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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인보길 초대석]의 손님은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이다. 과학계 인사로는 첫 번째 초대손님인 오세정 원장은 우리나라 기초과학을 현재 수준까지 끌어 올린 주역이다.
경기고와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온 오 원장은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가 Stanford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美 Xerox Palo Alto 연구소를 거쳐 1984년 귀국, 현재까지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육부 2단계 BK21 사업기획단 위원장,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장, 한국과학재단 이사, 교과부 ‘세계적 연구중심대학’ 사업 총괄관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해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에 취임, 기초과학 연구 지원에 앞장서다 새로 설립되는 기초과학연구원 초대 원장에 임명됐다.
현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교과부 기초기술연구회 이사, 청암 과학상 및 청암과학 Fellow 심사위원장,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위원회 위원,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을 겸하고 있다.
1994년 제4회 과학기술 우수논문상, 1998년 제6회 한국과학상, 2003년 제2기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자상’을 수상했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터전을 닦고 머릿돌을 놓는 것이다. 한 평생을 기초과학연구에 바친 그에게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들어 본다.
<오>=오세정 원장, <인>=인보길 뉴데일리 대표.<오> 어이구. 누구신가 했어요. 정말 반갑습니다.
<인> 몇 달 만에 보는데 아주 반가워요. 어려운 자리 맡으셨는데 먼저 우리나라 기초과학 연구 현황은 어때요?
<오> 지금까지는 정부출연기관들의 연구가 응용이나 개발연구 쪽에 많이 치우쳐 있었는데, 그것을 이제 적어도 정보화라든지 기초과학쪽으로 바꿔야죠. 그런 포트폴리오의 재구성 작업에 들어가야 된다고 보구요.
<인> 그건 어디까지나 정부레벨이고요.
<오> 네. 정부레벨이고요.
<인> 요즘 정당들이 앞다투어 선심성 정책을 발표해 앞으로 5년 동안 복지예산으로만 340조, 연간 65조가 필요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런 돈은 공짜로 나눠주는 돈으로 써버리는 것같아 안타까와요.
<오> 그 얘기는 좀...
<인> 실질적인 복지정착을 앞당기기 위해 그런 돈을 과학기술발전을 위해 투자해야 될 것 아니에요? 한해 65조씩 그냥 먹어 없앤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죠.
<오> 그런 기사는 인 대표님께서 쓰시면 되고 저는...(웃음).
<인> 아니, 건국 이후 처음 생긴 기초과학연구원인데...그런 돈을 기초과햑연구에 썼으면 해서요.
<오> 기초과학을 담당하는 독립연구기관이 세워진 것은 건국후 이번이 처음입니다.
<인> 63년만에 처음 생기는 것이지요..
<오> 이게 놀라운게요. 일본의 리켄(기초과학연구원이 롤 모델로 삼은 해외 연구기관 중의 하나)은 1917년에 생겼어요. 거의 백년 돼가요. 그리고 독일의 막스플랑크가 1948년 생겼는데 그 전에도 전신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백년가까이 뒤진 거구요.
<인> 그러니까 일본은 노벨상 수상자가 그렇게 많이 나오지요.
<오> 예. 그러니까 많이 나오죠. 일본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대부분 리켄을 거쳐 갔습니다. 거기서 꼭 안 받더라도 연구원도 하고 그랬죠.
리켄 역사를 보니까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할 때하고 참 비슷해요. 그런데 KIST는 대통령이 밀어붙여서 된 거고, 리켄은 그런 건 아니었는데 과학자하고 정부관료 몇 사람이 우리 이런 거 해야 된다, 서구를 따라 가려면 이런 거 해야 된다, 그래가지고 만든 거에요.
전 백년 전에 그들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게 참 놀랍더라구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일본사람들은 상당히 빨라요.<인> ‘유럽을 따라잡자’는 구상을 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당연히 그런 정책이 나온 것이지요.
<오> '유럽을 따라잡자'는 생각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인> 그렇죠. 연구재단 이사장님을 한 일 년 하셨는데, 그 전에도 계속 이쪽에 계셨고, 어깨가 상당히 무거울 것 같아요.
<오> 네. 맞아요. 힘들어요. 과학계에서 요구하는 사항들도 있고 정부나 국민이 기대하는 바도 있고, 그래서 그걸 잘 조정하고 과학자들한테 (연구를) 편하게 해 주고 성과가 잘 나와 가지고 다시 투자가 되는, 그런 부분들 때문에 고민을 할 때도 있죠.
