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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李御寧ㆍ73) 전 문화부 장관은…
문학평론가, 소설가, 수필가, 언론인, 대학교수로 맹활약, 우리시대의 석학이자 최고의 지성인이다. “벽을 넘어서” 란 주제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획했고, 문화부 장관 시절엔 문화정책을 관 주도에서 국민이 참여하는 문화향수(享受) 정책으로 전환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조선일보 정보화 포럼 멤버로서 정보화 캠페인에 앞장섰고,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문명융합을 외치는 디지로그론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문명비평가로서의 큰 업적을 남겼다.
‘Save Internet! 대한민국의 빛 한반도의 어둠을 물리쳐라” 는 주제로 재창간에 나선 뉴데일리는 인터넷의 역기능과 그 발전 방향에 대해 인보길 사장과 이진우 편집국장, 그리고 이진광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인터뷰를 했다. <편집자 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시절인 1995년 3월 정보화 포럼을 만들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캠페인을 펼친 게 엊그제 같습니다. 인터넷신문이 나오기 한참 전이었지요. 조선일보 자회사인 디지털 조선일보를 만들 때 “디지털이 뭐야 ‘돼지털’이냐”는 말도 듣기도 했는데, 이젠 인터넷의 역기능이 순기능을 압도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삼보컴퓨터의 이용태씨가 PC 하드웨어를 했고, 오명씨가 정부 쪽에서 인프라를 했고, 우리가 문화 쪽에서 역할을 했으니 3박자가 맞아 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가 큰 일을 한 거지요. 그 때는 광케이블 왜 까는지도 몰랐는데, 조선일보가 해야 한다고 하니 정부가 별 저항 없이 한 겁니다. 조선일보 캠페인으로 관료들이 힘을 받아서 정책 수행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거지요.
당시 조선일보 1면에 ‘체신부 정부통신부로 바꾸라’는 기사를 톱으로 실었더니, 당시 윤동윤 장관이 정보통신부와 중앙정보부랑 혼동되지 않겠느냐고 농담 하기도 했지요. 지금은 정말 강산이 여러 번 바뀌어도 한참 바뀐 셈입니다.
정보라는 말이 나왔지만, 사람들이 정보와 첩보, 즉 인포메이션(information)과 인텔리전스(intelligence)를 아직도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고 있지요. 정보부라고 하면 1급이니 2급이니 하며 정보를 절대 안 내놓고, 정보통신부 하면 자꾸 정보를 소통되게 하려는 쪽으로 이해하지요. 영어에선 인포메이션과 인텔리전스가 구별이 되는데, 우리말과 일본말에서는 구별이 되지 않아요. 일본 사람들이 프랑스 보병교본을 번역할 때, 첩보라는 개념을 ‘적정보고’란 의미로 ‘정보’라고 한 것입니다. 적의 정세를 보고한다는 것이었지요. 실제로 소설에서는 일반적으로 30년대에 쓰였지요. 이게 군대 용어인데, 결혼을 하려면 상대방 남편의 정보를 알아 와라, 이런 식으로 썼지요. 우리가 근대 서양어의 번역어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을 통해서 수입해다 썼는데, 일본에서부터 잘못되면 우리도 잘못 들어올 수밖에요. 정보라는 말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지금이니까 사람들이 그래도 첩보와 정보를 혼동하지 않지만, 일정시대 이래 첩보와 정보를 혼용해서 썼기 때문에, 이전에는 정보라고 하면 중앙정보부를 떠올리며 정보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업에서 정보화시대를 이야기하면 산업스파이적 개념, 즉 기술을 개발하는 것보다는 빼내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지요.
정보는 공유하고(sharing) 상호반응하고(interactive) 자기 증식을 하는 특성이 있지요. 우리가 정보라는 말을 어떤 비유로 쓰는지를 보면, 정보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정보 캐와라’ 하면 노다지를 생각하는 건데, 첩보라는 개념으로 말하는 거지요. ‘정보가 샜다’는 것은 물을 연상해서 첩보를 누설했다는 뜻이지요. ‘정보에 밝다’는 것은 빛으로 본 건데, 첩보 개념보다는 조금 나아간 거죠. 물이나 금 덩어리로 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정보는 냄새로도 비유됩니다. ‘정보 맡는다’고 하지 않나요? 마지막은 공기로 보는 겁니다. 정보는 공기와 같습니다. 아무리 깨끗한 사람이더라도 남의 숨 쉰 것을, 남의 폐에 들어갔다 나온 것을, 내 폐에 집어넣지요. 그래서 공기가 오염되면 큰 일인 것처럼, 정보가 오염돼도 큰 일 납니다.
공기는 중요하지만 값이 없습니다. 정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에게나 길 묻는 것도 사실은 정보를 달라는 겁니다. 그러니 정보에 대해 원래 값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거지요. 그것에 대해 공짜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 사람들의 정보 개념은 공기 개념에 가깝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며 갈대밭에서 외치니 바람을 타고 공기처럼 널리 퍼지는 게 정보라는 생각을 하는 거지요.
이런 인식은 인터넷에서도 똑같이 작용합니다. 공기처럼 쉐어링하는 거, 자기 증식하는 거, 이것이 웹 컬쳐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돈 안 들게 정보를 얻고, 돈 들더라도 정보를 남에게 주고 싶고, 그러고 싶은 게 웹의 문화적 특징입니다. 남의 것만을 다운만 받는다면, 인터넷이 되겠습니까? 업로드, 즉 올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활성화되는 겁니다. 위키피디아처럼 돈 안받고, 저작권 따지지 않고 지식을 올리는 겁니다. 지식은 퍼뜨리는 것만으로 이미 보상받는 거라는 거지요. 리눅스도 마찬가지 경우지요. 카피라이트 (저작권)를 카피레프트, 저작권 개방을 하자는 그룹들은 정보는 남과 쉐어링하는데 값이 있고 이미 그 즐거움과 보람만으로 보상이 끝난 거라는 차원에서 나온 거지요. 한국 사람들은 후배 만나면, 돈 써가면서 밥과 술을 사고 충고하지 않나요? 그것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하는 거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인터넷의 동력이 되는 거지요. 만일 모든 사람이 산업사회처럼 소유하고 지키려고만 한다면 인터넷이 되겠습니까?
일본의 인터넷이 우리보다 활발하지 않는 이유는 남의 것은 가져오면서 자기 것은 지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쉐어링하는 데에 있어서는 일본인들의 민족성이 우리를 못 따라옵니다. 한국인들은 정말 비밀유지가 어렵습니다. 술 사주면서 추켜세우면 정보를 술술 다 내놓습니다. 술만 먹으면 거짓말까지 보태서 다 불어버립니다. 일본인들은 안 그러거든요.
