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공학도→철학박사→가업승계..독특한 이력최장수 상표, 최초의 CM송, 경영자의 TV광고..역사보다 돋보이는 실험정신"일본식 양조기술 섞이지 않은 전통의 간장 맛 되살릴 것"전자공학-철학박사 거쳐 장유회사 입사
  • 충무로의 간장 공장집 장손은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제 아버지를 닮아 '신동' 소리를 들었던 장손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당시 수재만 간다는 경기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68학번)에 합격했다.
    잘나가던 전자공학도였던 장손은 미국 유학 중에 철학박사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아버지는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라고 했지만 아들의 뜻을 꺾진 않았다.
    "미국에서 전자공학 석사를 마치고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경영학으로 눈을 돌렸는데 거기서 말하는 권리나 가치가 철학에서 나온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전공을 바꿨지"

    철학박사가 된 전자공학도는 할아버지 박규회(1976년 작고) 회장이 창업하고 아버지 박승복(89) 회장이 경영하던 샘표식품에 1988년에 입사하면서 가업을 잇는다. 1997년 이후 15년째 샘표식품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박진선(61) 사장이다.

    박규회 회장은 함경남도 원산금융조합 부이사를 지내다 소련군이 오자 1945년 월남했다. 처음엔 명동 대연각호텔 맞은편에서 사무실을 내 학생복 도매업을 하다 '미스야' 식초로 유명했던 삼시장유라는 일본인 소스 회사를 인수했다.

    이 회사는 해방이 되자 일본인 경영자가 떠나고 한국직원 20여명이 겨우 명맥을 유지했는데 경영 상황이 악화하자 미군정청이 적산으로 편입해 새로운 경영자를 찾고 있었다.

    적산은 상당히 싼 가격이긴 했지만 당시로선 간장이나 된장 사업은 상당히 불투명했다. 간장, 된장은 집에서 만드는 것이지 사서 먹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때였다. 그나마 삼시장유의 고객이었던 일본인은 패전과 함께 돌아갔다.

    두 부자가 본 가능성은 월남한 피난민이었다. 남한에 정착하지 못해 간장, 된장을 담글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고향 사람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도 했다.

    교복상을 해 번 돈과 박승복 회장이 일하던 식산은행에서 받은 퇴직금을 합해 삼시장유를 1946년 사들였다.
    샘표식품의 시작이었다.
    지금은 샘표식품이 '역사와 전통의 기업'이지만 창업 초기엔 실험정신이 돋보인 회사였다.

    1950년대에 주부사원을 고용한 것도 당시엔 파격적이었다.

    여성, 그것도 기혼여성이 직장을 다닌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들은 샘표간장을 직접 들고 가정을 방문해 다른 주부를 상대로 1대1 마케팅을 벌였다.

    시식행사도 색다른 판매 기법이었다. 팔기에도 급급한데 공짜로 간장을 먹어보게 하는 것은 그야말로 '엉뚱한 짓'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사서 먹는 간장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때여서 소비자가 '집에서 담근 간장못지 않다'고 생각을 바꾸도록 하는 게 급선무였다. 공장에서, 대로변에서, 음식점에서 시식행사가 진행됐다. 결과는 대성공.

    그리고 1954년 창업 9년만에 장류업계에서 1위에 오를 수 있었고 그해 샘표라는 상표를 특허청에 등록했다. 간장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게 깨끗한 물이고 이 물의 근원이 '샘'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상표가 된 사연이다. 진로와 펩시콜라가 뒤를 이었다.

    샘표간장이 60여년간 '국민간장'으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데 1등공신은 뭐니뭐니해도 한국 최초의 CM송이다.

    1961년 가수 김상희가 부른 "보고도 몰라요~"는 라디오를 타고 전국으로 퍼졌고 심지어 대학생들의 응원가로도 쓰였을 정도로 대히트작이었다. 충무로 공장 3층 옥상에 네온사인 광고를 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것도 한국 최초로 남은 기록이다.

    1980년 3월 깨지기 쉽고 무거운 유리병 대신 페트병으로 간장통을 바꾼 것도 샘표가 처음이었다.

    샘표식품이 항상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박진선 사장은 "1985년 8월4일은 샘표식품 역사에 가장 큰 어려움이 시작된 날"이라고 기억했다.
    영세한 무허가 간장 제조업자들이 소금물에 검은 색소를 타 값싸게 팔아먹었다가 구속됐다는 뉴스가 방송에 나왔고 보건사회부는 간장 업체를 대대적으로 조사했다.

    반사이익을 기대했던 샘표는 오히려 이 뉴스로 직격탄을 맞았다. '간장=샘표'라는 인식이 소비자에게 각인됐었기 때문이었다. 판매량이 급전직하했고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소비자의 항의가 빗발쳤다.