(이런 일들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도 이런 역할을 해야 할 위치에 와 있으니까 할 수 박에 없는 거죠. 잘 하려고 합니다(웃음).
<인> 처음에 임명됐다는 소식 듣고 느낌이 어땠어요?
<오> 사실 처음에는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닌데’하는 생각을 했어요. 연구재단에 간지 1년 정도 밖에 안됐고, 거기서 추진하던 일들이 있었구요.
그런데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일인 거에요. 여기 공모할 때 응모도 안했었요. 그래서 조금 의외였고 엄청난 부담도 들었고, 이게 새로 만드는 기관 이잖아요.
<인> 한 평생 과학기술계에 몸담으셨잖아요. 특히 실험물리쪽에 오래 계셨던 걸로 아는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오> 제가 미국 스탠포드대학에 있었잖아요. 그때도 계속 논문을 썼는데. 한국에 들어와 2년쯤 지나서 과학상을 받았어요. 그 논문이 굉장히 중요하다 생각해서 미국 물리학회지에 투고를 했는데 거절을 당했어요.
논문을 투고하면 심사자가 평가해서 거절할 때도 심사평이 와요. 게재를 거절하는 심사평이 왔는데 그것도 아주 장문으로 왔어요.
그러면서 이러이러한 아주 기본적인 것들을 읽어야 된다고, 내가 다 아는 논문들을 읽어보고 공부해야 한다고 지적한 거에요. 그때 ‘아 내가 완전히 무시당한거구나’ 하고 느꼈죠. 미국에 있을 땐 전혀 그런 걸 못 느꼈어요. 소속기관이 스탠포드였으니까요.
그런데 (논문에) ‘서울’하고 ‘한국’이라고 쓰니까 그 심사한 사람이 ‘이거 한국에서 제대로 했겠어?’ 이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당시 제가 쓴 논문은 굉장히 새로운 이론을 적용한 거였어요. 내가 판단하기에는 심사자가 옛날 것 밖에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뭘 냈는데 자기는 이해도 잘 안 되고 하니까 이런 논문을 봐라 하구, 내가 다 아는 옛날 논문들을 읽으라고 한 거에요.
그걸 받고나서 화가 나더라구요. 이럴 수가 있나. 그래서 편집자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심사한 사람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해 이해를 못하는 것 같은데, ‘한 글자도 못 고치겠다. 내 논문 심사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 달라’고 말이에요. 제 편지를 받고 편집자가 다른 심사자에게 논문을 보냈고, 학회지에 논문이 게재됐어요,
그때 느낀 게 ‘과학은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구나’ 하는 거였어요. 조직도 있어야 되고 국격도 있어야 되고, ‘급’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어요.
이 일은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평가와 승진기준을 바꾸는 계기가 됐어요.
아무리 개인이 뛰어나도 기관의 위상이 같이 올라가지 않으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래서 서울대가 잘해야 되고 한국이 잘해야 된다고 생각했죠.
우리 연구원이 해외 석학들을 자문위원으로 모실 때도 일단 사람들 첫 번째 반응은 “여기가 뭐하는 데야?” 였어요. 관심이 없어요 일단. 그리고 기관 소개서를 보내줘도 읽어 보지도 않아요.
그래서 한 두 군데 제가 찾아가서 우리가 이런거 한다고 직접 설명하니까 “아 그럼 할 만 하네” 하면서 노벨상 받은 분들도 자문위원으로 모셨어요.
한국이 아직은 기초과학쪽에서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아요.
(기초과학에 있어서는) 선진국 수준은 아니라서 ‘하면 얼마나 할까?’ 하는 냉소적인 반응도 있어요. 처음 시작하는게 쉽지는 않더라구요.그런데 외국에서도 “이제 한국이 이런 거 할 때가 됐다” 가전제품이나 기술쪽으로는 한국이 알려져 있는데 자기들이 보기에도 이젠 이걸(기초과학 연구) 해야 한국이 한 단계 점프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해요.
<인> 혹시 리켄이나 막스플랑크 같은 해외 연구소들이 질시 내지는 견제 같은 건 하지 않았나요? 그들 입장에서 보면 강력한 경쟁자가 출현하는 것일 수 있잖아요.
<오> 있었어요. 막스플랑크 쪽에서는 별로 못 느꼈는데 일본에서는 견제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일본에선 현재 과학자들에 대한 연구비 지원이나 이런 것들이 옛 날 같지 못하거든요. 자기들은 약간 ‘다운’ 된다는 느낌이 있는데, 한국은 오히려 엄청 지원을 늘려 새로 시작한다고 하니까 질시 내지는 질투, 뭐 이런 것들이 은근히 있는 듯 해요.