오늘 이 시간 우리나라 인터넷은 먹구름에 가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거짓 선동과 불장난과 범죄에 병들고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한 거대 포털의 힘은 정치난동(광우병 선동), 경제교란(미네르바 우상화), 인격살인(연예인 자살) 등에 악용되고 있습니다. 더욱 걱정스런 것은 이런 어둠이 민주주의와 소통의 자유 및 확대로 미화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정보화 혁명의 핵심인 인터넷의 이런 역기능과 부작용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인터넷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바이러스, 즉 혐기성 바이러스와 호기성 바이러스가 인터넷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운로드와 업로드는 서로 견제합니다. 암은 견제가 없어져서 세포가 무한증식 하는 겁니다. 인터넷에서도 역기능이 무한증식 하는 것을 콘트롤 해줘야 합니다. 이 균형이 깨지면, 인터넷과 정보사회는 망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화장실에서 이상한 성적인 그림을 그립니다. 이게 일종의 익명성인 겁니다. 사람들은 웹에 들어오면 공격적이 됩니다. 예를 들면 아이러브스쿨 같은 사이트에서 동창들이 통신하다 보면, 평소에 얌전했던 사람이 공격적이 된다고 합니다. 왈가닥이었던 사람은 얌전하구요. 주사 심한 사람이 대개는 평소 얌전한 사람 아닌가요? 평소 억압되었던 사람이 사이버 공간에서는 공격적이 됩니다. 마치 거울 같습니다. 비슷한 것 같은데 좌우가 뒤바뀌어 있는 것이죠.
인터넷은 처음부터 오프라인에 불만을 가진 반체제, 반문화, 언더그라운드 컬쳐와 관계가 있지요. 히피문화의 산실인 샌프란시스코 이쪽부터 인터넷이 생겼죠. 처음에는 대학생 두 사람이 검색 디렉토리를 전화번호부처럼 책자로 만들어 오프라인으로 발행-배포했습니다. 인덱스를 만들어서 볼만한 디렉토리를 퍼뜨린 것입니다. 네트워크 호스트 컴퓨터에 접근하는 URL을 책으로 만들어서 보급한 것이 디렉토리의 시초입니다. 이런 것은 일종의 지하 문화가 지상으로 올라온 것이지요.
인터넷이 생기기 전에도 킹 목사 죽은 날 전화망을 마비시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날로그 전화망에서도 스위치박스를 망쳐서 전화가 불통되는 상황을 일으킨 거죠. 해킹이라는 것도 사실은 인터넷 이전에 전화 문화 속에서도 있어왔던 겁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통신망이라고 하는 것은 합법적인 지하문화와 같습니다. 자정능력을 상실해서 관이 여기에 개입한다든지 일부 기업이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했을 때에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면 커먼스나 리눅스 같은 공개 정보나 프로그램이 많아지면 정의로워지는 것 같은데, 돈이 안되면 또 인터넷이 활성화가 안됩니다. 돈이 생겨야 여러 가지 다양한 것들이 나오는 법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컬 한 것은 자정능력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거죠. 불법 전자 책을 막기 위해 강력한 밀레니엄 법을 만들어놓으니까 거꾸로 전자 책도 안되고 종이 책도 안 되고 있지요. 이제 와서는 대단히 후회하지요. 창의적인 힘이 없어지는 겁니다. 1930년대 시카고를 보면 경제가 좋아지면 역설적으로 범죄가 늘어나요. 금주법이나 인터넷법 같은 것은 뭘 잘해보려고 만든 규제법인데 역기능이 나올지 몰랐던 거죠. 그래서 밀레니엄법이 생겨났을 때 “우리가 개발한 것을 왜 너희들이 법 만들고 규제하냐”며 막말과 욕설을 퍼붓는 성명서가 나옵니다. 영화발명 초기 에디슨이 특별법을 만들어서 규제하니까 특허법을 피해 극영화 찍는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간 것이 할리우드의 효시가 됩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서버를 조세피난처나 태평양의 조그만 섬 나라에 두는 일이 많습니다. 아예 실리콘밸리에서는 태평양 바다에 큰 시멘트 섬을 만들어서 거기에 독립선언을 해서 IT 피난처를 만들려고 하는 움직임까지 있습니다.
억압되었던 어떤 부류들은 신대륙에서 개척도 하지만, 쌍권총 차고 나쁜 짓도 하지요. 온라인 상에 젊은 신대륙인 미국 같은 게 생기니까 무법자가 나오는 겁니다. 서부시대의 활기라는 것이 무법천지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점잖은 서부라는 것은 있을 수 없지요. 따라서 의로운 보안관이 나와야 할 때입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 인터넷 보급이 촉진된 것은 왜 그렇습니까?
미국은 땅이 넓어서 광케이블을 깔기 힙듭니다. 집이 띄엄띄엄 있어서 FTTH(Fiber To The Home)가 힘들죠. 그래서 지금까지 주로 케이블 텔레비전과 같은 망을 이용한 것으로 우리처럼 광대역 서비스가 어려웠지요. 일본도 국토가 길어서 광케이블 깔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일본은 해안가를 따라 환상형으로 바다에 수중 케이블을 깔아 옛날에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았지만 이제는 정보를 낚아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반도에다 산악지형 빼고는 인구가 밀집되어 있어서 대단히 큰 효율을 발휘할 수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최초로 초고속통신을 단일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거기서 엄청난 부가가치와 파생 비즈니스가 생기도록 할 수 있었던 거지요. 또 효율적인 인프라를 갖다 보니 다운로드에 대해 정액제를 할 수 있게 되고, 그러다 보니 게임과 채팅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겁니다.
처음 웹이 등장 했을 때 www라는 것이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이 아니라 월드 와이드 웨이팅(world wide waiting)이란 비아냥이 있었지요. 초기에 인터넷 속도가 늦어 킬로바이트로 받을 때에는 모자이크 하나 받는 데에 30분 이상 걸렸습니다. 그러다가 이용태씨가 만든 두루넷 광케이블을 해보니 금새 들어오더라고요. 벌써 들어왔는데 안 온 줄 알고 계속 눌렀지요. 웬만한 건 누르면 바로 들어오더라고요. 10메가 바이트로 들어오니까요. 결국 산업화 낙오생이 정보화에 있어서는 우등생이 되어서 앞서가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지요. 한국 사람들은 타인지향적이어서 남이 하는 것 보면 못 참지요. 인터넷이 갖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욕망과 한국인들이 자기 과시하고 싶고 나눠주고 싶어하는 민족성과 모든 면에서 잘 부합하기 때문에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조선일보의 캠페인이 먹힌 겁니다.
순기능도 압축적 성장을 했지만, 역기능은 더 유례가 없는 것 같은 데요?
외국에는 인터넷 문화에 자정능력 프레임이 있습니다. 누가 나쁜 짓 하면 일제히 공격해서 못하도록 합니다. 일례로 들면 게이오대인가 학생 한 명이 길거리에서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자동차와 부딪혔는데, 일가족이 탄 자동차였어요. 혈기왕성한 대학생은 차를 운전하던 그 가장을 위협해서 끌어내 가족들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이를 동영상으로 UCC에 올렸지요. 그랬더니 이런 나쁜 놈 하면서 어떻게 가족과 애들 있는 앞에서 그러냐며 우리 ‘개똥녀’처럼 전 네티즌들이 공격해서 학교도 못 다니게 만들어 버렸지요.
