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는 혁명 아니다. 의거일뿐.

    [뉴욕-KPA 한창섭] 한국 정치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중의 하나인 4.19가 발생한지 50년이 되었지만 이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역사적인 의의와 그 영향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미화시키는데 여념이 없는 것 같다.

    4.19 사건의 원인은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대적인 부정이 있어서 이에 분개한 학생들이 일어나서 “이승만 독재 부패 정권”을 넘어트린 “민주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으나 4.19 당시 대학생의 한 사람으로서 이를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필자는 다르게 평가한다.

    고양이에 가발을 씨우고 호랑이 색칠을 한다고 그 고양이가 호랑이가 되는 것은 아닌 것 처럼 4.19는 의거이지 혁명이 될 수는 없다. 4.19의 덕을 직접으로 본 사람들, 특히 김영삼과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김대중과 친북 좌익분자들이 4.19를 혁명으로 격상시켜서 4.19의 진면모를 인위적으로 변모시켜왔다. 임기 만료전에 집권자를 물러나게 한 사건이 혁명이라고 주장한다면 닉슨 대통령을 임기 중도에서 사임케 한 워터게이트 사건도 혁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승만은 부정선거 할 필요 없었다

    필자는 작년 4월 19일에 쓴 칼럼에서 밝힌 것 처럼 4.19는 어디까지나 의거이지 혁명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경찰이 3.15 선거 결과 이후에 발생한 데모 특히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주동이 된 3.15 선거 무효화를 위한 데모에 대한 진압과 저지를 적절하게 하지 못하여 마산에서 8명이 숨지고 70여명이 부상하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고 4월 11일에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 부위에 최루탄이 박힌 17세의 김주열 고등학생의 시신이 떠올랐는데 언론의 자유가 있던 대한민국에서 언론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4.19의 원인을 제공했다.

    당시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는 후보자 등록후에 미국의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세 위암수술을 받은 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사실상 단일 후보로 당선이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문제가 된 것은 부통령 후보인 민주당의 장면씨와 자유당의 이기붕씨였다. 단일 후보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상식적으로도 부정선거를 할 필요가 없었다.

    현대 미국에도 부정선거 시비 잇따라

    선거는 항상 부정 시비가 있기 마련이며 240여년의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미국에서도 지난 2008년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고 심지어 에이콘이라는 단체가 부정선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한 유권자는 7번이나 투표를 했다고 밝힌바 있다. 1960년 선거에서는 케네디가 부정투표로 당선되었다는 주장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으며 2000년 부시-고어 접전 선거에서의 부정시비를 결국 미 대법원의 판결로 결정된 바 있다.
    필자는 부정 선거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민주국가에서는 법에 의해 모든 시비가 결정되는 것이 정도이다.

    혁명에는 언제나 주체가 있고 지도자가 있기 마련이고 사전에 계획이 있는 법이다. 지도자도 없고 계획도 없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혁명이라고 미화하고 격상시키는 것은 그러한 사람들의 자유에 속할지 모르나 이것은 하나의 억지주장에 불과하다.

    4.19 날에 186명이 사망했는데 이들 희생자들을 분류하면 노동자가 61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고교생으로 36명, 무직자가 33명, 대학생이 22명, 중학생과 국민학교생이 19명, 회사원이 10명, 기타가 5명으로 판명되었다. 이 희생자들의 수로 본다면 노동자와 무직자들이 과반수가 된다. 따라서 4.19의 주체는 학생이라고만 말 할 수 없다.

    당시 연세대학교의 조순승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직후 강의시간에 4.19는 학생들과 교수들 그리고 미국의 3자 작품이라고 주장한 것이 기억된다. 사실 259명의 대학교수들이 1960년 4월 25일에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데모를 벌인 후 4월 26일에 이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4.19 성공은 이승만의 '하야 결단' 덕분

    필자는 이 3자 보다 4.19를 성공시킨 장본인은 민주주의를 평생의 신념으로 삼고 실천하도록 노력한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라는 인물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그는 전쟁중에도 국민이 지도자를 직접 뽑아야 한다고 믿어서 대통령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제도를 바꾼 정치가였다. 이승만 박사 처럼 청렴한 정치인도 한국 역사상 드물다. 누가 그를 "부패한 독재자"로 낙인을 찍었고 왜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바로 4.19를 정당화시키고 혁명으로 격상시키려면 그 방법 밖에 없다고 필자는 짐작한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상,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이명박 보다 이승만이 더 부패했단 말인가?

    4.19 이후에 무엇이 달라졌을까? 다만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자유당에 못지 않게 부패하고 무능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것 이외는 바꾸어진 것이 없었다.

    4.19 이후 3개월 20일만에 실시된 7.29 선거에서도 부정은 여전했고 오히려 선거기간에 사상자가 나올 정도였다. 7.29 선거에서 주민의 투표로 당선된 자유당계의 수십명의 국회의원들을 반민주적인 소급법을 제정하여 의원직을 박탈하였고 이러한 소급법에 따라서 공산당 출신으로 좌파사상을 기진 김대중과 같은 인물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어 준 것 이외는 없다.

    떼법 데모 공화국의 원천

    거의 매일 4.19 이후에 한국 사회는 각종 데모로 혼란과 떼법시위가 지배했으며 바로 현재의 떼법데모의 원천을 찾는다면 바로 4.19가 아닌가 필자는 생각한다.
    물론 불의에 항거하는 것은 숭고하고 칭찬받을 일이지만 4.19 이후에는 데모 공화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데모 천국이 되었다. 2008년 3개월간 소위 광우병 난동 촛불 시위를 비롯한 한국에서의 대부분의 불법 시위들이 4.19부터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필자는 생각한다.

    4.19 사태는 바로 1년여만에 5.16 군사 구테타를 낳게 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필자는 본다.
    5.16 군사 쿠데타는 사실 대다수 한국 국민의 묵시적 지지와 승인을 받았다고 필자는 본다. 역사는 가정이나 가설에 입각한 것이 아니고 엄연한 현실에 입각한 것이지만 4.19가 결국 5.16을 가져오게 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국가로 성공하지 않았나 생각할 때 4.19의 의의를 여기에서 찾아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