그러면서 우리가 과연 잘 되겠느냐는 약간 회의적인 반응도 있었어요(웃음).
<인> 미묘한 그런 게 있었군요.
<오> 저도 충분히 이해가 되요. 리켄이 지금 가속기만 여섯 개째 만들고 있어요. 2차 대전 전부터 가속기를 만든 대단한 곳이에요.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맥아더가 일본에 들어와 리켄의 가속기를 부숴버린 일이 있어요. 그게 핵폭탄 개발에 쓰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있어서 리켄의 가속기를 뜯어서 도쿄만에 갖다 버린 거에요.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옛날부터 이런 역사도 있었고 그들 스스로도 누구보다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도 가속기를 만든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 마음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인> 자부심이 대단하네요.
<오> 가속기 분야에서 자부심이 대단하죠. 그런데 이제 한국이 막 쫒아오려고 하는데다 전자 분야에서도 한국이 일본을 뛰어넘고 그러니까 그런 (질시 같은) 게 있을 것 같아요.
<인> 기초과학연구원 기본단위인 연구단을 개방형으로 운영한다고 했는데 해외 연구자들도 많이 참여하겠어요?
<오> 제가 84년에 귀국했는데 그때만 해도 미국에서 온다 그러면 (정부에서) 비행기 값을 대줬어요. 과학자 유치 프로그램이 있어서 70년대 초에는 아파트도 주고 그랬죠. 제가 올 때도 이사비용은 신청하면 지원해 줬어요.
그런데 그 후엔 이런 것들이 없어졌어요. 한 동안은 여건이 좋아지면서 지원이 없어도 많이들 들어왔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여건이 외국보다 좋지도 않고 (연구자들이 취업할만한) 직장이 그전처럼 늘어나는 추세도 아니구요.
이런 딜레마가 있어요. 아주 잘하는 사람은 외국이 연구여건이 더 좋으니까 그냥 남아 있고, 그런데 한국도 서울대나 이런 상위레벨에 있는 기관들은 눈높이가 높아져서 외국에서 잘하는 사람만 데려오고 싶어 하죠.
우리가 원하는 사람들은 저쪽에서 오려고 하지 않고,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우리 눈에 차지 않고 그러니까 ‘미스매치’가 있어요.
기초과학연구원을 만들면서 “우리가 외국에 있는 것만큼 연구여건을 해 줄 테니 와라”하면서 ‘브레인리턴 500’ 프로젝트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지원한 사람 중에는 순수 외국인도 있고 외국에 있던 한국 사람도 있고 그래요.
<인> 성과평가가 3년 단위인데, 막스플랑크 같은 경우는 주제 연구가 끝나면 새로 연구소를 만들고 하는데 여기도 그런 형태로 운영되나요?
<오> 연구단장으로 선임되면 장기적으로 지원할 거에요. 제가 잘 아는 물리학자 한 사람이 나이가 50세인데 미국의 스텐포드 대학과 독일 막스플랑크에서 동시에 테뉴어(종신 교수) 제의를 받았어요.
월급은 스탠포드가 두 배쯤 많았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막스플랑크를 선택했어요.
그래서 월급은 저쪽이 더 많고 지원도 더 좋은데 왜 그랬냐 했더니, “내가 나이가 50인데 뭔가 새로운 걸 한다면 기회가 한 두 번 밖에 없을 것 같다. 미국가면 월급은 많이 받을지 모르지만 연구비 따러 계속 돌아다녀야 되고 장기적인 플랜이 어렵다. 그런데 막스플랑크는 월급은 적을지 모르지만 연구비 지원이 안정적이다. 그래서 막스플랑크를 선택했다” 이렇게 답하더라구요. 과학자들에겐 이런 게 굉장히 중요해요.
돈을 많이 받는 것 보다는 간섭받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를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을 마련하는 것, 이게 연구자들이 가장 바라는 희망사항이에요.
우리가 그런 것을 따라가려는 거죠. 안정적인 지원을 하고, 평가도 단기간에 하지 않겠다, 그러니 정말 하고 싶은 연구를 장기적인 안목에서 해봐라,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지요. 저는 우리가 성공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봐요.
<인> 해마다 연말이면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는데 우리는 언제쯤이면 나올 거냐는 말을 많이 해요. 일본은 아예 해외를 나가본 적이 없는 순수 토종학자가 노벨상을 수상했어요. 그런 것 보면서 비교를 하곤 하는데 언제쯤이면 수상자가 나올 것 같아요?