오프라인에서는 나쁜 짓을 하더라도 재판은 3심까지는 가잖아요. 그런데 온라인에선 한번에 끝나요. ‘개똥녀’도 마찬가지 였잖아요. 이걸 프레임(불꽃)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과해도 안되지만 익명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쁜 짓을 했을 때, 선한 보안관, 즉 레인저(ranger)가 나타나서 자정적 기능으로 인터넷을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한데 우리가 법으로 자꾸 섣불리 손을 대니까 오히려 의로운 사람이 악을 옹호하는 인터넷 역설이 생겨나는 겁니다.
인터넷은 해양 또는 유목 문화의 산물입니다. 사실상 네오 노마드(neo nomad)와 바이킹은 특성이 비슷합니다. 컴퓨터 용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네비게이션(navigation)이 대표적인 용어로, 인터넷을 바다로 보는 거지요. 서핑(surfing)도 해양과 초원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거구요. 부팅(booting)은 신발인 부츠(boots)를 신는 건데, 유목민들은 아침에 일어날 때 신발을 신고 자기 전에 벗잖아요. 거기서 유래해서 컴퓨터를 시동하는 거를 뜻하게 된 건데, 너무 PC가 엉터리라 한번 부팅하려면 장화 신는 것보다 더 어려워요 블로그(blog)란 말도 웹로그(web log)에서 온거지요. 로그(log)라는 것이 배가 갈 때에 통나무 던져서 거리와 속도를 측정해 항해일지를 적는 것을 말 하지요. 웹로그(web log)에서 우리(we)를 빼니까 블로그(blog)가 된 거지요. 왜 뺐냐면 우리(we)들의 항해일지라는 거지요. 아날로그와의 차별화를 하자는 거지요. 유튜브(YouTube)도 유어 티브이(Your TV)라는 거 아닙니까?
이런 것들이 항상 주류에서 떨어져 나온 특정 문화를 이야기하다 보니, 이것이 히피 때부터 계속 되어 온 언더그라운드 컬처와 결합하게 됩니다. 인터넷은 가장 쉐어링하고, 도덕적이고, 가장 자발적이고(spontaneous) 순수한 집단이어야 하는데, 이것이 마치 지하 마약이라든지 무법지대 집단들처럼 되는 경향도 생깁니다. 본래 해킹(hacking)이라는 것은 좋은 뜻입니다. 여러가지 어원설이 있지만 높은 기술력을 갖고 작업하는 것을 뜻한 말이었는데 나쁜 뜻으로 쓰여 지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서울역 등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 우범지대화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한번 보고 마는 장소이기 때문 입니다. 한 동네 안에서는 선량하다가, 동네 바깥에 나가면 해적이 되고 산적이 되는 것도 얼굴을 모르게 되기 때문인 거죠.
익명성은 그나마 괜찮은데, 위명성은 더 큰 문제가 됩니다. 말하자면 남의 아이디를 훔쳐 쓰거나 자기 신분을 과대포장하거나 자기 소개를 거짓으로 하는 경우지요. 미네르바가 그랬고 뜨니까 자기가 미네르바라며 속이고 자랑하는 거지요. 일부 유력인사들에 대해 학력을 속였다고 규탄하는 네티슨들이 자기들이 인터넷에서 하는 것은 자유라고 생각해서는 안되지요. .
내가 디지로그(digilog)를 주창한 이유는 아날로그(analog)와 디지털(digital)이 서로 하나가 되어야 디지털이 언더그라운드가 안되고 함께 주류가 되는데, 그것이 안되고 디지털은 항상 오프라인의 세계인 아날로그에 대항하는 것이란 생각이 강해져 역기능이 발생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보면 후회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인터넷이 이렇게 간다면, 왜 우리가 그 고생을 하며 인터넷 보급에 앞장서 스스로 전도사 역할을 했을까?" 이렇게 말입니다.
제가 제 홈피에서 Q&A를 했는데 처음에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이상한 아이콘과 약자를 쓰더니 결국 서로 욕설하면서 인신공격과 막말이 오가고 서로 싸우더라고요. 결국은 홈피를 사실상 폐쇄해버렸지요.
쉐어링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기쁨을 나눈다는 거지요. 근데 컴퓨터 바이러스 보세요. 바이러스 퍼뜨리고 호스트 컴퓨터 절단내면, 돈으로 환산하면 몇 조원 그냥 날라갑니다. 바이러스 만든 사람이 몇 조원이라도 벌기 위해 그랬다면 말도 안 해요. 필리핀의 러브 바이러스 보세요. 공식집계 안해서 그렇지 전세계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줬잖아요. 그런데 잡고도 손해배상도 받아 낼수 없지요. 능력도 없고 신종범죄라 법적용도 어렵고.
오프라인에선 아무리 나쁜 신문사도 취재기자와 편집국장과 사장이 있어 그나마 필터링이 되는데, 블로그는 자기가 기자고 국장이고 사장인데 과연 이걸 누가 책임을 집니까? 인터넷 홈쇼핑에서 가짜로 만들어서 팔아놓고 도망가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아날로그는 망해도 사무실과 보증금이라도 남는데, 디지털은 아무 것도 남지가 않지요. 몽골 유목민들이 큰 도시 만들어 놓아도 하루 아침에 떠나서 텅 비는 것과 똑 같은 거지요. 그게 노마드 문화잖아요. 그래서 아날로그를 디지털이 보증하고, 아날로그에 디지털이 에너지를 불어넣는 보완관계로 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반 발짝씩 업그레이드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겁니다.
Meme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도킨스란 생물학자가 만든 말인데, 문화에도 DNA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문화 속에서도 유전자가 있어서 문자를 통해서 디자인을 통해서 책을 통해서 그런 유전자가 분명히 축적된 데가 있을 거란 거죠. 그게 Meme인데, 웹2.0을 이야기하며 많이 쓰이는 개념입니다. 이 Meme이 형성되어 문화 유전자가 되면, 인터넷 유전자도 생겨서 이 블로그와 저 사이트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러다 이게 한번 삐끗하게 되어 나쁜 유전자 즉, 이타적인 것이 아닌 이기적 유전자로 변해 그게 지배해버리면, 인터넷의 그 사이버 세계에 미국 신대륙 같은 것이 현실화될 수 없게 됩니다.
미국 대륙엔 탄압받던 사람만 온 것이 아니라 죄지은 사람들도 대량으로 왔습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인 거죠. 가장 빛나는 보석으로 시작했는데, 동시에 옥석구분이 안될 만큼 뒤섞인 쓰레기가 점점 더 커져버렸지요. 스팸이 좋은 예지만, 바이러스 중 혐기성 바이러스가 더 큰 파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터넷의 순기능 보다는 역기능 쪽이 우세해지게 된 겁니다. 블로그나 UCC 같은 거는 개인이 하고 있기 때문에, 문법, 어법, 수준, 품위 등에 있어서 나쁜 쪽이 훨씬 커지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인터넷이 원래의 순기능을 회복할까요?
