 또 “정부는 법 질서를 신성시 하지만 법은 사회정의를 위해 있는 것”이라며 “촛불시위와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애도는 사회정의에 대한 자발적이고 집단적인 발로라는 점에서 동질적”이라고 주장했다. 정 위원에 따르면 최상의 가치는 법이나 질서가 아닌 '정의'고 국민의 눈높이도 질서보다는 정의라는 관념에 맞춰져 있다.

    이 신문은 이어 정부의 규제완화 정책이 약육강식을 심화시킨다며 딴지를 걸었다. 정부 여당이 내놓는 많은 법안은 규제를 완화하는 법이어서 약자에게 불리하다는 것. 그래서 이 법안들은 지금같은 위기에는 맞지 않는다는 게 이 신문의 주장이다.  

    한겨레신문 23일 '아침햇발' 전문
    사회정의는 법질서에 우선한다 - 정영무 논설위원

    2년째로 접어드는 이명박 정부는 자만과 불안심리가 교차한다. 존재감이 덜한 야당 덕에 정치게임에서 죽을 쒀도 다음은 보수정권이라는 자신감이 있다. 반면 계속되는 경제위기와 촛불로 입은 화상 탓에 시위와 생존권 투쟁에는 노이로제에 가까운 불안감을 보인다. 

    다수 의석을 차지한 국회에서는 개혁입법이라는 이름으로 규제완화 법안을 밀어붙이는 속도전을 꾀하고 있다. 반면 시민사회에 대해서는 법질서를 금과옥조로 삼고 공권력을 앞세워 통제 고삐를 죄고 있다. 내각을 물러나게 한 아이슬란드 시위를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는 금융위기처럼 전이될 수 있다. 정부가 신발끈을 고쳐맨 것도 그 때문이다. 정부는 경찰청장과 국정원장을 바꾸고 강성의 검찰총장을 유임시키는 것으로 전열을 정비했다. 촛불시위 때 우유부단했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확실히 벼리를 틀어쥐겠다는 뜻이다. 집회와 의사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 하고 툭하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빼드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법질서를 떠받들 요량으로 정부는 불법 집회와 시위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지목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수준의 법질서만 돼도 성장률이 1%포인트 올라간다는 얘기를 귀가 따갑도록 한다. 정부가 인용하는 한국개발연구원 자료에 수긍하기 어렵지만, 거기서도 집회와 시위는 불법의 일부분으로 탈세·비리 등의 범죄행위가 훨씬 큰 몫을 차지한다. 따라서 불법집회와 시위 때문에 경제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은 기만에 가깝다.

    정부·여당의 많은 법안은 규제를 완화하는 쪽이어서 약자한테 불리하다. 약육강식을 심화시키는 까닭에 지금 같은 위기에 맞지 않는다. 경제가 브이자형으로 급속히 회복되지 않는 한 악법이 될 소지가 크다. 그런데도 법안을 밀어붙이면서 무엇보다 시민사회에 법질서를 전가의 보도처럼 들이대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적절하지 않다.

    첫째, 물리력으로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생존권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제조업 가동률은 외환위기 때보다 낮은 60% 수준으로 내려갔다. 올 봄 경기순환의 내림세 정도로 속단할 수 없는 실업대란과 줄도산마저 예견된다. 취약계층에 이어 중산층 붕괴가 가속화하면 신빈곤층은 1천만명을 넘어갈 수 있다. 법은 급변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생존권이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에서 엄한 법집행으로 대처하고 불복의 싹을 자르겠다는 것은 통하기 어려운 무리수다. 용산 철거민 참사는 그런 강경기류 속에 빚어졌다. 원인을 풀 처방을 하지 않고 공권력으로 막으려다간 제2·3의 참사가 날 수 있다.

    둘째, 우리 국민의 눈높이는 정의의 관념에 맞춰져 있다. 정부는 법질서를 신성시하지만 국민은 질서가 곧 정의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최상의 가치는 정의다. 민주주의와 법은 사회정의를 위해 있는 것이다. 촛불시위와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애도는 사회정의에 대한 자발적이고 집단적인 발로라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새로운 저항을 경험한 시민들을 질서의 프레임으로 가둘 수 있다고 여기면 오산이다.

    프랑스에서 공공부문 파업이 흔치 않게 일어나고 실업자 운동이 지지를 받는 것은 ‘사회정의는 질서에 우선한다’는 폭넓은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정의는 ‘사회 안에서 사유권이 중요하다면 사회 구성원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더 중요하다’라는 주장이 핵심이다. 법은 기득권 편인 까닭에 질서의 이름으로 사회정의를 무시하려는 관성이 있다. 그래서 사회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재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상식이 돼 있다. 지난 1년 이명박 정부의 다양한 충격요법 덕분에 우리 국민들도 사회정의가 결여된 법질서를 왜 순순히 따라야 하는가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