<오> 저는 항상 10년 안에 나올 거라고 대답을 해요. 노벨상을 타는 데는 두 가지 유형이 있어요. 하나는 약 20년 전에 만든 업적인데 그 동안에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평가하면서 언젠가는 노벨상을 탈 것이라고 인정받는 ‘후보군’들이 쭉 있어요. 이런 경우는 한 10년전에는 예측이 되죠.
또 하나는 일본의 한 회사원이 노벨상을 받은 경우가 있죠. 이 사람은 박사도 아니고 학사거든요. 이런 경우는 정말 우연한 발견을 가지고 받은 경우에요. 최근에 각광받는 그래핀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경우도 10년 전에는 이 사람들이 상을 받으리라곤 아무도 생각을 못했거든요.
노벨상 수상 자 중 절반 이상이 우연한 발견으로 받습니다. 예측하고 실험을 한 게 아니라 실험을 하다 보니까 새로운 결과가 나오고 그게 중요한 발견으로 이어지는 거죠. 이런 경우는 누가 받을지 몰라요.
이런 게 되려면 충분한 실력을 갖춘 여러 사람이 남이 안하는 연구를 하는 게 필요하죠.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에는 그 정도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고, 그 사람들이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봐요.
20년 전 업적으로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현재로선 잘 안보여요. 그땐 정말 우리나라 과학계 여건이 열악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젊은 사람들이 연구하는 것 보면 ‘저러다 일 한번 내겠다’ 싶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어요.
<인> 수상자가 연구원에서 나오면 더 좋겠지요?
<오> 그럼요. 하지만 아니어도 좋아요. 사실은 우리가 연구성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우리나라 연구 분위기를 바꾸는 겁니다.
왜 제가 계속 장기적인 연구를 강조 하냐면, 지금까지는 기초연구도 축약형, 모방형 연구에 가까워서 외국에서 이미 한 연구를 따라가거나 조금 바꾸는 그런 연구가 많았어요.
논문은 나오는데 아주 임펙트가 있는 게 아닌 거에요. 그런게 아직도 많아요. 평가를 매년 하고, 논문은 내야 하고, 내년에 뭔가 나와야 하고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3년 단위로 평가하고 성과에 매이지 않는 그런 분위기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가면 다른 기초연구들도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는 겁니다. 연구하는 분위기를 바꾸는 게 또 하나의 커다란 목적이에요.
<인> 기초과학연구원이 지렛대가 돼 전체적인 연구 풍토가 바뀌기를 기대하는 거군요?
<오> 네. 그렇습니다.
<인> 기초과학연구원은 과학벨트의 핵심 인프라인데 기존 정부출연 연구기관 비교할 때 가장 큰 차별성은 무엇인가요?
<오> 우리나라 과학은 지금까지 산업화와 연계된 분야에 집중적인 투자를 해왔습니다. 자동차, 반도체, 통신, 조선, 건설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는데 기존의 출연연도 산업화에 큰 비중을 두고 있어요.
하지만 기초과학연구원은 기초과학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입니다. 기초과학은 응용연구, 융합연구 등 과학 전반의 뿌리라 할 수 있어요. 이런 의미에서 IBS의 설립은 한국 과학의 뿌리를 더욱 튼튼히 하는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인> 기초과학 분야 세계 10대 연구기관을 비전으로, 상위 1% 인용논문 세계 10대 게재기관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이런 목표를 달성키 위해 가장 선행돼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오> 우수한 연구기관이 되기 위해선 우수한 연구자가 있어야 하며 그런 연구자들은 제대로 된 환경을 원하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이 원하는 제대로 된 환경은 연구자에게 연구에 대한 독립성·자율성 보장이 첫 번째입니다. 그래야 연구자들이 마음껏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으며, 그래야 연구에 몰입할 수 있고 이런 환경 속에서 독창적인 우수한 연구결과가 나옵니다.
<인> 우수과학자의 직장선호도 1위 기관도 목표로 제시하고 있어요. 정부출연 연구기관, 특히 기초과학 분야 연구자들의 처우는 대학 및 대기업 연구소와 비교할 때 열악한 면이 많은데 원장이기 이전에 같은 과학자로서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오> 수십년 과학계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를 보면 만감이 교차하곤 합니다. 지금의 경제발전 등 한국을 있게 한 원동력 중 하나가 과학기술입니다. 우리나라 과학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도 과학자들은 과학발전과 이를 통한 사회발전, 국민행복을 위해 청춘을 바치고 있어요. 하지만 연구환경과 연구자들의 복지는 과학종사자들의 열정에 못 미치고 있죠.