Meme을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법으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고지대에, 정말 이상적인 사이트, 즉 뉴데일리 같은 곳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모두 신뢰를 받을 수 있는 디지로그 인사들이 참여해서 좋은 모델을 만들어주면 그것이 Meme이 되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렇지 않은 것과 비교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력들이 조금씩 늘어가면 인터넷에서 자정능력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호기성과 혐기성 바이러스들이 미토콘드리아처럼 세포 속으로 들어가서 상호작용을 하게 해야 합니다. 이질적 요소들과 자유분방한 것들이 그렇지 않은 것과 서로 공존하면서 끝없이 새로운 젊은 동력을 만들어 내게 해야 합니다.
성인군자만 있어서는 인터넷이 안됩니다. 그러면 죽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것이 서부개척 지대처럼 부글부글 끓고 화산처럼 터지는 건데, 그런 자기파괴적 요소를 콘트롤해서 그것을 에너지로 사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콘트롤 장치들이 현재로는 의식을 가진 정말 인터넷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면 가만히 있던 사람들도 전부 동조해서 하나 둘 그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인터넷이라는 것이 서비스라는 부분에서 참 기능이 많습니다. 온라인 서점의 최강자 아마존닷컴이 원스톱 서비스를 성공하자, 오프라인 서점의 최강자 반스앤노블에서 같은 서비스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마존닷컴은 특허를 들먹이며 제소해서 이를 막았지요. 비즈니스에는 성공한 셈이지요. 그런데 책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특허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관계가 없거든요. 이왕이면 좋은 서비스를 어느 곳에서나 받고 싶은데 너만 서비스 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거죠. 그래서 Anti아마존닷컴을 만들어서 집중적으로 공격했지요. 독접은 인터넷 정신의 공유정신에 위반된다는 것이었죠 .
아마존닷컴은 여기서 많은 교훈을 얻게 됐습니다. 그래서 더욱 성공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첫째, 누구나 아마존닷컴에서 장사할 수 있게 해주는 거였지요. 그 바람에 사람들이 더 많이 오고, 그래서 적자를 넘어서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타행자리행(利他行自利行)’ ‘자리행타이행(自利行他利行)’이라는 진리를 알게 된 겁니다. 이게 상호작용(Interactivity)입니다.
휴대폰을 혼자만 가지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다른 사람도 가져야 내가 걸고, 내가 가져야 그 사람도 걸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럼 과연 휴대폰의 소유자가 누구냐는 거지요. 이건 역사적으로 소유의 개념이 바뀌는 겁니다.
인터넷의 소유자가 과연 누구 입니까? 사용자 중심에서 보면, ‘내께 니꺼고 니꺼가 내꺼’ 잖아요. 그것이 상호의존적인 거지요. 그런데 우리는 독립이냐 의존이냐 두 가지만 생각하지요.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생각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인터넷에는 상호성 밖에 없습니다.
한참 인터넷으로 온라인 바둑 두다가 “당신 누구요?” “왜 당신 반말이야?” “난 70세 먹은 할아버지인데, 당신은 누구요?” “저는 유치원생인데요” 이런 대화가 벌어지는 곳이 인터넷 아닙니까? 오프라인의 질서가 무질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의 질서와 또 다른 질서가 사이버 세계에 나타나서 그 질서를 함께 섞는 것이 결과적으로 디지로그인 것입니다.
디지로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불루레이 같은 해상도가 높은 차세대 기술을 사용한 소니의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3가 왜 닌텐도의 원시적인 디지털 기술을 사용한 위(wii)에 참패를 당했는가를 알면 됩니다. 키보드, 마우스, 조이스틱이 아니라 실제 아날로그 공간에서 신체를 움직이는 액션으로 사이버 공간에서 게임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탁구를 칠 때에는 컨트롤 바(tv 리모트 비슷하게 생긴)를 탁구채처럼 갖고 움직이고 골프를 할때에는 골푸채 처럼 휘두릅니다. 그러면 사이버상의 자기가 아날로그 상으 자기동작을 그대로 연동하여 따라합니다. 인터페이스가 디지로그인 것이지요. 옛날에는 몸은 현실 세계에 있고 사이버 세계에는 두뇌만 들어 갔는데, 이제는 온 몸까지 사이버 세계에 들어 갑니다. 디지로그 이론은 한국에서 나온 건데 실제로 이것을 실용화한 것은 일본이었지요. 한국 삼성의 햅틱폰도 디지로그 기술입니다. 3차원이 2차원이 된 것이 인터넷이었잖아요. 그것을 촉감까지 살려 삼차원의 아날로그 감각을 살린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세게적인 히트 상품낸 것이 모두가 이 인터페이스를 디지로그로 했기 떄문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최첨단이어도 촉각과 미각을 사용하고 싶어집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즐거움은 미각이지요. 미각이 감각의 끝입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까지 다른 것은 다 대상이 밖에 있는 것을 느끼는 것이지만 미각은 내몸으로 그 대상이 들어와야 맛볼 수 있지요. 자기 몸으로 들어가버리니까요. 벚꽃축제 가서 구경하는 사람은 없고 도시락 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꽃을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먹고 있는 겁니다. 미각으로 전체의 분위기를 어금니로 씹는 거거든요.
이런 디지털, 즉 어금니로 씹는 디지털 사이버 세계가 나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언론이든 게임이든, 이제는 주류, 비주류, 오프라인의 지배, 억압, 이런 관계의 식민지로서의 사이버 세계 혹은 혁명지로서의 사이버 세계가 아니고, 이 성숙한 인터넷은 이제부터 스스로 자정하고 콘트롤하고 스스로 진화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현 인류의 미토콘드리아를 찾아가다 보면 아프리카의 단 한 명의 여인에게로 귀결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인터넷만 글로벌해 지고 세계적으로 네트워킹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피도 글로벌하게 네트워킹되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세계적 언어학자 촘스키에 의하면, 언어도 말이 다르지 구성은 똑같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전 세계가 글로벌화 하는 데에는 사이버와 오프라인의 구별이 없는 거지요. 궁극적으로는 같아지는 거지요. 유전자(Gene)나 Meme이나 같은 거지요.
그럼 요즘 유행어가 된 웹 2.0이란 개념은 무엇인가요?
인터넷의 역기능에 대해선 전 낙관론도 비관론도 아닙니다. 이것을 어떻게 콘트롤해서 인터넷을 풍성하게 하는 황금의 발판으로 만드느냐? 이런 자성의 소리들이 진짜 새로운 웹2.0을 탄생하게 하는 겁니다.