    1968년 5월에도 신문의 오보때문에 1년간 고생을 했었지만 이번엔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60년대와 달리 각 가정에 TV가 다 보급돼 순식간에 전국적인 문제로 일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보건사회부를 찾아가 위생국장이 해명하도록 했지만 이런 기사는 보도조차 되지 않았다.

    박승복 회장은 고민끝에 'TV뉴스가 발단이 됐으니 이에 준하는 파급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직접 TV 광고에 출연하기로 했다.

    "샘표는 안전합니다. 마음놓고 드십시오. 주부님들의 공장 견학을 환영합니다"

    광고가 나간 즉시 공장 각종 소비자단체와 어머니회의 견학광고 신청이 쇄도했다.

    TV광고에 기업체의 사장이 나온 것도 처음이고 식품회사가 공장을 '오픈'한 것도 처음이었다.

    박 사장은 "샘표식품이 60년 넘게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때부터 몸에 밴 사람 중시와 검소의 정신 때문인 것 같다"고 '비결 아닌 비결'을 설명했다.

    전쟁이 일어나 마산으로 피난을 갔을 때도 가진 돈과 은행예금을 직원에게 골고루 나눠줘 "살아서 만나자"고 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 직원들이 다시 모여 공장을 다시 세울수 있었다.

    1960년대 말 맥주병을 손으로 씻어 간장을 담았는데 이 공병세척부에서 일하던 이들은 40∼50대의 비정규직 아주머니였다. 병을 씻는 기계가 들어오게 되자 바로 전날 저녁 이 아주머니들을 정식사원으로 발령해버렸다.

    "회사에선 난리가 났었죠. 할아버지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분이셨어요"

    직원은 가족이고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창업주의 일념때문에 지금까지 한번도 감원이나 구조조정을 하지 않은 회사가 될 수 있었다고 박 사장은 말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박 사장 역시 "우리 회사엔 참 좋은 분들이 많이 계신다"라는 자랑을 수차례나 늘어놨다.

    1980년대 극심했던 노사분규와 외환위기를 아무런 탈없이 넘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전통이 밑거름이 됐다. 이익이 남으면 직원들과 나누고 별다른 일이 없으면 오후 5시반에 꼭 퇴근하도록 해 '샘표 공무원'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1970년대 말부터 재무상황을 직원에게 공개해 임금협상 땐 사측은 '더 올려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노조는 '월급을 올려달라고 해 미안하다'고 하는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 사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한 다음해인 1998년엔 외환위기로 노조가 먼저 "임금을 동결하겠다"고 했고 이듬해 매출이 15% 오르자 사측이 "2년치를 한꺼번에 인상하겠다"고 제안했다.

    지금도 57세 정년이 되더라도 본인과 해당 부서가 원하면 5∼6년 더 일할 수 있다. "50대에 퇴직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는 게 박 사장의 생각이다.

    검소는 집안 내력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 집에서 밥을 먹기 싫었을 정도로 반찬이 없었다니까요. 하하하. 돌아가실때가지 20년 넘게 동네 이발소에 다니신 분이고.."

    박규회 회장때부터 간장의 원료인 콩이 들어오면 샘표식품 모든 임직원이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떨어진 콩을 줍느라 분주했다.

    예전엔 콩을 담는 부대가 허술해서 콩이 흘러나왔는데 회장이 먼저 콩을 줍는데 다른 임직원도 가만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절보다 직원도 많아지고 설비도 현대식이지만 박 사장의 요즘 관심은 다시 '전통'이다.

    지금 팔리는 간장은 일본식 양조 기술이 섞여 우리나라 전통의 조선간장과 맛이 다르다는 것이다.

    "맛있는 불고기집을 갔더니 간장을 사서 쓰는 데는 없더라고요. 조선간장의 맛을 되살리고 싶어 열심히 연구중입니다"

    지난해 열린 '서울 고메(Seoul Gourmet) 2010' 행사에서 공식 협찬사로 나가 간장을 일본식인 '소이 소스'(soy sauce)로 표기하지 않고 우리발음 그대로 'GanJang'이라고 써 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고추장은 '칠리 페이스트'(chilly paste)가 아닌 'GochuJang'이 맞다는 게 박사장의 고집이다.

    직원들은 박 사장을 학습지 이름을 따 '빨간펜'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보고서나 기획서를 올리면 맞춤법까지 '첨삭지도'하기 때문이다.

    이는 박 사장 뿐 아니라 창업주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버릇이다.

    "원칙과 기본이 몸에 밴 회사가 오래 간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