현장의 연구자들이 해외 연구기관으로 혹은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는 현상은 우리 과학의 현주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 연구원은 모두 50개 안팎의 연구단을 운영합니다. 연구단 선정은 평가위원회의 서면평가와 분과위원회의 패널평가를 거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위원회 구성 상황은 어떻습니까?
<오> 연구단 선정·평가위원회 평가위원장은 피터 풀데(Peter Fulde)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 소장이 맡아주셨어요.
피터 풀데 소장은 독일 드레스덴(Dresden)의 막스플랑크-복잡계 물리연구소(MPI-PKS) 초대 소장을 지냈고 현재 포스텍 아테물리이론센터 소장으로 활동 중입니다.
특히 그는 폴란드와 독일에서 활약한 물리학자를 대상으로 수여하는 상인 마리안 스몰루호프스키-에밀 바르부르크 물리학 상(The Polish-German Marian Smoluchowski - Emil Warburg Physics Prize)을 수상하는 등 물리학분야 석학입니다.
더불어 위원회 구성도 이제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어요. 외국에서 활동하는 석학들이 절반 이상 참여하실 예정입니다.
<인> 연구단 운영에 있어 '사람 중심' 지원체계 구축에 방점을 찍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원장님께서 구상하는 '사람 중심' 지원체계의 청사진은 무엇인가요?
<오> 우수한 연구는 사업화나 성과를 목표로 설정하지 않아요. 이것을 목표로 정하면 자연스럽게 모험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즉 가능한 연구, 뻔한 연구만 하게 되고 말아요.
연구는 사람이 하는 거에요. 우수한 연구자를 모셔서 이들에게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면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연구를 하게 되죠. 이런 연구가 누구도 하지 못한 독창적인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특히 지금까지 우리나라 과학은 선진국 추격형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한국 과학이 한 단계 점프 업 하기 위해선 따라가는 과학이 아닌 선도하는 과학을 해야 하며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봅니다.
IBS는 선도하는 과학으로 기초과학 분야 최고 수준의 기관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인> 연구원의 미래는 연구원들의 손에 달려있을 것 같습니다. 우수 연구자 영입이 그만큼 중요할 텐데 연구원이 수립한 '브레인 리턴 500'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오> 브레인 리턴 500은 연구단 구성과 함께 IBS의 중요 사업이에요. 이 사업은 외국으로 나간 우수한 한인 과학자 등 과학인재를 한국으로 들어오게 하는데 목적이 있어요.
지금까지 연구환경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났던 그들에게 해외 선진국 이상의 연구환경을 제공해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국내외 원로과학자들도 이번 사업에 큰 기대를 하고 있어요. 당시 열악한 연구환경 때문에 떠나는 동료, 선후배들을 기쁜 마음으로 보내지도, 그렇다고 잡지도 못했던 서글픔을 이제는 후배들이 겪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에요.
특히 어쩔수 없이 한국을 떠났던 동료와 선후배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돼 가슴 뿌듯하다고 말씀들 하세요.
<인> 부설기관인 중이온 가속기 연구소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요. 연구소 설립현황은 어떻습니까? 언제쯤 본격적인 운영이 가능할까요?
<오> 현재 중이온 가속기 사업단을 구성하는 작업과 함께, 가속기 개념설계를 보완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금년 6월까지 개념설계 보완을 완료하고 내년 6월까지 상세설계를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또 상세 설계를 진행하면서 필요한 핵심 기술에 대한 개발을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외국의 국제적인 가속기 연구소와의 협력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 중이며 금년 중으로 몇 개의 연구소와 협력 양해각서(MOU)를 맺을 전망입니다.
<인> 원장님께서 그리는 연구원의 5년 후, 10년 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 5년 후면 IBS가 어느 정도 틀을 갖췄을 것으로 보입니다. 연구단들이 각각의 연구에 매진하고 2017년까지 진행되는 ‘브레인 리턴 500’ 사업도 마무리를 지을 것입니다.
연구단이 연구를 진행한지 10년이 되면 노벨상을 수상할 연구결과도 나올 것으로 예상합니다.
지금 우리가 독일의 막스플랑크와 일본의 리켄을 벤치마칭 했지만 훗날 이 연구기관들이 한국의 IBS를 역(逆) 벤치마칭하는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하며 그날을 생각하면 흐뭇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인터뷰 = 인보길 대표
정 리 = 양원석 사회팀 기자
사 진 = 양호상 엔터테인먼트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