요즘 말하는 웹2.0이라는 것은 인터넷의 툴을 갖고 말하는 겁니다. 웹을 사용하거나 서비스하는 칸텐츠 차원의 철학 문제로 접근한 게 아닙니다. HTML이냐, ASACS냐, 이런 소위 인터넷을 만들고 장사하고 하는 프로바이더들의 논리로 웹2.0을 이야기한 겁니다. 웹2.0은 사용하는 사람들 의식이 업그레이드되어야 되는 것이지요. 위키디피아 환경만 만들어줘서 웹2.0이 됩니까? 웹2.0을 사용하는 사람들 수준이 웹1.0인데 그게 되겠어요?
그 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정착한 민주주의처럼, 사용자들이 서로 질서 지키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되는 사이버 상의 성숙한 시민사회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그런 것이 진짜 웹2.0입니다. 위키니 여러 개의 환경을 섞어 아작스 같은 포멧을 만들어 유저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새로운 웹컬쳐가 생겨나는 것은 아리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웹2.0이란 개념이 나온 지가 도대체 언제인데, 달라진 것이 뭐죠. ? 위키피디아 와 유튜부 구글에서 멈춰있어요.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잖아요.
그래서 인터넷의 진화는 유저들이 변해야 하는 거지 물리적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30분 걸린 거 광케이블로 1분만에 받았다고 해서 편해지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드웨어의 문제일 뿐입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는 SHELL의 법칙(Software, Hardware, Environment, Liveware1, Liveware2)이 그래서 필요한 겁니다. 이 다섯 개의 요소들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면서 상승작용을 하느냐? 여기에서 전체적인 인간의 라이브웨어가 바뀌어야 그 인간관계가 달라져야 하지요. 그래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서로 연결되어 유기적인 생물체로서 끝없이 번식해가는 인터넷을 만들기 위해서는, 호기성과 혐기성 바이러스를 진화의 촉진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뉴데일리는 우리가 사이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책임 있는 언론이 되도록 서로 보완하고 상승효과를 누릴 수 있는 Meme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민들의 호응을 받는다면, 인터넷의 좋은 점을 더 좋게 만들면서 역기능은 오히려 인터넷이 안 맞는, 그런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Meme이 이루어 질 수 있겠지요. 그러면 다수가 빠르게 참여할 수 있는, 서로가 보안관이 되어 스스로 자치능력을 가질 수 있는 서부 개척시대와 같은 뉴프론티어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는 하루하루가 후회스러운 인터넷 상황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설교 자료를 얻기 위해 인터넷 들어갔다, 혈압이 높아져서 다시는 인터넷 안 들어가더군요
지금까지의 말씀은 어느 정도 수준 있는 사회의 장기적 비전을 제시해주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 사이버 세계에서는 의도적인 바이러스들, 즉 한국으로 좁혀보면 친북좌파의 악의적 역기능이 활발한 데 그런 것들조차 디지로그적 차원에서 흡수, 순화가 될 수 있을까요?
구글을 예로 들어봅시다. 조금 머리 좋은 사람들은 관계도 없는 것에 사람 호기심 자극하는 키워드를 집어 넣습니다. 예를 들어 오바마 크림 등이 그렇습니다. 오바마가 나오면 관심이 당연히 높아지지요. 그렇게 조작되는 것이 있듯이 이념과 상업의 세계에서도 조작이 있지요. 우리가 이념과 정치가 큰 일 났다고 하듯이, 광고업자들도 똑같이 큰일 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그러면서도 어제보다는 오늘이 낫거나,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빠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직 망하지 않고 온 겁니다.
온라인 사기가 계속 활기 치지만 온라인 쇼핑규모는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마존닷컴의 경우 신간에만 치중하다, 오래되고 별로 찾지 않을 듯한 고본까지 품목을 확대했더니 오히려 비즈니스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이른바 롱테일 이펙트(long-tail effect)인 것이지요. 자신을 죽이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거꾸로 흑자가 나더라는 겁니다. 또 있습니다. 컴퓨터는 사람 들어있는 사진과 없는 사진을 구별을 못합니다. 컴퓨터는 전부 읽어서 판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비용과 속도가 감당이 안됩니다. 그래서 아마존닷컴에서는 특수한 작업은 온라인 상의 사람이 하도록 프로그램을 짜고 있습니다. 디지철의 소프트웨어안체 아예 인간이들어가는 것이지요. .
이처럼 스팸이나 바이러스를 완전히 박멸할 수 없듯이, 이념이나 정치적인 문제, 이런 모든 것에서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은 인터넷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전 세계적 특성입니다. 거짓말은 정말 쉽게 퍼집니다. 그런데 진짜 신빙성 있는 거는 잘 안 퍼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 먼저는 이게 거짓말인 줄 알지만, 그런데 한참 가면 자기도 모르게 진짜 보다는 가짜를 믿는 슬리핑 효과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그러니까 다들 거짓말인 줄 알고 저것이 루머라고 하면서도, 나중에는 믿게 되는 거지요.
이러기 때문에 인터넷에선 악용하려고 드는 사람이 단기적으로는 이겨요 그게 인터넷의 어려움이지요. 그게 역기능입니다. 그런데 오래 가면 자정능력이 생기고, 인위적으로 막으려고 했을 때에 엄청난 리스크와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중국에서는 천안문사태와 같은 예민한 키워드를 검색하면 즉각 소거되고 입력한 사람을 수사할 수도 있어요. 구글 야후 다 이런 요청을 받아들여 굴복하여 맹비난을 받았지만 가장 인터넷을 통해 자유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를 탄압하려고 하는 세력 및 체제와 손잡고 거기에 들어 가 있습니다. 왜 들어갔겠습니까? 안 들어가는 것보다 들어가면, 가능성이 생깁니다. 오랜 시간이 가다 보면, 절대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거지요 보세요 야후와 구글이 들어가 있다는 것 자체가 그런 언론 통제를 무력화 하는 날을 가져 올 것입니다. 아무리 북한을 찬양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 자신은 북한의 젊은이들이 인터넷 혜택을 받지 못하고 또 받는다해도 그런 언론자유를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요. 자신의 모순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인터넷 공간이라도 손바작으로 하늘을 가리는 공간은 아니잖아요..저질의 블로거들과 아주 높은 질의 블로거들을 놓고 보면, 의도적인 사람들은 오히려 굉장히 논리도 있고 설득력도 있지만, 거기에 대항하는 알바들은 논리도 유치하고 말도 보면 수준이 낮아 정체를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트렌드가 거꾸로 의도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격이 되고 맙니다. 논리는 논리로 대항하고, 클릭은 클릭으로 대항해야 합니다. 클릭은 권총이 아니지요. 인터넷상에서 FBI는 해커들과 싸우다 항상 졌습니다. 그래서 FBI는 해커를 잡아다가 채용해서 해커 수사에 활용하는 거지요. 오죽하면 위조지폐 만드는 사람이 위조지폐를 단속하도록 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인터넷 세계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시대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해줘서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균형을 잡아주는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누가 보더라도 북한은 실패한 나라입니다. 이념이 문제가 아니라 실패한 나라라는 게 중요합니다. 사회주의에서 후계자를 세습하는 나라가 어디 있나요?
