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소총회가 남한만의 총선거를 결의
     
       미국 레이크서섹스의 유엔소총회는 서울의 유엔임시한국위원단으로부터 앞으로의 활동방침에 대한 지시를 요청받고  1948년 2월 19일부터 한국문제를 토의했다.
       회의장 밖에서는 임병직과 임영신이 자유총선거 실시안이 통과되도록 각국 대표들을 상대로 열심히 로비 활동을 벌였다. 
      소련 대표는 소총회가 유엔헌장을 위반한 것이라며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미국 대표는, 남북한 동시 총선거가 불가능하다면, 유엔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남한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에 이미 사실상의 공산정권이 세워졌으므로 남한에서도 정부를 세우기 위한 선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경우에 남한에 전체인구의 3분의 2가 살고 있으므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북한지역 몫으로 남겨두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권 밑에 있던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대표들은 미국의 이러한 주장에 적극 반대했다. 남한만의 선거는 분단을 고착시킬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캐나다는 소련과 같은 의견이었다. 유엔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권한이 없으므로 종전처럼 미소공동위원회에 맡겨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선거는 하되 정부수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엔에 보낼 한국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1948년 2월 26일 유엔소총회는 미국안을 놓고 표결에 붙여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가결했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활동 가능한 남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의한 것이다.
       해방후 2년의 귀중한 시간 낭비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남한에서도 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이 보이게 된 것이다. 이승만의 또 다른 승리였다.

    하마터면 대한민국이 탄생하지 못했을 수도

     
       그러나, 메논이 유엔 소총회의 결의안을 가지고 서울에 돌아왔을 때,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내부에서 격렬한 토론이 4일간이나 계속되었다.
       메논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 대표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그 문제는 투표로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1948년 3월 12일 표결에 붙였을 때, 찬성 4표, 반대 2표, 기권 2표로 선거 실시안이 통과되었다. 놀라운 결과였다.
       이승만과 김성수를 중심으로 한 우파 진영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찬성이 4표가 된 것은 메논의 인도가 찬성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성향의 캐나다와 호주 대표들은 예상대로 반대했다.
       그렇지만 시리아와 프랑스는 다행히 반대하는 하지 않고 기권했다.

       만일 인도와 시리아가 원래 예상했던 대로 반대에 가담했다면, 반대가 5표가 되어 남한 선거안이 부결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5⦁10선거가 실시되지 못해 대한민국이 세워지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좌파와 중도파의 5.10 선거 반대 운동

       좌익은 선거를 못하도록 폭동 공세로 나갔다.
    그리하여 1948년 2월에는 이른바  ‘2.7구국투쟁’이라는 폭력사태가 일어났다.
       남로당은 몰래 지령만 내리고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공개적 선동은 좌파연합 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의해 이루어졌다.
    행동은 그것의 외각단체인 전국노동자평의회(전평)이 맡았다.

       좌익들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 반대, 남조선 정부 수립 반대, 미⦁소 양군 동시 철퇴, 친일반동분자 타도, 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등을 요구하며 전국적인 파업을 벌였다. 
       그들은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전신⦁전화선을 끊고, 전신주를 부러뜨리고, 기관차를 파괴했다. 학생들도 민주학생연맹의 선동으로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경찰의 대응이 강력해지자, 좌익들은 산 속으로 숨어 들었다.
    그리고는 ‘야산대’라는 무장 게릴라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 ▲ 이승만 박사가 하지 사령관에게 김구(가운데)를 소개하고 있다.ⓒ
    ▲ 이승만 박사가 하지 사령관에게 김구(가운데)를 소개하고 있다.ⓒ

       그처럼 어수선한 시기에 1948년 2월 10일 김구는 ‘3천만동포에 읍고함’이라는 제목의 감동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자기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미군철수에 반대하는 우파들을 가리켜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하는 것처럼 통일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제 김구는 우익 진영에서 좌익 진영으로 넘어 가고 있는 듯이 보였다.  

    마지막 순간에 김구를 끌어 안으려 하다

      
       이승만은 그러한 김구를 끌어 안으려고 했다.
    김구가 협력하지 않으면 유엔소총회가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의해도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김구 설득에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중국대표로 서울에 와 있던 유어만(劉馭萬)도 가담했다. 중국정부의 장개석은 모택동의 중국공산당과 내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자기의 도움을 받았던 김구가 좌익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1948년 2월 10일 유어만은 하루 종일 이승만,김구,김규식 3거두를 여러 곳에서 만나게 함으로써 자유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에 합의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하지 중장도 이제는 김구와 김규식에게 남한만의 총선거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미 1월 13일에 미 국무부의 앨리슨이 서울을 방문해 이승만과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합의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지 중장은 2월 12일 이승만, 김구, 김규식 3거두를 그의 관저로 초청했다. 그리고는 선거 계획에 합의하여  통일된 의사를 유엔에 알리도록 설득했다. 
       이승만은 대찬성이었다. 그러나 김구(金九)와 김규식(金奎植)의 태도는 애매했다.

       그러다가 2월 16일 두 김씨는 남북 통일정부 수립 방법을 찾기 위해 남북회담을 열자고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제의함으로써 남한의 자유총선거를 거부했다.
       그들은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세워 보겠다는 결심을 내린 것이다. 

       그러자 이승만은 잠시 중단하고 있던 남한총선거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2월 22일의 성명을 통해, 그는 이 말 저 말 듣고 아무것도 못하고 앉았다가는 공산화하고 말 것이므로, 우선은 죽었던 나라를 한편에서라도 살려 놓아야 전체를 살릴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정계는 건국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한 번 분명히 갈라졌다.
    이승만과 김성수를  한편으로 하는 우파와 김구와 김규식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남북협상파 사이에 대결 구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오래간만에 이승만, 하지 중장,미 국무부 사이에 협조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 포럼 공동대표>