그런데도 동조자들이 생기는 것은 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인텔렉추얼 베이스(Intellectual base)를 상실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인터넷의 쏠림현상이 일어난 것이지요. 배는 좌우로 흔들리면서 가지요. 좌우가 존재한다는 것 이념싸움을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사회가 다양하고 건강하다는 증거이지만 한쪽으로 쏠려 배가 뒤집히면 이미 그것은 자유의 인터넷 바다가 아니지요. 그리고 배의 방향이 어디로 행해가는 가 방향만 올바르면 작은 파도의 움직임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이념문제처럼 인구 문제를 보자 구요. 출생률 2명까지는 멸하지는 않지요. 그런데 2명 이하로 1.7이 임계점이라고 해요. 두 사람이 한 사람이 되니까 인구는 복원력을 상실하고 그 민족은 자멸하지요. 복원이 불가능해요. 이것은 인구통계학적으로 나오는 거지요. 그만큼 인류사회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면서도 그 균형을 잃어버리면, 그냥 망하는 거에요.
역사에서 얼마나 많이 이런 일을 보았나요. 참 안타까운 일들이 많지요. 단두대에서 죽은 루이 16세는 개인적으론 사실 선정을 하려고 노력한 사람이었지요. 인권과 민중에게 잘 대해주고 법령을 개혁하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당하는 거지요. 이미 앞에 저질러 놓은 것이 있어서 아무리 선정을 해도 복원능력을 상실하면 이게 바로잡히지 않는 겁니다. 바스티유 감옥은 일종의 탄압받는 민중의 상징이었는데, 실제 그곳에 죄수가 몇 명이나 있었나요? 팩트에서 벗어나 있는 겁니다. 제 걸음만 하는 거지요.
우리가 물통 돌리기를 하면, 처음에는 내가 돌리는데 한참 돌리다 보면 원심력이 생겨 잘못하면 자신이 빨려 들어가 버리지요. 환원 불가능한 탄력성을 말하는 것인데, 인터넷은 이념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무슨 문제든 도배를 해버리는 그 쏠림 현상이 엄청 큽니다. 거기에 의도적으로 바이러스처럼 버티는 스팸이 도를 넘어 버리면, 인터넷 자체가 거꾸로 말려들어가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양식 있고 판단력 있는 사람들이 나서는 것만이, 그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도리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전략이라는 것은 항상 그런 사람들이 덫을 놓는 데 이용하기 쉬운 그 점을 단 한 사람이라도 고쳐주고 외쳐야 합니다. 초창기 기독교시절엔 세례 요한이 당시에 혼자서 했지요. 중세에선 그 엄청난 구교의 탄압 속에서 마틴 루터 혼자서 성경 하나로 버티며 종교개혁을 부르짖었지요. 원래 의로운 일은 의로운 사람 열 명 미만이어서 하는 겁니다.
천 명 만 명이 주장해도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닌 겁니다. 예를 들어보죠. 광우병은 전 세계가 BSE 라고 합니다. 가까운 일본 신문이나 NHK는 BSE라고 하지요. 왜 광우병이라고 안하고 BSE라고 했을까요? 우리는 병 자체에 편견을 갖습니다. 폐병, 옘병 등이 그렇습니다. 장티푸스라는 의학명을 쓰면 과학적 접근이 가능하지요. 그런데 옘병이라고 하면, 휩쓸려서 이성적 사고를 못하게 됩니다. 누구 장례식에 가서 “옘병으로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나요?” 하면 그걸 그냥 놔두겠습니까? 한 대 패주지요. 그런데 “장티푸스로 돌아가셨나요?” 하면 괜찮지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BSE라고 하는 말은 놔두고, 아주 선동하기도 좋고 쏠림 현상을 가져올 수 있는 광우병으로 정부도 여도 야도 모두 통일되어 있는 겁니다. 인터넷에서 한번 BSE 쳐서 들어가 봐요. 스코틀랜드의 광우병 홈페이지가 열리지요. 4000페이지짜리 자세한 보고서를 얻을 수 있지요. 그러나 '매드카우 디지즈'라고 하면 대개다 옐로우 페이퍼들입니다.
과학적 데이터가 없으면, 얼마든지 공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중세기의 페스트가 모두 진짜 페스트였을까요? 우리가 말했던 페스트는 얼마 안돼지요. 다른 병도 다 페스트가 되어 있는 거지요. 고칠 수 있는 것도 죄다 페스트라고 해서 불태워 죽여 버렸겠지요. 이렇게 공포심을 자아내고 불안감을 주지 않도록, WHO는 SARS라든지 하는 연상작용이 없는 학명으로 병명을 짓습니다. 우리는요? 쌍화차, 쌍보탕, 이거 진짜 그 이름에 맞는 효능이 있는 건가요?
아이들까지 길거리에 나오지 않게 하려면 광우병에 쿨하게 대했어야지요. 그런데 정부에서 모든 언론까지 모두가 광우병이라고 했어요. 온세계가 사용하는 공식 병병을 놔두고 광우병이라고 했어요. 사실상 광우병은 처음 멋도 모르고 그렇게 붙인 속명이지 의학적으로 봐도 미친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그래서 병증상대로 소의 뇌가 해변처럼 되는 증상이라는 그것도 일상어가 아닌 라틴어의 학명으로 BSE라고 만든 말을 우리가 외면 한 것이지요.
그래서 전체의 의식이 업 그레이드 되지 않으면 민주화의 기본인 토론문화가 생겨나기 힘들어요.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억측과 떼쓰기가 지배하는 사회가 됩니다. 그래서 인터넷은 밖으로부터의 통제가 아니라 자발적인(스폰태니어스) 자정력을 길러내는 수 밖에 없어요. 나이 많은 사람들도 뒷짐질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인터넷에들어가 의미있는 댓글을 싣고 정론을 펴는데 모두 참여해서 글을 써야 합니다.
대증요법으로 하나하나 고약 붙여주고, 반창고 붙여주고, 수술 해주고, 그런 거 성공한 적이 없어요. 지금 중국이 성공하고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통제하는데도 계속 나오지요. 못 막아요. 특히, 홍콩이나 샹하이를 중국이 통제하지 못해요.
매일 자유로운 인터넷을 통제하려는 싸움은 지게 되어있어요. 전화도 못 막는데 인터넷을 어떻게 막아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터넷이 뭔지 알아야 해요. 디지로그란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책를 썼잖아요.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지적했지요. 그랬더니 디지로그 교회도 생기고 디지로그란 말들을 쓰기 시작하고, 다른 책들고 나오고요. 이런 Meme을 키워서 그것이 점점 커져 나갈 수 있도록 전파력이 강한 것을 써야 합니다.
뉴데일리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요?
뉴데일리는 그래서 상대적인 운동 하지 마세요. 뉴데일리는 어떤 때는 좌파, 어떤 때는 우파로 의심받더라도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일관성이 없더라도 자유롭게 쓰세요. 언론들이 이념에 의해서 내 편은 무조건 옳고 남의 편은 무조건 틀렸다는, 그런 유치하고 비지적(非知的)인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그것을 보여주세요 그럼 그런 사이트는 날이 갈수록 성장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변소간이 되니까 얌전한 사람도 쌍말 하는 거지요. 변소간을 만들지 말라는 거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혐기성 바이러스에 호기성 바이러스를 집어 넣어 주어야 해요. 그런데 혐기성 바이러스는 바로 호기성 바이러스를 살려주는 존재이지요. 꼭 필요해요. 포르노와 도박 때문에 들어온 사람이 호기성 바이러스를 함께 먹는 거지요. 역설적이지만 악인이 없으면 성인군자도 없는 거란걸 명심해야 해요.
쏠림 현상이 있더라도 군계일학으로 이거다 하는 거지요. 글 쓸 때 의도적으로 한번 디지로그로 써보세요. 쏠림 현상이 일어나겠어요? 그러면 결과적으로 어떤 과격한 그룹들이 주장하려고 하는 것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은 아니지만, 디지로그 같은 환경이 인터넷에 생기면 소위 쏠림 현상, 사이버 세상에만 존재하는 이상한 웹 심리는 줄어들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양하게 전개되었을 때 지금과 같은 쏠림 현상이 여론을 대신하는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보세요. 쏠린다고 언제까지 그렇게 가겠어요? 그러니까 지금도 보면 예를 들어서, 이 사람들이 가령 촛불데모를 했다, 지금도 그게 계속되고, 광우병에 걸려서 죽고 그랬으면, 그 세력은 쭉 있겠지만, 지금 미국 쇠고기가 잘 팔리고 있고 그거 계속 먹게 되면, 도대체 그 때 왜 그랬던 거야 하는 의견들이 나오겠지요. 그 난장질을 하며 쇠고기 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이거 아무렇지도 않네 그러는 거지요. 그런데 그게 뭐였냐는 언론은 지금 없어요. 아무도 그것을 분석하거나 하지 않고 그 때 왜곡했다고 잡으러 다니는 거 밖에는 기사가 안 나와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지요. 그거 왜곡한 사람을 잡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때 그걸 보고 느꼈던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알아 보는 게 가 더 중요하지요. 그렇게 되면 그 때 거짓말 한 사람 과잉 보도한 사람은 미디어로서의 존재 이유를 잃는 겁니다.
이렇게 미디어와의 싸움은 절대 물리적인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 과거에도 많이 봤잖아요. 독재국가들 작가들에게 프리미엄이 붙는다는 거요. 왜? 정부를 욕하면 삼류도 일류가 되어서 책이 나갑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잡아가는 사람이 없으니 솔제니친 같은 작가들의 프리미엄이 없다고 업타이크는 한탄을 했지요. 물론 농담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은 뉴데일리처럼 파당성이나 정치적 목적 없이 건실한 정말 자기 목소리를 낼 때, 성공할 거라는 겁니다. 절대 상대적인 운동 하면 안돼요. 이상론 같더라도 자기 길을 묵묵히 가면 길 생기고, 사람 모이고요.
초기 기독교 시절에 예루살렘에선 예수는 보이지도 않았죠. 당나귀 타고 들어갔잖아요. 지금으로 말하면 티코 밖에는 안돼요. 당나귀 타고 들어가자 그 당시 랍비들이 얼마나 무시했나요. 누가 당신에게 그런 자격을 줬냐고 했거든요. 예수는 전혀 라이센스가 없는 사람으로 이상론 같았으면 집 버리고 가정 버리고 고향 버리고 목숨까지 버렸겠어요? 어떻게 인간이 2000 ~ 3000년 멸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겠어요? 적어도 성선설이 성악설보다 옳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온 거에요. 성악설이 맞는다면 인류는 자멸했을 겁니다.
확실히 우리 DNA만 보더라도 긍정적인 것이 이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절대 부정적인 것이 못 이기는 법입니다. 부정은 불이나 마찬가지이지요. 불은 불태우고 나면 자기도 꺼집니다. 그런데 물은 씻을 게 없어도, 땅으로 스며들어서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은 물이지 불이 아닙니다. 물은 참 약해 보이고 불처럼 타오르지 않지만, 물은 호수나 진흙 어딘가에 남죠. 물이 있으면 불은 꺼지게 되어 있어요.
사실상 인터넷은 평화의 무기입니다. 우선 개인적인 것이고, 쉐어링 하는 것입니다. 선의가 아니면 안돼요. 싸이 같은 거 보면, 지 돈 들여 아이템 사서 제 방을 예쁘게 하잖아요. 자기 홈페이지에 방문자 수 늘리려고 별 짓 다하잖아요. 결국 인터넷은 성선설이에요. 결국 악이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스팸이 이메일 잡아 먹나요? 바이러스가 이메일 잡아먹나요? 아니잖아요? 결국은 자멸합니다. 지금은 바이러스도 포르노도 많이 없어지고 있지요. 우리 생각 같아서는 포르노, 바이러스, 도박이 온통 인터넷을 휩쓸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잖아요.유튜브 보면 남을 즐겁게 해주는 내용이 더 많잖아요. 자기 어린애가 이쁜 짓 하면 그거 찍어서 올리고, 그리고 클릭수가 많아지면 기뻐해요. 돈 되는 것도 아닌데… 그 마음이 바로 인터넷이에요. 그런데 이걸 악용하는 바이러스는 있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절대 주가 될 수 없어요. 그 증거로 뉴데일리가 없어졌나요? 여기 인사장 등이 나서서 살리잖아요. 앞으로 그렇게 돼요. 지금 인터넷 위기, 도덕적으로나 쌍말로 인격살인 해서 사람들 몇 명 죽어나갔지만, 그러면서 거기에 바로 자정능력이 생기는 겁니다.
지금 몇몇 사람들이 인터넷에 ‘텍사스 레인저’ 만들려고 하잖아요. 거기 엉터리고 모가 잘못되었다고 따지고 발표하고 고발하고 하는 자발적인 사람들이 점점 늘어 나잖아요. 이런거는 검찰에서 못하거든요. 이게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고 온 국민을 향해 캠패인했던 그 마음이고 정신인 것이지요. 노인들이 마우스로 더블클릭 안되니까 ‘천천히’란 옵션을 줘서 따깍따깍 하게 만들지 않았어요? 그리고 시각장애자들을 위한 자판도 따로 만들었잖아요? 이게 바로 성선설인 거죠.
다른 동물들은 자연에 적응하기 바쁜데, 인간은 창조를 합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창조적이 되라는 겁니다. 인터넷도, 학교도, 경제도, 정치도 모두 창조적이 되라는 겁니다. 이미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적응만 하다가는 공멸하지요. 인터넷에 적응하기 바쁘고, 현대 자본주의에 적응만 해나가면 미래가 없어요.. 이미 빌게이츠가 크리에이티브 캐미펄리즘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진정한 국경없는 시대 디지털 인터넷시대에 맞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우리가 창조해야 합니다. 그것이 소위 의료와 교육분야를 돕자, 그래서 우수한 시장 만들어내자, 점점 시장이 나빠지면 자본주의도 죽는다, 이것이 빌게이츠의 주장입니다. 단순한 자선사업이 아닌 것이지요. 아프리카나 소외된 사람에게 패자부활전 기회를 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당하게 경쟁하는 거기까지만 우리가 만들자, 그래야 시장도 넓어지고 기업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생긴다, 이것이 빌게이츠 활동의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문맹인데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 사겠어요?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 사게 하려면, 적어도 글자는 읽게 해줘야 되잖아요. 그래서 ‘이타행자리행(利他行自利行)’ ‘자리행타이행(自利行他利行)’인 겁니다. 이게 불교 용어인데, 이걸 믿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이로운 것은 남에게도 이롭고, 나에게 해로운 것은 남에게도 해롭다는 거죠.
오도하고, 증오하고, 증오가 폭발하고, 그것이 극대화된 것이 테러인데, 그런 것이 역사를 바꾼 적은 없습니다. 1930년대 볼세비키가 전성기 때에 어떻게 했어요? 처음엔 동조했던 앙드레 지드 등 수많은 사람들이 전향을 했어요. 1930년대 대공황 시절에,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파쇼시대였지요. 독일의 나찌, 소련의 볼세비키, 엄청나게 자유를 잃던 그런 현상 속에서도 많은 지성인들이 제 목소리를 냈어요. 쏠림 현상에 쫓아다니는 지식인은 하나도 무서울 게 없어요. 그건 지식인이 아닌 거죠. 천명이 다 떠나도, 나 혼자 앉아있겠다, 이런 사람이 역사를 만들고 새롭게 했지요. 천명 떠난다고 쏠려서 어벙저벙하는 것은 말이 천명이지 한 사람 밖에 안돼요. 이렇게 천명이 떠나고 혼자 앉아 있겠다는 사람이 백 사람이라면 그대로 백 사람이고 떠나는 천 사람은 한 사람인 것이죠.
그러나 이를 테면 문단에도 좌파문인들의 작품을 많이 보고 그것만이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많을 경우 그런 쏠림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비평을 해야 하는지요.
그렇기는 하지만 그 작가 자신이 옛날하고 지금과 많이 달라졌거든요. 이제는 래디컬하던 작가들의 요즘 인터뷰 보면 알 수 있어요. 작가로서 그렇게 생각해서 쓴 건데, 그런 안목으로 변화하는 시대를 보면 또 달리 보이겠지요. 그게 작가지요. 자기는 그렇게 생각해서, 그 시대에 그 지역에서 그렇게 생각해서 쓴 거지요. 새 세상이 오고 새로운 것을 보면, 또다시 작가의 시각에서 보겠지요. 그런 기회를 주고 그렇게 톨레랑스를 가지고 가는 거지요. 그래 좋아, 그렇게 해, 그게 우리 체제의 특성이야, 대한민국을 막 욕하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해, 그래도 그게 바로 대한민국 안에서 글이 용서되는 것. 그게 대한민국의 힘인거야. 너는 우리와 다르니까 그냥 저리 가, 그러면 그건 북한과 다를 것이 없지요. 오바마가 뭐라 그랬어요? 불과 몇 십 년 전 시골 식당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내쫓긴 사람의 아들이 미국 대통령이 되는 위대한 미국을 우리 지켜갑시다, 그랬잖아요. 반대로 60년 전에 우리 아버지가 쫓겨 났어, 이제는 우리가 한 풀 때가 되었어, 이제는 우리가 그 놈들을 싹쓸이 해야 해, 그럽니까? 그러면 오바마가 죽지요. 오바마가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반은 백인의 피, 그리고 흑인의 피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퓨전이라는 것이 참 위험하면서도, 그 길 밖에는 방법이 없어요. 더구나 우리는 쌈 싸먹을 때 고기도 넣고 야채도 넣고 간장도 넣고 해서 다 씹어 먹지 않아요? 그러니까 두려워 하지 말고 크고 아름다운 보자기로 여러 의견들을 다 쌈 싸야 해요. 그런데 상대방을 의식해서 확 밀면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 어릴 때 마주 보고 손뼉치기 할 때, 내가 힘 써서 밀 때 상대방이 싹 들어가버리면 내가 그냥 엎어지잖아요. 그러니까 냉전 구조에선 두 사람 중 한 쪽이 쓰러지면, 다른 한 쪽도 쓰러지는 일이 벌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초연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론만 말하라는 것이지요. 이제는 사람들이 다 알아요. 그렇게 가다 보면 정론이 이겨요. 구리가 금에게 못 당하는 것이 시간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황금만능주의라고 하는데, 이 세상이 진짜 황금만능주의가 되면 다 살지요. 모두가 변하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갖는 것은, 그거 아주 행복한 것입니다. 금으로서의 본래의 기능, 즉 Being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Doing과 Having에 집착하는 게 문제이지요.
Being은 존재하는 것 그 자체 아닙니까? 이것은 우리 생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본의 시인 마사오까 시끼의 박물관에서 본 내용입니다. 그는 골수까지 결핵균으로 상해 엄청난 고통을 겪습니다. 모르핀이 떨어지면 단말마의 소리를 냈지요. 그러다 30대의 나이로 죽었는데 임종하는 자리에서 그의 어머니가 울면서 “얘야, 너 한번만 더 일어나서 아프다고 해라”라고 애원하더라는 것이지요. 고통 밖에 없는 삶도 죽음보다는 낫다는 거지요. 죽어서 본인도 편안하고, 옆의 사람도 편안하고, 차라리 축복인데, 너 아프다고 어미에게 부르짖으란 것이지요. 이걸 알아야 시를 쓰고, 철학을 하고, 경제를 하고, 정치를 하고 하는 겁니다. Be가 없는데 어떻게 Do와 Have가 나옵니까.
인터넷이야 말로 Be 그 자체입니다. 거기에 좋은 것 올려서 클릭수 얻고, 자기 답답함도 풀고, 남과 이야기도 하고, 그런 게 얼마나 좋은 건데, 사람을 욕하고 사람을 죽이는데 인터넷을 씁니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기 마련이지만, 그 그림자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길어도 결코 주체를 대신할 슨 없습니다. 그것이 그림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림자이고 무엇이 실체인지만 알려주면 됩니다.
‘리만 브라더스’ 파산하기 10분 전까지 경제학자들 전혀 몰랐어요. 금융공학으로 노벨상 탄 학자들이 어디있었나요.. 그랬으면 더 이상 글 쓰지 말고, 말 하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창피한 줄도 모르고 또 떠들지요.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들어갔을 때 군사전문가들은 “소련이 10년간 고생했으니 30년 지나도 군사적으로 힘들 것”이라고 했는데 30년은커녕 일주일도 안 걸려 군사적 조치는 끝났지요. 그랬으면 조용히 있어야지, 또 떠들어대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인터넷이지요. 저 사람 말이 틀렸다고 공박할 게 아니라, 실체와 실체가 아닌 것을 분별을 해주면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